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만권을 읽으면..

기억의 풍경들/김원일 산문집/작가

다림영 2011. 9. 8. 19:45
728x90
반응형

 

본문 중에서

 

행복했던 날 셋

 

텔레비전의 가정 프로에서, 평범하게 살아온 노인이 고희를 맞아 가족 잔치를 베푼 날, 사회자가 그 노인에게 물었다.

"살아온 날 중에 가장 행복했던 날 셋만 말씀해 주십시오."

노인이 눈을 껌벅이며 한참 생각을 간추리더니 행복했던 날의 추억이 떠오르는지 주름진 입가에 웃음을 띠며 대답했다.

"첫 아이를 보아 아버지가 되던 날, 그 아이를 성례시키던 날, 첫 손자를 안아보던 날이오."

 

노인은 , 자신이 성취한 기쁜 날을 배고 피붙이 후손이 안겨준 기쁜 날 셋만 열거한 셈이다.

일제하 식민지 시절에 태어나  해방과 전쟁 등 온갖 가난. 신고를 견뎌냈고, 산업화시대의 역군으로 허리 펼 잠 없게 일해 오며 자신을 지탱시켜 준 힘이 바로 대가족제도 울타리 속의 가정이었던 셈이다. 자신의 행복은 제쳐두고 자식 키워 가르치고 성례시켜 후대를 잇는 보람으로 살아왔던 것이다.

 

그 노인에게 지난날 중에 가장 슬펐던 날 셋을 묻는다면, 부모님의 죽음, 배우자나 형베와 지상에서 이별한 날, 자식이 교통사고를 당했거나 큰 병에 걸렸을 때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최근 어느 신문사가 공모한 문학상을 심사하다 젊은이 결혼관을 다룬 장편소설에서, 요즘 젊은이의 행복한 결혼생활을 보여주는 이런 구절을 발견했다.

 

 

아내가 설거지하면 나는 청소기를 돌린다. 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청소기 돌아가는 소리가 섞이는 것이 듣기 좋다. 마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소리들이 사랑을 나누고 있는 것만 같다. 세탁기가 다 돌아가면 같이 빨래를 널고, 빨래가 다 마르면 같이 빨래를 개킨다. 할 일이 없으면 소파에서 아내의 무릎을 베고 누워 티브이를 본다. 아내가 책이라도 읽으면 또 그 옆에 누워 빈둥거린다.  살아가는 일의 즐거움이란 로또 같은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아내의 무릎에 , 아내의 옆자리에 있다.

 

 

핵가족 시대에 구세대와 신세대의 가족 개념에 따른 행복관의 차이가 드러난다.

지금의 신세대가 고희를 맞았을 때 살아온 세월 동안 행복했던 날 셋을 나름대로 상상해본다. 입시경쟁보다 더한 관문을 뚫은 직장에 첫 출근한 날, 신혼여행으로 해외 휴양지에서 맞은 첫날밤 테라스에서 와인 홀짝이며 나란히 앉아 바라본 놀빛 물든 바다, 첫 아이가 태어났던 날, 그 정도가 아닐까.

 

종교인이 주로 하는 말이지만, 삶은 세상이란 고해<苦海>를 혼자서 헤엄쳐 나가기이다. 사람은 태어난 뒤부터 누구나 생존경쟁으로 부딪으며 살아갈 동안 온갖 풍파를 체험한다. 이를 이겨내는 힘은 불행이란 구름 사이에서 해가 반짝 들듯, 행복했던 날 한순간을 끊임없이 반추하는 일이다.

그 행복은 대체로 사회생활을 통해 얻어지는 기쁨이 아니라 가족, 가정을 통해 느끼게 된다. 행복한 날을 열 번, 백 번쯤 만들겠다는 각오로 오늘을 살면, 훗날에 맞을 고희 때는 행복했던 날의 추억으러 넘칠 것이다.

 

---

 

 아직 한낮은 뜨거운 햇볕으로 덥다. 그러나 저녁무렵이면 서늘한 기운이 느껴져 가을이구나 하며 바짝 다가온 추석을 회상한다. 그 기억의 풍경속엔 옷 한벌 얻어입거나 양말 한 켤레 혹은 새 운동화 ... 이런 아주 작은 선물을 받고 즐거워했다. 촌스럽게  머리를 자르고, 목욕을 하고,  동네아이들과 어울리며 이집 저집 오고 가는 다양한 송편을 몇개씩 손에 들고 환하던 풍경들이 자욱하다.

 

지금은 솔잎을 쓰는 집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그 옛날에는 송편을 찌기 위해선  반드시 솔잎을 밑에 깔아야 했다. 얕으막한 동네 산에 올라 솔잎을 한 가득 따오면  깨끗이 씻어  엄마와 동생들과 송편을 쟁반가득 만들어 찜솥에 넣으면  그 퍼지는 향기란....

가난함 속에서도 추석만큼은 부자가 되었던 풍경들, 지난날이 그립기만 하다. 남루했지만 그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날들이다.

 

친정엄마가 가게에 다녀갔다. 내 속옷과 남편의 양말 한 셋트를  사들고 오신 것이다. 여전히 우리엄마는 그렇게 사시고 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