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만권을 읽으면..

밤비 오는 소리/이태동 수필집

다림영 2011. 6. 28.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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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중에서

 

여름소나기

 

계절이 바뀔 때마다 우리는 새로운 계절에 대해 아름다움을 느낀다. 나 역시 계절의 변화에서 오는 적지 않은 축복에 대해 고마움을 느낀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다른 어느 계절보다 여름이 찾아오는 것이 반갑고 고맙다.

내가 여름을 좋아하는 것은 소박하게 말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두렵고 슬프게 하는 추위에서 자유로울 수 있게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름이 지니고 있는 낭만과 무성한 변화 그리고 풍요로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느 계절치고 낭만 없는 계절이 있을까마는, 여름은 한결 여유가 있고 풍성하며 인색하지 않아서 좋다. 오랜만에 휴가를 얻어 방학을 한 아이들을 데리고 여행길에 오르는 사람들의 마음은 물론, 솜처럼 피어오는 뭉게구름을 바라보며 싱그러운 푸른 벌판을 달리는 시냇물 소리를 듣는 사람들에게도 여유가 있다.

무더운 여름밤이지만, 모깃불을 피워놓고 대나무 평상에 누워 검은 밤 하늘의 눈물 흘리는 별들 속에서 견우와 직녀의 별자리를 가늠해 보는 마음에도 여름만이 지닌 여유와 낭만이 있다.

 

여름의 저녁 바다 풍경은 또 얼마나 아름답고 로맨틱한가.

그것은 비극적인 무희 이사도라 던컨을 죽음으로 유혹할 만큼 아름답고 환상적인 것이 아닐까. 그녀는 오색 등불이 켜진 해변의 테라스에서 밤늦게까지 춤을 추고 달빛 속에 무개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다 해풍에 나부기던  흰 머플러가 차 바퀴에 감겨 질식사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내가 여름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현실 세계를 떠난 듯한 낭만과 조종(弔鐘)처럼 울리는 둔탁한 벽시계 소리를 들으며 권태감 속에 '대낮처럼 밝은 꿈'을 꾸는 낮잠을 즐길 수 있는 여유 대문이 아니라, 여름이 지니고 있는 무성한 힘의 풍요로움 때문이다.

 

여름날 고흐가 불타는 태양을 찾아 들판을 걸어다니고, 고갱이 원시의 섬 타히티로 간 것도 태양빛의 풍요로움과 생명력 넘치는 원색적인 힘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또 어릴 때,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서 햇빛 쏟아지는 길을 바라다보며 갑자기 굴렁쇠를 굴리든가. 해변의 뜨거운 모래밭 위로 마구 달리고 싶었던 일들도 태양 속에 불타는 뜨거운 정열의 마력 때문이 아니었을까.

 

어린시절 언제나 자연과 친숙했고 또 그 속에서 살았던 나는 마치 태양의 아이처럼 여름 햇빛을 본능적으로 좋아했다.

생(生)의 마루턱을 오른 지금 생각해도 어릴 때의 내가 나무 그늘을 좋아햇던 기억은 없고, 맑은 강물 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산 그림자가 드리울 때가지 온종일 바윗돌 위에 몸을 붙이고 햇빛에 등을 검게 태우던 일과, 지금은 돌아가신 삼베옷 입으신 할머니 따라 '헛바퀴 도는 듯한' 뜨거운 태양 아래 할머니 친가인 진외가(陳外家)로 가기 위해  먼지 나는 하얀길을 하루 80리나 걷던 일이 기억난다.

 

그때 석양 무렵 하얀 길이 끝나고 크고 작은 조약돌이 수없이 널려 있는 강가에 도착해서 세수를 하고 긴 징검다리를 두개씩이나 건너서 진외가를 설레는 마음으로 찾아들었던 일보다 매미가 시끄럽게 울고 왕거미가 집을 짓던 그 뜨거운 황톳길을 걷던 일이 지워지지 않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여름의 태양이 어린 나의 의식에다 화인(火印)과도 같은 뜨겁고 깊은 인상을 새겨주었기 때문일까.

 

불타는 듯이 작열하는 태양과 더불어 여름날의 풍요로움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은빛햇살'처럼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다. 타는 듯한 들판에 쏟아지는 빗줄기는 여름날 파초위에 쏟아붓는 물줄기만큼이나 싱그럽다.

여름이라도 긴 장마철 처마 끝에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구슬프게 하고 무료함에 우울하게 만들지만, 천둥소리 요란하게 쏟아지는 소나기는 답답한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고, 더위에 몽롱해지는 의식을 깨우고 몽환 속에 빛을 잃어가는 생명에다 새로운 충경을 주듯 늘어진 신경을 새롭게 긴장시켜준다.

 

그러나 여름의 생명력과 풍요로움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때는 소나기를 만나 몸을 흠씬 적실 때다. 이것은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표현 못할 충격이다. 내가 소나기를 만나 온몸이 비에 젖었던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당시 나는 두메산골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읍내까지 십리 길을 걸어나와 학교를 다녀야 했는데, 어느 토요일 하굣길에 소나기를 만났다. 능금나무 과수원 옆에 있는 학교 교문을 나서자 은빛 같은 흰 하늘이 갑자기 납덩이 같은 검은 구름으로 변하는게 아닌가. 나는 너무나 무서워서 필통 속에서 연필 구르는 소리가 나는 책보따리를 어깨에 가로메고, 돌다리를 건너 산 넘어 있는 집을 향해 뛰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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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곧 아이들 방학이 올 것이다. 벌써부터 컴퓨터와 씨름을 할 아이들생각을 하니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우리 어린시절의 방학에는 산으로 들로 쏘다니며 무슨 재밌는 일이 그렇게 많았는지 달랑 막대기 하나 들고 그렇게 줄을 지어 놀러 다니곤 했다. 그러다가 소나기라도 쏟아지면 길거리 옆 피마자 잎을 뜯어 머리에 뒤집어 쓰고 집으로 줄행랑을 놓기도 하고  춤을 추듯 빗속을 뛰어다니며 옷이 모두 젖어 물이 흘러도 마냥  소리지르며 신나기만 했다.

 

감자꽃이 하얗게 피던무렵 , 그 장마철이면  천장에서 내내 물이 새어 여기저기 큰 그릇들이 방에 놓이고 습한 기운을 없애려고 엄마는 연탄불을 지피거나 콩대를 끊어 아궁이에 불을 땠다. 그때 줄줄이 꼬맹이이던 나와 형제들은  콩을 구어먹으며 얼굴은 거뭇거뭇한 칠을 해대도 그저 좋아라 했다. 세상 무슨 걱정이 있었나 싶다. 가난했지만 매일 자연과 벗하며 흙을 밟고 즐겁던 그 때로 불현듯 돌아가고 싶기만 한 이유는 무엇인지 모르겠다.

...

스무살쯤 이었을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비오는 날을 무척 좋아했다. 장대비가 줄창 쏟아지던 휴일이었고 알수없는 비의 기운으로 집에만 있기에는 무료했다. 대충 챙겨 집을 나섰고 시외버스에 오르게 되었다. 산 안개가 하얗게 일어나는 풍경을 바라보며  막연한 여행의 인연을 꿈꾸며 낯선 도시로 향하게 되었다.  집에서 한참을 벗어날 즈음  자유롭고 그 아름답던 풍경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괜한  무서운 생각이 들어 돌아오게 되었는데 한동안 얼마나 후회가 되던지... 언제나 용기가 모자라 늘 그만큼의 거리가 나의 전부였다.

 이룬것 하나 없고 변변한 추억 또한 그렇게 흐르다 멈추며 청춘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고, 무심한 세월속에 그나마 지니고 있던 열정도 어디선가  잃어버리고 고개 숙이며 오늘에 서 있는 것이다.

 추억을 떠올린다는 것 조차  사치가 되어버린 회색빛 날들, 그러나  언젠가 선생님의 말씀이 때마다 떠오른다. 나이가 들수록 옛날을 먹고 사는 것 같다. 그 추억으로 그래도 삭막하기만 한 이 현재에  작은미소를 그나마 그릴 수 있는 것은 아닌지....

이제서야 그 말씀이 선명하게 스며든다. 지난날의  사소하거나 각별했던 추억들은  황폐한 오늘을 견디게 해주는 어쩌면 우리의 비밀의 정원은  아닐까 .

 

 

이태동선생님의 추억이 줄줄이 묻어나는 수필집을 들여다 보고 있으려니 아련한 그 옛날사람들이 보고 싶기만 하다. 어쩌다 세월이 이렇게나 많이 흘러 나는 늙고 지난날은 자꾸만 그리워지는 것인지 모르겠다. 

낯익은 얼굴 그리운 얼굴들이 혹여 지나가지는 않을까 내다보지만 거리는 더없이 한적하기만 하고 햇살만 뒹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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