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년 1797 5월 5일에 받은 편지
퇴근한 뒤 잘 지냈는가? 얼마동안 소식이 없어 아쉬웠다. 오늘 강연(講筵)에 들어와 참석한 일은 과연 좋았다. 공무로 대궐에 나왔을 때 마침 강연이 있는 날이거든 반드시 들어와 참석하라. 늘그막의 근력으로는 매일 새벽같이 사진(仕進)하기 어려울 터이니 내일 주좌(籌坐)에는 병을 핑계대고, 내일모레 강연을 열 것이니 곧바로 주자소(鑄字所)에 사진 하는 것이 어떠한가? 어장군(魚用謙)은 과연 만나서 물어보았는가?
강연에 따라 들어오는 일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게는 지난 전례를 근거로 삼아 연석에서 여쭈었다고 말하는 것이 좋겠다.
오늘은 명절이다. 기름먹인 부채에 투식적은 글을 써서 보내니, 용면거사(龍眠居士)의 솜씨를 빌려 그림을 그려서 쓰도록 하라. p64
정사년 17976월 27일 식전에 받은 편지
이조 참의<金祖淳>의 정사(政事)는 그래도 너무 치우쳤다고 하겠다. 볼품없는 말석조차 소론과 남인을 의망하는 것은 거론하지 않았으니 말이 되겠는가? 정(丁) <丁若鏞>을 서반(西班)으로 보내지 않은 것은 선(善)을 권장하는 뜻이 전혀 아니다. 한두 가지 일 때문에 반세(半世)의 원한과 유감이 날로 심해지니, 이러한 것들을 어찌 유념하지 않는가? 참판<洪明浩>이 들어올 것이니, 이번 정사에서 서반으로 보내도록 하는 것이 어떠한가? 참의의 사직 상소는 반드시 베껴서 보는 것이 어떠한가? 참으로 볼만할 것이다. 이만 줄인다. p77
정사년 179710월 18일에 받은편지
보내준 편지를 받고 근황이 좋다는 것을 알았으니 매우 기쁘다. 정 대간(鄭臺諫)<鄭?成>에게는 추고(推考)만 하라는 명을 내렸으니 알아서 써서 들일 것이다. 이런 글을 올리는 것은 한 번으로 족하니, 또다시 내어서는 안 된다. 그리 알도록 하라. 그 차자는 매우 놀라우니, 이런데도 말하지 않는다면 어찌 벽패(僻牌)라 하겠는가? 칭찬하는 자는 식성(食性)을 알지 못하겠다. 이만 줄인다.p122
무오년 17983월 17일에 받은 편지
보내준 편지를 받고 위안이 되었다. 마침 손님이 있어 사람을 시켜 슨다. 선공감의 빈자리에 한(韓)을 임명하지 못할 이유는 없는데, 여론이 어떠한지 모르겠다. 널리 의견을 듣고 결정하는 것이 어떠한가?
어제 개성유수<黃昇源>를 처리한 일은 다름이 아니라 내 혈기가 끓어롤라 막지 못한 것인데, 그 뒤 생각해보니 화가 난 나머지 말을 너무 많이 하고 말았다. 껄껄 웃을 일이다. 황(黃)<황승원>처럼 겨우 사람 꼴을 갖춘 자가 감히 침을 튀기며 변명하는 것도 부족하여 그가 그 일을 조사한 것은 염치 외에도 기강에 크게 관계된다. 이 또한 근래에 의심하던 중에 생긴 일이기에 대간의 상소가 혹 경들에게서 나왔을까 하여 그러한 것이니, 어찌 한탄스럽지 않겠는가? 어찌하면 조정 안에서도 화목하고 조정 밖에서도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잃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근래 꽃구경 가는 길에 경이 지은 시에 “골짜기는 늘상 그대로인데 누대는 반나마 비었네<林壑 長應在,樓臺半是空>”라는 구절이 있었다고 한다. 전하는 말이 맞다면 반나마 비었다는 뜻이 무엇인지 듣고 싶다. 몽상(夢相)<金鍾秀>이 경상도로 가려는 계획은 절로 깨치게 될 것이다. 그 사이 어떻게 지낸다고 하는가? 나도 물어보려고 한다. 이만 줄인다.p161
무오년1798 11월 11일 밤 삼경에 받은 편지
이른바 ‘더러운 일’은 소가 헐떡거리는 이유를 물었다는 의리에 비추어 보면, <그 일을 금지할 경우>지금과 같은 흉년의 한겨울에 백성들을 추위에 떨게 만들 터이니, 이것을 가지고 문제를 삼아서는 절대로 안 된다. 한성부(漢城府)의 아전을 수감하고, “법을 집행하는 관원이 금지하고자 한다면 어느 때인들 못하겠는가마는 이 같은 흉년과 이 같은 겨울철에 공연히 백성들을 소란케 하는가?” 라고 말한다면, 그 말이 매우 옳을 것이다.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반드시 이대로 하는 것이 어떠한가? 그 본래의 일을 조사하였더니, 병조판서<李時秀>가 일전에 판윤<具?>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판윤이 지레 그 말을 믿고서 오부(五部)에 분부하여 그 문제를 기록한 책을 만들어 바치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니 어찌 아전을 수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전라도에서 도적이 발생한 일에 대해서는 이후의 빈대(賓對)나 주좌(籌坐)에서 포도대장(捕盜大將)을 면칙(面飭)하라. 그리고 내일이라도 구관 당상(句管堂上)으로 하여금 감사(監司)와 병사(兵司)에게 편지를 보내어 직분을 다하지 못하였다고 꾸짖고, 이후로도 소홀히 한다면 연적에서 아뢰어 감죄(勘罪)하겠다고 말하도록 하는 것이 어떠한가?
태안군(泰安郡)의 세금 납부에 관한 폐단은 호조의 아전을 불러다 물은 뒤 다시 희(羲)<金羲淳> 시켜 자세히 조사하게 하라. 만약 그래도 그만둘 줄 모르면 반드시 연석에서 아뢰어 추고(推考)하도록 청하는 것이 어떠한가?
청합(淸閤)에게 회답함p275
경신년1800 3월 24일에 받은 편지
단비가 내리는데 간밤에 잘 잤는가? 나는 방이 따뜻하여 동이 트도록 자고 말았다. 윤군이 초시에 합격하여 매우 기브다. 그렇다면 혹시 전시(殿試)에서도 가망이 있겠는가? 오직 그의 운수와 경의 운수가 형통한가에 달려있으니,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시골 유생들이 한양에 머무르는 동안 양식과 반찬 때문에 주인과 손님이 모두 곤란하여 탄식하였다. 이제 출방()하여 내려갈 수 있을 것이니 너무나도 다행이다. 봄 농사가 한창이다. 이조에 엄히 신칙하여 과거에 응시한 수령들을 즉시 내려보내는 것이 어떠한가? 이만 줄인다.
청동(淸洞)에 즉시 들일 것p459
경신년1800 6월15일에 받은 편지
편지를 받고 위안이 되었다. 나는 뱃속의 화기(火氣)가 올라가기만 하고 내려가지는 않는다. 여름 들어서는 더욱 심해졌는데, 그동안 차가운 약제를 몇첩이나 먹었는지 모르겠다. 앉는 자리 옆에 항상 약바구니를 두고 내키는 대로 달여 먹는다. 어제는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기에 어쩔 수 없이 체면을 차리려고 탕제를 내오라는 탑교(榻敎)를 써 주었다. 올 한해 동안 황련(黃連)을 1근 가까이 먹었는데, 마치 냉수 마시듯 하였으니 어찌 대단히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밖에도 항상 얼음물을 마시거나 차가운 온돌의 장판에 등을 붙인 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 일이 모두 답답하다. 이만 줄인다.
청동(淸洞)에 회답하여 들일 것p517
<정조 어찰첩正祖御札帖>은 정조正祖 (1752~1800)가 심환지沈煥之(1730~1802)라는 인물에게 보낸 서간 묶음이다. 이 자료를 특별히 중시하여, 동아시아학술원은 한국고전번역원과 함께 공동연구 작업을 수행하여 학계 및 사회일반에 제공하는 것이다.
첩본의 형태로 된 이 <정조어찰첩>원본은 총 6첩 297건으로 구성되어 있다. 옛날 간찰이 대개 그렇듯 ‘어찰첩’역시 대부분 초서草書 내지 행초行草로 씌어서 해독의 어려움이 따른다. 원본을 먼저 사진으로 촬영한 다음, 탈초를 하고 번역과 윤문을 거쳤다. 그런 한편으로 여러분야의 전문가들로 연구팀을 짜서 자료의 검토 분석을 진행했다. 이런 일련의 공작을 기초로 학술발표회를 개최한 바있다. 이 학술회의는 지난 2009년 2월 9일에 열렸는데 귀중한 문헌을 발굴, 소개하는 자리이기도 하여 학계와 언론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이 <정조어찰첩>은 기실 사신私信 이면서 밀서密書이다. 발신자는 국왕 정조이고 수신자는 정조 치세에서 중신이었던 심환지라는 점에서 특이하다. 4년여에 걸처 정조가 심환지라는 한 사람에게 발송한 편지가 297통이다. 기왕에 알려진 정조의 어찰첩 중에 가장 많은 분량일 뿐 아니라, 조선왕조의 군주 중에서도 이렇게 다량을 남긴 경우는 유례가 없다. 양적인 면도 이 문헌의 가치를 가늠하는데 무시할 수 없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내용이 지닌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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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어찰첩>에 실린 내용은 <조선왕조실록>이나<승정원일기>, 그리고 <홍재전서>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다. 이 점에서 또 하나의 ‘정조실록’,어쩌면 보다 더 생생한 정조 시기의 실록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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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시급한 현안이나, 민감한 정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심환지를 비롯해 신임하는 신하들에게 비밀편지를 보내 정보를 수집하고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마치 청나라 때 시행되었던 주접제도와 흡사하다. 이 자료에 나타난바, 정조는 정치 문제와 현안의 해결을 위해 먼저 자신의 뜻을 심환지에게 사전에 전달하고 의견을 조율하였다. 이는 <정조실록>과 같은 공식적인 사료에는 드러나지 않는 것으로 ‘어찰첩’을 통해 비로소 확인할 수 있는 정조의 정국 운영방식 중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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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에 잘 있었는가? 나는 요사이 놈들이 한 짓에 화가 나서 밤에 이 편지를 쓰느라 거의 오경이 지났다. 나의 성품도 별나다고 하겠으나 껄껄 웃을 일이다. 보고 난 뒤에는 남들 눈에 뜨지 않도록 하는 것이 어떠한가? 이만 줄인다.’ <1799년 11월 24일 아침>
그분은 다정하고 따뜻한 심성을 지닌 분이었다. 삼백 점에 이르는 친필 편지를 한 사람에게 보냈다. 어릴 때 아버지가 어찌 돌아가셨는지 생생히 보고 들었다. 그 아픔이 가슴밑바닥에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아 평생을 살았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신하의 마음을 살피며 자신을 열어 보이고 편지를 주고받으며 정국을 살폈다. 정치적 입장이 달랐던 심환지를 국정 운영의 파트너로 인정한 정조의 지혜로움이 빛난다. 조선시대에 그런 임금이 또 있었을까 싶기도 하다.
세종보다도 업적이 많아 수능출제 문제가 세종보다 더 나온다고 한다. 정조에 대한 기록들을 더 읽어보아야 하겠다. 가슴 아픈 상처로 얼룩진 가정사와 늘 마음조리며 살아야 했던 남자. 아버지 죽음에 대한 화기와 끊임없는 노론의 공략에 병은 끊이지 않았고 결국엔 그렇게 세상과 이별을 했던 임금. 정조의 따뜻한 마음이 고스란히 녹아있고 지혜로움을 엿볼 수 있는 편지를 읽을 수 있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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