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만권을 읽으면..

마음의 섬/이태동 산문집/효행출판

다림영 2011. 9. 3.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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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섬'

누구나 마음의 섬이 있을 것이다. 내 마음의 섬은 오전 10시 즈음 눈부신 햇살이 창가로 스며드는 빈티지와 내추럴과 모던이 어우러진  카페같은 곳이다. 그것은 이루기 쉽지 않은 일이고 또 아득한 꿈이어서  늘 마음의 바다에 섬처럼 떠돌고 있다. 어느새 아침저녁으로 서늘하여 이불을 꼭 덮게되고 그림같은 가을이 기다려진다.   부쩍 그 섬에서 나는 꿈을 꾸고 진한 커피를 마신다.  한조각의 토스트와  그곳에서 보이는 풍경과 ....

 

 

 

본문 중에서

멀리서 가까이서

 

얼마전에 겨울 장안평의 어느 어수룩한 석물石物가게에서 쓰러져 누워 있는 돌짐승 한 쌍을 사가지고 돌아온 적이 있다. 그것을 실어오는 날 눈발이 날리고 날시가 유난히 추워, 굳게 얼어붙은 땅을 파고 그것을 제자리에 찾아 세워놓을 수가 없어서 출입구 계단 가가이에 있는 흰 벽에다 기대어놓고 보아야만 했다.

 

처음에 장승은 새로운 느김으로 신기하게 보였지만, 며칠을 지내고 너무 가까이 보아서인지 느끼고, 내 처지에 거금 10만원을 그것에 투자한 것을 적지 않게 후회했다.

그래서 나는 몇 번 주저한 끝에 돌장승에 묻은 세월의 먼지와 이끼를 씻어내어 그 속에 숨어 있는 돌의 결과 무늬라도 볼 수 있었으면 하는 욕심에서 그것들을 비눗물로 씻어내렸다. 그러나 그 순간 내가 얼마나 절망하였던가는 이루 다말할 수 없다.

 

그런데 내가 왜 이와 같은 어리석은 짓을 해야만 했던가는 두말할 나위 없이 그 장승들을 너무나 눈 가까이 두고 보았기 때문이리라. 아무리 훌륭한 그림이나 조각품이라도 확대경으로 들여다보듯이 너무 가가이 두고 보면 , 붓자국 얼룩이나 끌질 자국만이 커 보이기 일쑤다.

 

그래서 훌륭한 예술품일수록 거리를 두고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된다. 적당한 원근법을 가지고 배경의 물체마저 갖는다면 더욱 좋으리라.

그러나 대부분의 살마들은 내 경우처럼 귀중하다고 생각하는 물체를 너무 가까이 두고 보기 때문에 그것이 지닌 참된 가치를 충분히 알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가까운 사람이나 어떤 대상을 너무 가까이 두어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적지 않다. 어떤 사람은 부에 너무나 가까이 집착하기 때문에 부의 노예가 되어버리지 않으면 그것이 파놓은 수렁에 빠지게 되고, 또 어떤 사람은 사랑에 너무 가까이 접근 했다가 오히려 사랑 때문에 죽기도 한다. 또 다른 사람은 자신을 멀리하거나 버리지 못하고 자아에 너무 탐닉했기 때문에 '나르시스의 전설'에서처럼 스스로 죽음을 부르곤 한다.

 

나 역시 아끼고 사랑하는 것을 멀리 두지 못하고 가까이 두었기 때문에 참혹하고 절망적인 경험을 해야 했던 일이 한 두번이 아니다. 장승에 진정한 가치를 더해 주는 이기와 세월이 쌓인 흙먼지를 씻어버렸기  때문에 다시 수많은 시간을 기다려야만 하게 된 것이다. 언젠가 나는 "옛 애인은 만나지 말아야 한다. 만나면 그 모습은 누더기와 같다'라는 옛말을 믿지 않고, 대학 시절에 좋아하던 여인을 만난 적이 있다.

 

어느 가을날 헤어진 지 20년이 지난 후에 다시 만난 그녀의 얼굴은 서머셋 몸의 작품<빨간 머리>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여인을 연상시키리만큼 알아볼 수 없게 변해 있었다.  그때 내가 느낀 체험은 정말 참혹하고 처절한 것이었다. 우리가 서로 헤어져야 했던 것은 6.25사변과 같은 시대적 상황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그녀의 변심 때문이었다.

 

당시 나는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와 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그녀가 나에게 꽃처럼 가까이 다가와서 남다른 관심을 보이곤 했다. 그래서 우리는 얼마 동안 서로 같이 앉아 책을 읽기도 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의 마음에 깊은 우물을 팠다고 믿었다.

 

그러나 내가 군에 입대해서 수많은 고통 끝에 장교제복을 입고 돌아왔을 때, 그녀는 "사랑하고 싶지만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란 말을 남기고 끝내 내게서 사라졌다.

그후 나는 얼마 동안 심한 열병을 잃었다. 그리고 20년의 세월을 보내면서도 그녀의 아름다웠던 모습들을 마음 한 구석에서 지워버린 적이 없었다. 내가 먼 나라를 다녀와서도 서울 거리를 거닐라치면, 혹시 그녀의 그때 모습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에 부그러워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거리에는 사람들의 물결만 흘러갔고 나의 빈 마음은 채워지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마흔 고개의 마루턱을 넘고 있던 어느 날 아침, 책상에서 글을 쓰고 있는데 어디에서인가 전화가 걸려왔다. 바로 그녀였다. 신문에서 내 이름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녀는 나를 만나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내가 그녀를 다시 만났을 때 얼마나 좌절하고 실망했는지는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비만해진 그녀의 얼굴에서 새겨진 세월이 스쳐간 거친 자국도 자국이려니와, 교통사고로 생긴 흠 자국이 그 고왔던 입술 언저리에 남아  옛 모습을 무참히 짓밟고 있었다. 나는 그녀와 20년 만에 처음으로 잠시 해후를 하고 돌아오다 마음이 너무나 쑥스럽고 쓸쓸해서 그녀에게로 다시 가까이 가서 그녀의 상처입은 얼굴을 들여다보았던 것을 후회했다.

 

나는 그날 오후, 너무나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그녀를 만남으로써, 젊은 시절부터 내 마음속에 무의식적이지만 등불처럼 지니고 다녔던 몇 개 안 되는 아름다운 영상들 가운데 하나를 무참히 부숴버려야만 했고, 그것 때문에 삭막해진 나의 삶이 더욱더 빈곤해진 것을 느꼈다.

 

내가 어떤 대상과 너무나 가까이 있음으로 해서 느기는 절망감은 그 명암의 색채는 달라도 얼마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에게서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가 외아들이시고, 내가 맏손자이기 때문인지 할아버지께서는 어릴 때부터 나를 끔찍이 생각하시고 위해 주셨다.

 

그러나 나는 성장하면서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의 할아버지의 삶에 대해 조금은 회의적이었는데, 더욱이 철이 들어 할아버지가 소작인을 거느린 지주였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렇게 좋아했던 할아버지의 모습에 자못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몇 년 전부터 고향에 내려가 여생을 보내셨는데, 우리들이나 친척들이 할아버지를 뵈러 내려갔다가 곁을 떠나올 때면 눈물을 흘리시곤 하셨다.

그러나 어리석게도 할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때는 그 눈물의 의미가 무엇인지 충분히 깨닫지 못했다. 그때 나는 인간은 죽음 앞에서도 눈물을 보이지 않고 위엄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 할아버지의 속마음을 깊이 헤아리지 못했다.

 

모순과 허물투성이인 내가 이렇게 할아버지에 대해 잔인할 정도로 원칙만을 고집했던 것은 아마 할아버지가 너무 가까이 계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는 할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장맛비 속에서 장례식을 치른 후에야, 비로소 그 눈물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할아버지의 눈물은 결코 죽음이 두려워 흘리신 눈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할아버지께서 '사는 것이 죄'인 삶을 힘겹게 살아오시면서 느낀 아픔에 대한 눈물인 동시에 외로움과 후회가 섞인 회한의 눈물이었다.

 

지금 나는 할아버지가 다시 살아오시면 잘 모실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막상 할아버지를 곁에 가까이 모시게 되면, 할아버지의 그 눈물의 참된 의미를 발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가정과 벗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객지에 나가보아야만 집이 얼마나 좋고 따스하며, 또 벗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게 된다. 헤엄을 잘 치는 사람은 물에 빠져 죽고, 나무에 잘 오르는 사람은 나무에서 떨어져 죽는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사람은 죽어야만 그 값을 안다"는 격언은 무수한 세월을 두고 쌓아올린 경험에서 나온 말이다. 이것 역시 사람과 사람, 사물과 사물, 대상과 대상 사이에 일정한 거리가 필요하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겠다.

 

인간 정신을 일개운다는 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멀리서 은은히 들려오는 종소리는 깊고 유연해서 마음에 와닿는 몫이 그 어느 것보다 크지만, 종 치는 사람 곁에서는 그런 은은한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신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인간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숨어 있기 대문에, 위엄과 정신적인 가치를 유지하는 것이 아닐가. 그렇다면 신은 자기의 모습을 감추고 있다는 점에서도 인간보다는 현명하다.

 

나는 오늘 날씨가 따뜻하고 얼어붙었던 땅이 녹아서 계단 앞에 세워두었던 그 돌장승을 상당한 거리를 두고 옮겨놓았다. 하나는 담장 밑 대나무 생울타리 곁에, 다른 하나는 나의 시야에서 더욱 멀리 떨어진 마당 모퉁이에 세워두었다.

 

그리고 창문을 열고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니, 가까이 있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윤곽이 그 석상의 얼굴에 살아나고 그것이 지닌 숨은 미와 영겁을 두고 기다리며 서 있는 장승의 의미를 읽을 수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일정한 거리'는 사물에 대한 인간의 지나친 욕망을 차단하고,그것 때문에 어두워진 우리의 시계視界를 밝게 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사물의 본질을 엿보게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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