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중에서
사람의 일생에는 굴곡이 있다. 조선 후기에 전통지리학과 역사지리학을 확립한 책으로 평가받는 <택리지>를 쓴 이중환의 후반기 생은 불우한 날의 연속이었다. 경종을 독살했다는 목호룡의 고변사건<신임사화>에 연루되어 영조 즉위년인 1725년 2월부터 4월까지 4차례나 형을 받았으며, 이듬해 12월에 귀향을 갔다. 1727년 유배지에서 풀려나지만 곧바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다시 유배되는데, 당시 그의 나이 서른여덟이었다.
그후 20여년 방랑생활을 한 뒤에<택리지>를 썼다고 하며, 이 밖에 그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이중환은 <택리지>의 총론에 자신이 처한 상황을 담담하게 적고 있다. “아아 , 사대부가 때를 만나지 못하면 갈 곳은 산림뿐이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데, 지금은 그렇지도 못하다.... 그러므로 한번 사대부라는 명칭을 얻으면 갈 곳이 없다. 그렇다고 사대부의 신분을 버리고 농.공.상이 되면 안전해지고 이름을 얻을 수 있을까. 그렇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동쪽에도 살 수 없고 서쪽에도 살 수 없으며, 남쪽에도 살 수 없고 북쪽에도 살 수 없게 되었다.”
또한 동계기인이 책의 발문에 “이리하여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어 살 집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말년에는 늙은 농부나 고기잡는 첨지가 되길 원하였으나 그것마저 될 수 없었다. 그리하여 <택리지>를 짓게 된 것이다”라고 쓴 것이 남아 전할 뿐이다...
이중환은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길을 떠낫다.그가 길에서 찾고자 했던 것은 자기 자신의 안일이나 권력, 황금의 땅 ‘엘도라도’가 아니었다. 사대부들뿐만이 아니라 모든 백성들이 살 만한 곳, 즉 이상향이었다.
이중환은 발문에서 “이것은 우리나라의 산천.인물.풍속.정치와 교육의 연혁과 치란득실의 잘하고 못한 것들을 차례로 엮어 기록한 것이다”라고 한 뒤에 “이 글은 살 만한 곳을 가리려 하나 살 만한 곳이 없음을 한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을 활용해보려는ㅅ ㅏ람은 문자 밖에서 참 뜻을 구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라고 하여, 완전한 땅은 아닐지라도 살 만한 땅이란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 사는 것임을 알려 주었다. ..
아! 사라져 버린 절이며 고개며 땅이름들이여! 나는 그 길을 가면서 새삼 길을 앞서 간 그분들의 고독과 고통을 실감할 수 있었다. 먹고 사는 것조차 힘겹던 시절에 사람이 살 만한 곳을 찾고 우리의 역사와 국토의 면면에 흐르는 이야기들을 풀어 놓기 위해 조선 팔도를 떠돌아다닌 그들을 만난 뒤, 나는 내 삶이 그래도 행복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17세기에 청담 선생이 걸으며 보았던 풍경과 내가 20세기말과 21세기 초에 걸으며 보았던 산천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달랐다. 특기 <복거총론>에 수록된 지리와 생리, 인심과 산수는 더욱 그러했다...
이 책을 쓰면서 나는 새삼 우리 국토의 아름다움과 우리 문화유산의 진정성 그리고 이땅을 살았던 사람들과 이 땅을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해야 함을 알게 되었다. 나는 세상을 떠돌며 길 위에서 많은 것을 보았고 배웠다. 그러나 바꿔서 말한다면 나는 아직 세상의 많은 것을 보지 못햇고 아직도 배워야 할 것이 도처에 있다. 내가 한발 한발 걸으며 지나온 산과 강, 그 길을 걸으며 내가 발견했던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나였고 처연하도록 아름다운 우리의 국토였으며, 그 국토를 몸서리치도록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남양도호부 ‘고적’편에 “세상에 전하기를 당나라에서 재사 여덟사람을 보내와서 고려 사람을 가르쳤는데 홍이 그중 한 사람이다. 자손이 대대로 귀히 되어 사는 곳을 당성이라 이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 때문인지 오늘날 쓰고 있는 ‘당신’이라는 말이 남양홍씨로부터 유래되었다는 말도 있다. 홍씨는 8학사의 한 사람으로 고구려에 문화를 전파하러 와서 활동하다가 연개소문의 난으로 지리산 덕산에 피신해 있다가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자 부름을 받아 선덕여왕께 나아갔다. 선덕여왕이 그를 극진히 예우해서 자신의 신하처럼 신이라 하지 않고 당나라의 신하라 해서 ‘당신’이라고 한 데에서 오늘날의 당신이라는 말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당(唐)’대신에 ‘당(當)’을 쓰고 있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p53
용인을 김수녕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용인은 작은 고을이다. 왕도와 인접한 까닭으로 밤낮으로 모여드는 대소 빈객이 여기를 경유하지 않는 적이 없는데, 이는 대개 남북으로 통하는 길목인 때문이다. 옛 원관이 작아서 겨우 하룻밤 묵을 수 있으나 매우 더운 때이면 답답하고 트이지 않아서 손님이 와도 더운 느낌과 번울함이 가실 수 없어 오랫동안 애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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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에서 가장 다스리기 힘든 고을이라는 용인시를 두고 “생거진천사거용인”이라고 말한다. 살아서는 진천에서 살고 죽어서는 용인에서 산다는 말인데 , 그 말이 연유된 것은 신라 말의 고승 도선국사가 용인 땅의 형세를 “금닭이 알을 품고있는 형상”이라고 했다는 데서 유래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지역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명문세가들이 이곳 용인에 많이 묻혀 있다. 모현면 능원리에는 포은 정몽주의 묘가 있고, 모현면 오산리에는 삼학사의 한 사람인 오달제의 묘가 있다. 구성면 마북리에는 구한말의 인물 민영환의 묘, 이동면 시미리에는 우국지사 이한응의 묘가 있고, 용인시 이동면 묘봉리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 부친의 묘가 있다.p69
정조는 화성 능 행차를 마치고 돌아가던 길에 일찍이 공자가 “부모가 인연을 맺었던 나라를 떠나니 더디게 걷노라”라고 썼던 것처럼 애달픈 시 한 편을 남겼다.
아침저녁 어버이를 잊지 못해 오늘 또 화성이라
가랑비 듣는 어버이 무덤이 어느덧 비 뿌린다.
재실 주위를 걷노라니 그리운 정 젖어든다.
사흘 밤을 묶을 수 있다면 못 다한 정채우련만
말머리 벌써 돌아갈 곳을 향하고
뒤돌아 바라본 즉 애틋한 구름이 떠오르누나. p76
수원의 북쪽에 자리 잡은 안양시의 고구려 때 이름은 율목군이다.1414년에 금천현과 과천현을 합해 과천현이 되었다가 1941년에 안양면이 되고 1973년이 시로 승격된 안양의 지세를 변계랑은 “산은 관악과 연하여 평야를 둘렀고, 물은 청계로 내리어 큰 하수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동국여지승람>에 안양시의 진산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관악산과 삼성산이 솟아있고, 삼성산의 안양사에서 발원한 안양천이 한강을 향해 흐른다.
조선팔도 어디거나 그 고을의 수령이 갈리게 되면 송덕비를 세우게끔 되어 있었다. 경기도의 과천현감이 고을 떠나면서 옷깃을 여미고 종이로 싸놓은 송덕비를 제막했더니 그 비면에 송덕은커녕 금일송차도(오늘 이 도둑을 보내노라)‘라고 씌어져 있는게 아닌가. 탐욕스럽고 대범했던 이 현감은 이방에게 붓을 가져오라고 한 다음 그 비문 곁에 다음과 같이 써붙이고 과천 고을을 떠나갔다 한다. 명일래타도( 내일이면 또 다른 도둑이 오려니), 차도래부도( 이 도둑은 끊임없이 오노매라)’ 그러한 과천현감 같은 탐관오리들의 명맥이 지금도 도지사. 시장.군수로 이름만 바귄채 이어지고 있다. p77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안산의 토산물은 소금과 홍어.전어.토하이며,박원형은 안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온 고을이 소조하니 사면이 산인데
조망 가운데의 절은 있는 듯 없는 듯한 사이로다.
작은 마루에 해는 정오인데 봄 졸음을 이루니
소매에 가득한 맑은 바람 뼈에 부딪쳐 차도다.
한편 이곳 안산의 형국을 두고, “지세가 한데 서리어 일만떨기의 연꽃같이 뭉쳤다”고 하여 연성이라 불렀는데, 조선 초기의 학자 강희맹이 중국 남경에서 가져온 연꽃 씨를 심어 널리 퍼지게 한 곳이 이곳 안산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안산시가 공업단지로 변모하면서 연성이란 말이 무색하게 되었다.
<동국여지승람>에 금천.안산.과천으로 나와 있는 지역들에서 안양시.시흥시.광명시가 만들어졌는데 이 일대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안산과 시흥 가운데에 위치한 바다를 가로막은 시화호 방조제가 오염되면서부터였다. 조선 초기의 학자 변계량이 과천을 두고 “산은 관악과 마주보고 물은 청계로 내려간다” 했는데, 관악산의 나무들을 가져와 흥선대원군의 거처였던 운현궁을 지었으며, 서울 5대궁의 땔나무가 모두 이 산에서 나온 나무였다고 한다. p80
밤섬은 고려시대에 죄인을 좆아 보냈던 귀양지였으며 배로 건너야 했던 모래섬이다. 양밀벌은 말을 먹이던 들이었고 지금의 국회의사당 자리에 있던 양밀산은 말을 놓아 먹이던 산이었다고 하는데, 여의도는 작은 샛강을 사이에 두고 영등포와 떨어져 있는 한강 속의 섬이었다.
한편 이 섬의 이름에 얽힌 유래가 재미있다. 여의도라고 이름지어진 것은 여의도汝矣島가 홍수만 지면 가라앉는 쓸모없는 땅이기 때문에 ‘너나 가져라’라는 뜻으로 여의도라고 했다는 설이 있고, 국회의사당이 자리 잡은 양밀산은 홍수가 나 여의도가 휩쓸려 갈 때에도 물 속에 잠기지 않고 나타나 있어서 ‘나의 섬’ ‘너의 섬’하고 불렀던 데서 비롯된 이름이라고 한다. p117
화석정은 원래는 고려 말의 학자 야은 길재가 살던 곳으로, 이율곡의 5대조 이명신이 물려받아 정자를 지은 후 주위에 온갖 괴석과 화초를 심고저 화석정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이는 여덟살에 화석정에 올라 시를 지었다.
숲속 정자에 가을이 이미 늦으니
시인의 정회 다할 길 없어라.
멀리 보이는 물은 하늘과 연하여 푸른데
서리맞은 단풍은 햇볕에 붉구나.
산은 외로운 둥근 달을 뱉고 강은 만리의 바람을 머금었도다.
변방의 저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가
아득한 울음소리 저녁 구름 속으로 끊어져 버리네.
..
율곡은 살아 있을 때 틈나는 대로 화석정 기둥에 기름을 발라 두게 하였는데, 율곡이 죽은 지 8년 뒤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선조는 급하게 서울을 빠져나와 의주로 피난길에 올라 임진강 가에 당도했다. 하지만 주위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때 느닷없이 강 전체가 대낮처럼 환해졌다. 알고보니 선조의 피난길을 수행하던 이 힝복이 기름을 먹인 이 정자에 불을 지른 것이다. 그 불빛의 도움을 받아 선조는 무사히 임진강을 건넜다고 한다. p153
서울의 땅값이 언제부터 오르기 시작했고 언제부터 투기 바람이 일기 시작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한국토지공사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60년대 초 강남의 땅값은 한 평에 90원에서 120원이었는데 제 3한강교가 건설되면서 크게 개발될 것이라는 소문에 말죽거리 일대의 땅 값이 4천원 대로 뛰었다고 한다. 계속해서 땅값은 오르기 시작하여 80년 말 화곡동의 땅 한 평 값이 40만원이었다.
1963년 화곡동 일대의 땅값이 200원이었으니까 17년 사이에 2천배가 오른 것이다. 그 시기에 강남구 압구정동은 1,667배 올랐으며 상계동조차도 1천배가 넘게 올랐다. 그러나 한강 이북의 경우에 용산구 후암동은 28배 올랐다고 한다. 1989년 6월에 발표된 서울에서 땅을 가지고 있는 가구는 전체 가구의 28퍼센트밖에 안 되었다. p121
외국인들이 바라본 19세기 말 서울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서울은 정부가 위치한 곳일뿐만 아니라 공적 생활의 중심이며 관리로 등용되는 유일한 길인 문학시험이 치러지는 곳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서울에서 무언가 ‘한 건 건지기’를 늘 바라고 있다. 따라서 서울로 향하는 영속적이고 잠재적인 인력이 항상 일정하게 존재한다. 맑은 ㅇ후에 양반들의 걸음걸이를 흉내내어 팔을 흔들고 어슬렁거리며 넓은 도로를 따라 걸어가는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관직을 갈망하는 사람들이다. 모든 한국인의 마음은 서울에 있다 . 지방관리들은 수도에 따로이 저택을 갖고 있으며, 연중 많은 기간동안 부임지의 직무를 경시해도 된다고 믿고 있다.
대부분의 토지 소유자들은 수도에 살고 있는 부재 지주들이며, 그들은 지대를 받기 위해 지방의 민중들을 ‘쥐어짠다’. 여행중의 음식값과 숙박료를 댈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1년 중에 한 번이나 두 번 서울로 걸어오면, 어느 계급일지라도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단 몇주라도 서울을 떠나 살기를 원치 않는다. 한국인들에게 서울은 오직 그 속에서만 살아갈 만한 삶의 가치가 있는곳으로 여겨진다.
영국 왕립지리학회 회원 으로 1894년 조선을 답사했던 이사벨라 버드 비숍여사가 바라본 110여년전 서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서울로만 해바라기처럼 향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각 지역의 국회의원이나 고급관리 및 유지들이 서울에 집을 두고 살고 있는 것이 형태는 천양지차로 달라졌지만 내용은 오늘날과 흡사하게 여겨지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p122
결국 당시 왕씨 성을 가진 사람으로 벼슬을 하였던 사람들은 모두 도망쳐 숨어서 성명을 바꾸고 살아남았다. 마馬씨로, 전田씨로, 혹은 옥玉씨로 바꾸어 모두 왕자를 글자 속에 숨겼던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왕씨라고 하지 않았다. 그런 연유로 세종 때 와서 비로소 왕순례 한 사람을 찾아냈고 선우씨를 기자전의 전감으로 삼던 예에 의거하여 전답과 노복을 주고 전참봉을 세습하여 그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왕씨를 없앤 것은 태조의 의사가 아니고 공신들의 모략으로부타 나온 것”이라고 태조가 말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p173
충청도는 충주와 청주에서 한 자씩 따서 지은 이름이다.
<연려실기술>에는 “충청도를 호서라고 부른다. 또는 제천에 의림지호가 있기 때문에 충청도를 호서라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p191
(한자 충실히 쓰지 않음- 컴 매우 이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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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그런 꿈을 꾼 적이 있다. 그것은 아직도 유효한데 말하기는 쉽지만 참으로 실행하기 힘든 일 일 것이다. 전국유람.. ^^..참... 막연하다. 마음 나누는 친구 또한 외국여행이 아니라 걸어 걸어 우리나라를 다니는 여행의 생각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정말 다만 몇 리라도 걸어서 마을 마을을 건너가는 꿈을 꾸어 보는데 이러한 일은 복잡하게 얽혀있는 현실에서 가능한 일인지. 스님말씀을 빌리자면 하면된다! ... 그냥 일어나면 될 것을 누워서 눈만 감고 뒤척이는 실상이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는 반드시 내어 놓아야 한다. 다 붙잡고 있으려니 이도 저도 아니 되는 것...알면서도 행하지 못하고 행하지도 못하면서 생각만 부풀리고 있다.
생각만으로 뒤척이니 불가능 한 것이리라. ‘늙어지면 못노나니...’ 이 노랫말씀이 얼마나 지당하신지 노인들을 보며 깨닫는다.
노인이 되어가고 있는 중년이다. 아니 벌써 노인의 청년기에 도래했다. 아이들 학업도 다 끝내지 못했고 입에 풀칠도 쉽지 않다. 책임을 다하게 되는 날은 언제일까? 모두 내려놓고 옛 선비처럼 그렇게 떠다니며 고을고을을 살필 수 있는 능력과 건강과 넓은 아량을 지니게 될 힘을 나는 지금 기르는 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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