애송 詩

[스크랩] 맹문재의 `물고기에게 배우다` 감상 / 권순진

다림영 2013. 7. 5.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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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에게 배우다/맹문재-

 

 

개울가에서 아픈 몸 데리고 있다가

무심히 보는 물 속

살아온 울타리에 익숙한지

물고기들은 돌덩이에 부딪히는 불상사 한번 없이

제 길을 간다

멈춰 서서 구경도 하고

눈치 보지 않고 입 벌려 배를 채우기도 하고

유유히 간다

길은 어디에도 없는데

쉬지 않고 길을 내고

낸 길은 또 미련을 두지 않고 지운다

즐기면서 길을 내고 낸 길을 버리는 물고기들에게

나는 배운다

약한 자의 발자국을 믿는다면서

슬픈 그림자를 자꾸 눕히지 않는가

물고기들이 무수히 지나갔지만

발자국 하나 남지 않은 저 무한한 광장에

나는 들어선다

 

 

<감상>

 

 

 물고기가 물 속 바위 같은 데에 부딪히지 않는 이유는 몸 옆에 있는 '옆줄' 때문이다. 그 옆줄로 물살의 흐름이나 수압 변

화를 재빨리 포착하여 장애물은 물론 물고기끼리 부딪히는 일도 없이 탁한 물속에서도 빠르게 헤엄칠 수 있는 것이다. 몸

통 중앙에 촘촘하게 작은 구멍들로 이어진 옆줄이 없다면 ‘멈춰 서서 구경도 하고 눈치 보지 않고 입 벌려 배를 채우기도

하고 유유히 가는’ 유유자적의 동선을 보여주지는 못하리라.

 

 ‘길은 어디에도 없는데/ 쉬지 않고 길을 내고/ 낸 길은 또 미련을 두지 않고 지운다/ 즐기면서 길을 내고 낸 길을 버리는

물고기들에게/ 나는 배운다’ 이 대목에서 마치 삶의 정답은 어디에도 없으며, 열심히 살아가다 보면 어디에도 길이 있고

신념은 있을 것이나, 그 신념조차 집착할 것은 못 되어 다만 긍정하며 자유롭고 싶다는 말처럼 들린다.

 

 약한 자의 편에 선다는 명분으로 ‘슬픈 그림자를 자꾸 눕히지 않는가’ 시인은 그들과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려는 시도를

접은 게 아니라 인식과 방법론에서 중심이동을 하려는 것 같다. 한때 변혁의 펄럭이는 깃발아래 서 있었던 믿음들이 견고

한 밀실과 좁은 광장에서 벗어나 ‘발자국 하나 남지 않은 저 무한한 광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당연히 더 따뜻해지고 부드

러워지고 자유로워질 것이다. 우울하고 슬픈 감정 따위도 녹여낼 것이다. 그러면서도 의로운 길을 거침없이 가겠다고 한

다.

 

 누구와도 부딪히지 않으며 상처받지 아니하고, 오해도 없고 의심도 없이, 오만이나 질투의 감정도 단단히 묶어두고 사람

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사랑을 소망하는 것이다. 물고기에서 배운 영법으로 세상을 향해 헤엄쳐가는 시인의 옆구리에 길

게 촘촘히 박음질 된 ‘옆줄’ 하나가 보이는 듯하다. 내 옆구리에도 그렇게 낯선 줄 하나 그어졌으면 좋으련만, 저 무한한

광장에서 다만 물고기의 영법을 흉내내어 배워볼 일이다. 

 

-권순진(시인)

출처 : 시와 글벗
글쓴이 : yanggo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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