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만권을 읽으면..

징비록/서애유성룡/이재호 옮김/역사의 아침

다림영 2014. 7. 19.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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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경詩經>내가 지난 일의 잘못을 징계하여 뒤에 환난患難이 없도록 조심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내가 <징비록>을 저술한 까닭이다.

 

나와 같이 보잘 것 없는 사람이 어지러운 시기에 나라의 중대한 책임을 맡아서, 위태로운 판국을 바로잡지도 못하고 , 넘어지는 형세를 붙들어 일으키지도 못했으니, 그 죄는 죽어도 용서받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오히려 시골구석에서 목숨을 부쳐 구차하게 생명을 이어가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임금님의 너그러우신 은전이 아니겠는가.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조금 진정되어, 지난날의 일을 생각하니 그때마다 황송하고 부끄러워 용신할 수가 없다.

 

이에 한가한 틈을 이용하여 내가 귀로 듣고 눈으로 본 바, 임진년(선조 25, 1592)부터 무술년(선조 31,1598)에 이르기가지의 일을 대강 기술하니 이것이 얼마가량 되었고, 또 장...차자箚子. 문이文移와 잡록雜錄을 그 뒤에 부록附錄했다.

 

비록 보잘 것 없지만 모두 그 당시의 사적事蹟이므로 버리지 않고 두어서, 이것으로 내가 시골에 살면서도 성심으로 나라에 충성하고자 하는 나의 간절한 뜻을 나타내고, 또 어리석은 신하(유성룡)가 나라에 보답하지 못한 죄를 나타내도록 할 것이다.

 

만력 병술년(선조 19, 1582) 무렵에 일본국 사신 귤광(다치바나 야스히로)이 일본의 국왕 평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서신을 가지고 (우리나라)에 왔다.

당초에 일본 국왕 원씨가 홍무초기에 나라를 세워 우리나라에서도 사신을 보내 경조의 예절을 치렀으니 , 신숙주가 서장관으로 왕래한 것이 곧 그 한예다. 훗날 신숙주가 죽을 때 성종께서, “할 말이 있는가?”라고 물으시니 신숙주가 이렇게 대답했다.

 

원컨대 일본과 실화 하지 마옵소서.”

성종께서 그 말에 감동하여 부제학 이형원과 서장관 김흔을 보내 화목을 유지하려 했으나 (이들이)대마도에 이르렀을 때 (심한)풍랑에 병을 얻엇다는 서찰을 올려 그 상황을 보고하자 성종은 도주에게 서장과 폐백만 전하고 돌아오도록 명했다. 이후로는 다시 사신을 보내지 않았고 , 그 나라에서 사신이 올 때만 예절을 갖추어 접대했다.

 

이즈음 평수길이 원씨를 대신하여 국왕이 되었다. 어떤 이는 평수길이란 자에 대해 “(원래) 중국사람인데 왜국에 흘러 들어와서 나무장사로 생업을 삼고 살았다. 어느 날 국왕이 길에서 우연히 그를 만났는데 그 사람된 품을 이상히 여겨 불러서 군대에 편입시켰더니 용력이 있고 전투를 잘하여 전공을 쌓아서 대관에까지 이르고, 이내 권력을 잡게 되어 마침내 원씨의 자리를 빼앗아 왕이 되었다고 말했다. 또 어떤이는 원씨가 다른 사람에게 죽음을 당하니 평수길이 또 그 사람을 죽이고 나라를 빼앗았다라고도 했다. p21

 

 

황윤길이 부산으로 돌아오자 일본의 정세를 시급히 보고하며 반드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서울에 와서) 이윽고 복명復命할 때, 임금께서 불러보시고 물으시니 황윤길은 그전의 말대로 대답했고, 김성일은 신은 그러한 정세가 있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라고 하고는, 이어 황윤길이 인심을 동요시키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라고 했다. 이에 의론하는 사람들이 어떤이는 황윤길의 말을 찬동했고, 어떤이는 김성일의 말을 찬동했다.

 

내가 김성일에게 그대의 말은 황사(황윤길)의 말과 같지 않은데 만일에 병화가 있게 되면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묻자, ”나 역시 어찌 왜적이 끝내 동병치 않을 것이라고 단언하겠는가마는, 다만 황윤길의 말이 너무 지나쳐 중앙과 지방의 인심이 놀라 당황할 것이므로 이를 해명했을 뿐입니다라고 했다. p31

 

나는 나라가 태평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사졸들은 겁이 많고 나약해졌으니 과연 급변이 생긴다면 이것을 항거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오. 내 생각으로는 몇 해 뒤에 살마들이 자못 군사일에 익숙해진다면 난을 수습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나 지금으로서는 매우 걱정이 되오라고 했으나 신립은 도무지 반성하거나 깨닫지 않고 가버렸다. p49

 

430일 새벽에 임금께서 서쪽으로 파천(서울을 버리고 피란하는 일)의 길을 떠났다.

신립이 떠난 후 서울 사람들은 날마다 싸움에 이긴 보고가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전날 저녁에 전립을 쓴 사람 세명이 말을 달려 숭인문으로 들어오자 성안 사람들이 다투어 전쟁 소식을 물으니 그들이 대답하기를 우리는 순변사(신립)군관의 노복인데, 어제 순변사가 충주에서 패전하여 죽고 여러 군사들도 크게 무너져 우리들은 간신히 몸만 빠져나와 집안사람들에게 알려 피란시키고자 합니다라고 했다.

 

이말을 들은 사람들은 크게 놀라서, 만나는 사람마다 서로 전하고 알려 얼마 안 되어 온 도성안이 모두 놀라게 되었다. p96

 

 

이 순신은 시석을 무릅쓰고 몸소 힘껏 싸웠는데 , 날아오는 탄환이 그의 가슴을 뚫고 등뒤로 나갔다. 곁에 있던 부하들이 부축하여 장막 안으로 옮겼는데, 이순신은 싸움이 한창 급하니 절대로 내가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마라했으며 말을 마치자마자 곧 숨을 거두었다. 이순신의 조카 이완은 담력과 국량이 있는 인물이었다. 이순신의 죽음을 숨긴 채 이순신의 명령이라 하여 싸움을 급히 독려하니 군중에서는 그의 죽음을 알지 못했다.

 

 ..우리 군대와 명나라 군대는 이순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어져 있는 각진영이 통곡하여 마치 제 어버이의 죽음을 통곡하는 것과 같았다. 또 영구가 지나는 곳마다 백성들이 곳곳에서 제전을 차리고서 상여를 붙잡고 통곡하기를 공께서 진실로 우리를 살리셨는데, 지금은 공이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십니까? ” 하며 길을 막아 상여가 가지 못하게 되었으며, 길 가는 사람들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p330

 

 

이순신의 자는 여해汝諧, 본관은 덕수德水. 그 선조 중에 이변이란 이가 있는데, 벼슬이 판부사에 이르렀으며 강직하다는 명성이 있었다. 그의 증조는 이거인데 성종을 섬겼다. 연산군이 동궁으로 있을 때 이거인데 성종을 섬겼다. 연산군이 동궁으로 있을 때 이거는 강관이 되었는데 엄격해서 꺼림을 당했으며, 일찍이 장령이 되었을 때(누구라도)탄핵하여 권력자를 회피하지 않았기 때문에 백관들이 그를 두려워해서 범 장령이라는 칭호가 있었다.

 

이순신의 조부 이백록은 가문의 음덕으로 벼슬했고, 그의 아버지 이정은 벼슬하지 않았다.

순신은 어렸을 때 재질이 영특하고 활달해서 어떤 사물에도 구속을 받지 않았다. 여러 아이들과 놀이를 할 때, 나무를 깎아 활과 화살을 만들어 마을의 길거리에서 놀면서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의 눈을 쏘려고 하여 장로들도 그를 두려워하여 감히 그 집 문앞을 지나가지 못하는 이도 있었다. 장성해서는 활쏘기를 잘해서 무과로 출세했다. 그의 조상들은 대대로 유학을 업으로 했는데, 순신 때에 와서 처음으로 무과에 합격해 권지훈련원 봉사(종팔품직)로 보직되었다.

 

병조판서 김귀영이 서녀가 있어 순신에게 첩으로 주려고 했는데 순신이 응낙치 않았다. 다른 사람이 그 이유를 묻자 , 순신은 내가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갔는데, 어찌 권세 있는 집안에 의탁하여 승진하기를 도모하겠는가?”라고 했다.

 

병조정랑 서익이 자기와 친근한 사람이 훈련원에 있었는데, 그 사람을 차례를 뛰어넘어 천거하여 보고하도록 했으나, 순신은 원중 장무관으로서 옳지 않다고 버텼다. 그래서 서익은 순신을 패지로 불러 뜰아래 세우고 힐문했으나, 순신은 말과 기색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곧게 변명하며 흔들리지 않았다. 서익은 더욱 크게 노하여 기승을 부렸으나 순신은 조용히 대답하면서 끝내 조금도 기가 꺾이지 않았다.

 

서익은 본래 객기가 세어 남을 업신여겼기 때문에 동료들도 그를 꺼려 될수록 말다툼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날 하리들이 섬돌 아래 있다가 모두 서로 돌아보며, 놀라 혀를 내두르면서 이분 (이순신)이 감히 본조의 정랑에게 대항하니 앞길이 어찌 될지 생각하지 않은것인가?” 하였다. 날이 저물어서야 서익이 계면쩍게 기세가 꺾이면서 순신을 돌려보냈는데, 견식이 있는 사람들은 이 일로 순신의 인품을 알게 되었다.

 

순신이 옥에 갇혔을 때 장차 일이 어떻게 될지 알수 없었는데, 옥리가 그의 조카 이분에게 뇌물을 쓰면 나갈 수 있겠다라고 은밀하게 말했으나 , 순신은 이 말을 듣고 이분에게 화를 내며 죽으면 죽었지, 어찌 도리를 어기면서 살기를 도모하겠는가하였으니 그가 지조를 지킴이 이와 같았다.

 

순신의 된 품은 말과 웃음이 적고 용모가 단정하여 몸을 닦고 언행을 삼가는 선비와 같았으나 , 그의 뱃속에는 담기가 있어 자기 몸을 잊고 국난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으니, 이것은 평소에 수양을 했기 때문이다. 그의 형은 희신과 요신인데, 모두 순신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에 순신은 그들의 자녀를 자기 자녀와 같이 돌보아주고, 시집보내고 장가보내는 데도 반드시 형의 자녀를 먼저 보내고 자기 자녀는 뒤에 보냈다. 재간才幹은 있어도 명운命運이 없어서 가지고 있던 재간 백가지 중에 한 가지도 시행하지 못하고 죽었으니 , 아아!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p339..

 

적군의 배들은 어두침침한 그늘 속에서 수없이 다가와 장차 우리 배에 접근하려 했다. 이에 중군에서 대포를 쏘면서 함성을 지르니 여러 배들도 모두 이에 응했다. 적병은 우리가 대비하고 있는 것을 알고 일제히 조총을 쏘앗는데, 소리가 바다 속을 진동하고 총탄이 빗발처럼 물속으로 떨어졌다. 적병이 감히 우리를 침범하지 못하고 물러나 달아나버리니,여러 장수들이 모두 순신을 신으로 여겼다. p340

 

 

 

옛날에 조조가 병사에 관하여 진언하기를 군대를 사용하여 전장에 나가서 교전할 때 급한 것이 세 가지 있는데, 첫째는 지형地形(지세地勢)을 얻는 것이고, 둘째는 군졸이 명령을 잘 듣고 익히는 것이며, 셋째는 병기가 예리한 것이니, 이 세가지는 용병의 대요이며 승부가 결정되는 것이므로 장수 된 사람은 알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하였다.

 

성이란 도적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는 곳이므로 마땅히 견고함을 으뜸으로 한다. 옛날 사람이 성의 구조를 말할 때 모두 치稚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니 이른바 천 치, 백 치 라는 것이 이것이다.p357

 

 

나는 차자箚子를 올려 군량을 조치하고 더욱 군사를 모집하여 1만 명이 다 차거든 오五營을 설치하고, 영마다 각각 2천명을 소속시켜 매년 절반은 성안에 남겨두어 교련시키고 절반은 성밖에 내보내 널찍하고 비옥한 땅을 선택하고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곡식을 저장토록 하되, 번갈아 교체시킨다면 몇 해 후에는 군량의 근원이 튼튼해지고 국가의 근본도 견고하게 될 것입니다하였다. 임금께서 그 의론을 병조에 내려보냈으나 곧바로 시행하지 않아, 결국 효과를 보지 못했다. p368

 

나는 차자를 올려 군량을 조치하고 더욱 군사를 모집하여 1만 명이 다 차거든 오영을 설치하고, 영마다 각각 2천명을 소속시켜 매년 절반은 성안에 남겨두어 교련시키고 절반은 성밖에 내보내 널찍하고 비옥한 땅을 선택하고 둔전을 설치하여 곡식을 저장토록 하되, 번갈아 교체시킨다면 몇 해 후에는 군량의 근원이 튼튼해지고 국가의 근본도 견고하게 될 것입니다하였다. 임금께서 그 의론을 병조에 내려보냈으나 곧바로 시행하지 않아, 결국 효과를 보지 못했다. p368

 

 

서애 유성룡(1542~1607)

이 사람은 하늘이 낳은 사람이니 뒷날 반드시 국가에 큰 공을 세울 것이다.”

퇴계 이황이 21세의 유성룡을 처음 본 후 이렇게 찬탄했다.

한눈에 그의 명석한 판단력과 정치가적인 소질을 알아본 것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崖, 본관은 풍산인 유성룡은 1542년 경상도 의성에서 황해도 관찰사 유중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매우 총명하여 6세에 <대학>8세에 <맹자>를 배웠고 21세에 안동의 도산에 가서 이황 선생을 찾아 뵙고 그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1592년 수많은 일본군이 침입해 부산지과 동래성이 잇달아 함락되고 도성이 위태로워지자, 몇몇 신하들은 사태가 위급할 경우에는 곧바로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유성룡은 이를 강력히 제지하고 왕에게 임금께서 우리땅을 단 한 걸음이라도 떠나신다면 조선 땅은 우리 소유가 안 될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개성에서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일부의 모함으로 이내 파면되고 다시 부원군으로 서용되어 안주에서 명나라 장수의 접대와 군량보급에 힘썼다.

 

 이후 전란이 끝날 때까지 영의정으로서 삼남도체찰사, 사도도체찰사를 겸무하면서 군국의 정무를 한 몸에 지고, 외교, 군무, 민정등에 종횡무진한 정치적 역량을 발휘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나라를 지켰다. .66세로 세상을 떠난 그에게 조정에서는 문충 文忠이란 시호를 내렸으며 영남 지방의 선비들은 병산서원에 향사했다.

 

 

이재호

1920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났다. 동국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부산대학교 사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부산대학교 명예교수이고 문학박사다. 저서는 <한국사의 비정>,<조선정치제도 연구>,<한국사의 천명>,<창주 산문집>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삼국유사>,<삼국사기>,<금오신화>,<회재전서>,<서애전서>,<반계수록>,<정다산문선>,<망우당문집>,<논어정의>,<맹자정의>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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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드라마 정도전이 끝나고 얘길 들었다. 방송국에서는 그런 드라마 일 년에 한번만 방영하기로 했고 내년에나 되어야 볼 수 있다고 했다. <징비록>이 그 다음 타자라 했다. 하여 잘 알고 있는 이순신과 임진왜란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읽게 된 것이다. 정도전이 끝날 무렵 시사프로그램에서 임진왜란에 대해 들었다. 네 번에 걸쳐 방송되었는데 난세에나 그렇지 않은 시대나 악인들은 항시 선인을 해치는 것이 법칙인지 때마다 그러한 일은 지속되었다.

 

지금의 시대도 어쩌면 다르시지 않을 것인데 항시 앞서 나가는 사람에게는 꼭 따르는 일 같기도 하다. 그것을 생각하면 이들은 더욱 몸가짐과 주변에 마음 씀에 대해 돌아볼 일이다.

인생이란 복과 화가 항시 따르는 것임을 명심하고 겸손함을 잊지 않는다면 순탄할 것이고 화가 온다 해도 진실은 늘 살아 숨을 쉬는 것이니 높이 올라갈수록 처음의 마음으로 낮은자세를 평시 유지해야 할 것이다.

 

영화 또한 나온다는 얘기를 들었다. 큰 배역을 맡은 배우의 이야기가 오르내리곤 하니 봐야 할 것 같다.

어렸을 때 학교마다 이순신의 동상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장군 하면 이순신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무장으로서만이 아니라 그 지극한 인간됨을 조금 더 깊이 알 수 있었다.

 

또한 이황께서 20대 초반의 유성룡을 말씀하시니 다음주엔 그분에 대한 글을 읽어야 하겠다.

 

덥고,덥고,덥다! 에어컨은 두고 선풍기로 더위를 참아내고 있다. 조명도 끄고 밝기만 유지하는 불 하나만을 켜 두었다. 주말인지라 손님은 거의 없고 어쩌면 벌써부터 휴가를 떠나고 있는 것인가 한다.

카페엔 팥빙수를 찾는 이들이 줄을 잇고 있다. 그들을 보며 생각하기를 입에 찬 것이 몸을 식힐 순 있겠으나 과도하면 몸이 차갑게 되니 이는 자연을 거슬리는 일... 더울 땐 더운 음식으로 더위를 극복해야 함을 나이가 들면 생각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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