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송 詩

시베리아 횡단열차 / 한효정

다림영 2013. 7. 10.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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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횡단열차 / 한효정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꼬박 엿새가 걸린다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당신과 마주앉아 여행하는 꿈을 꾸네 그것은

새벽 네 시의 별똥별처럼 차갑고 아름다운 약속

처음 만난 우리는 서먹하게 인사를 나누고

차창 속으로 비치는 서로를 훔쳐보다가 말문을 트겠지

나는 당신 눈 속에 고독하게 들어앉은 여자를 시샘해서

종일 해바라기 씨를 우물거리는 옆자리의 러시아 사내와

보드카를 나눠 마시기도 하겠네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땅, 기차가 멈출 때마다

뚱뚱한 러시아 여인들이 내미는 갓 구운 흑빵을 사고

밤이면 설원 위로 쏟아지는 별들을 졸린 눈으로 구경하다가

슬리핑백의 지퍼를 올려주는 당신에게 눈인사를 하고

해가 뜨면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나 안녕?

칸칸마다 들어찬 숨소리와 냄새에 익숙해질 무렵

기차는 이르쿠츠크에 당도하겠지

우리는 기차에서 내려 손을 잡고

세상에서 가장 깊고 차갑고 푸른 바이칼 호수에 사는

반투명 물고기 골로미얀카를 보러 가야지

호수에 몸을 담그면 우리도 투명해질지 몰라

당신은 내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나는 당신의큭큭

그것은 꿈결처럼 아득하고 달콤하기만 한 일이어서

마치 저 세상의 일인 듯 느껴지네

어쩌면 그곳은 우리가 시작된 곳

내 아버지의 아버지가, 당신 어머니의 어머니가 살았던 곳

어느 생에서 자작나무와 한 송이 눈으로 만났을지도 모르는

당신과 나는 횡단열차의 낡은 의자에 앉아

덜컹거리며 생의 허리를 가로지르겠네

종착역은 가까워오고 우린 여전히 서로를 모르는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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