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한 여행

성북동에는

다림영 2009. 7. 21.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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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사를 내려왔다. 뭔가 놓친게 있는 것이 분명했다.

눈에 들어오는 큰 카페를 따라 올라가 보았다.

 

사실 난 예쁜 가게의 사진을 찍고 스크랩하고 그랬었다.

가게를 하는 사람이므로..

가게 사진 찍고 모으다가 다른 길로 건너왔다.

가게는 물을 건너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아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늘 예쁜 가게에 대한 꿈이 있으므로 .

 

이 가게는 가만 들여다 보니 꽃가게다. 이곳엔 중국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거리일까

아니면 그냥 멋스럽게 한문으로 적어 놓은 것일까..

특별하지 않은 무채색의 그 모습이 너무나 특별하게 보인다. 한자까지..

 

 

 

 

이 큰 카페가 저 아래에서 눈에 화악 하고 들어왔다.

사람들이 굉장히 북적였다.

젊은부부들과 아이들이 많았다.

 

 

특별한 꽃집에서 돌아보니 돼지 갈비집.. 살펴보니 기사식당인데 삼십몇년이 되었단다.

이곳은 식당을 만나면 잘 읽어 보아야 한다.

기본 삼십년을 훌쩍 넘은 곳이 많았다.

그런곳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간송미술관이다. 올라가는 곳마다 펜말이 붙여 있다.

가지 마시오. 올라가지 마시오..

문은 왜 열어 놓았을까 !

 

 

 

 난 그분이 누구인지 몰랐다. 찾아 보았다.

 

 최순우

1916 경기 개성~1984 서울.

미술사학자·미술평론가.
본명은 희순(熙淳). 호는 혜곡(兮谷). 개성 송도고등학교를 나와 개성박물관에 근무했으며 당시의 관장 고유섭(高裕燮)의 감화로 한국미술사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1946년 국립개성박물관 참사를 지냈고 1948년 서울국립박물관으로 전근하여 보급과장·미술과장·수석학예연구관·학예연구실장을 거쳐 1974년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에 취임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을 구 중앙청 청사로 이전하기 위한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격무와 신병으로 순직했다. 문화재위원회 위원(1967~1984), 한국미술사학회 대표위원(1976~1980) 등을 역임했고 1984년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한국미술의 탁월한 감식가로서 한국미술연구와 문화재보존에 크게 기여했다. 주요논문에 〈겸재 정선론 謙齎鄭歚論〉·〈한국의 불화(佛畵)〉·〈혜원 신윤복론 蕙園申潤福論〉·〈이조의 화가들〉 등이 있고 저서에 〈한국미술사〉가 있다.

 

 

그러고 보니 그곳에서는 어떠한 행사가 많이 이어지고 있었다.

휴일엔 어느곳이든 문은 굳게 잠기는 것!

 

 

길상사를 내려와서 길을 건너면 왠지 발길이 닿는 곳이 있다. 바로 이곳이다. '돌담길'..최순우선생님의 옛집을 뒤로 하고 조금 올라가면 나오는 집이다.

 

 

 

조그만 집들 사이로 서울성곽이 보였다. 이쪽으로 올라갈까 저쪽으로 갈까 하다가

너무 높아 조금 얕은 곳으로 갔더니 성곽을 만날 수 없는길이 나왔다.

 

얕은꾀를 쓰면 바가지 쓰는 것은 당연지사

 

 

막힌 그 곳에서 돌아보다. 비는 오지 않았으나 잔뜩 흐렸고 바람한점 없었고 사뭇 습한 날씨에 구슬땀을..

 

 

 

 막다른 길에서 돌아 나와 급경사진 계단을 밟고 올라보니 또 다른 길이 펼쳐지고 서울성곽을 만져보며 ..

 

 

 

 

 

처마로 떨어지는 물을 이동시키는 방법!

 

 

산을 오르시는 이동네 좋은 분을 만나다. 그분께 성북동을 여쭈니..

미안하시단다. 이곳에 살면서도 아는게 많지 않다 하시니..

이 말씀을  두분에게서 듣게 되었다.

 

 

 

 

어찌 그리 좋은 마음이 서린 말씀을 하시는지.. 생전 처음 본 사람에게 말 하는 법을 나는 이날 배웠다.

겸손의 말씀은 가만 듣는사람에게조차 한아름의 꽃이 피게 한다.

 

 

 

 

 

 

배가 고팠다. 별 볼 것이 없을 것 같은 큰 도로 뒤의 길을 그냥 걸었다. 그런데 ..

이집으로 사람들이 계속 들어가는 것이었다.

간판이라고 해 보아야 저 조그만 .. '국시'.. 그것이 전부였다.

나도 모르게 사람들을 뒤따라  들어가게 되었다.

 

 

 

 

 

나도 사람들을 따라 국시 한그릇 보통을 시켰다. ..

그렇게 사람들이 줄을 잇는 한 점심시간인데도 혼자인 나를 받아주신다.

 

인사동에서 한 사람이요 하더니 내쫓긴 생각이 났기 때문에 미안한 마음으로 주춤 거렸다.

이층도 있고 또 한쪽 방도 따로 있나보다. 처음 입구 좁은 곳에 자리잡고 사람들을 살폈다.

손님이 대부분 나이든 사람이었다.

나중에 계산을 하며 국시집 명함을 보았더니..

'1969년'..

그때부터 이집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었다.

세상에...

그랬었구나.. 그래서 나이든 분이 그렇게 많이 줄을 잇고 계셨던 것이구나..

 

나이가 들수록 옛것에 대한 그리움이 나날이 사무치는 그 마음이 이제 나를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이집 메뉴는 몇가지 되지 않았다.

전, 도토리묵, 수육,.. 그리고 무엇이 있었더라.. 칼국수 보통과 곱배기..

칼국수 나오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여럿이 온사람들은 그 기다림 속에서 빠르게 나오는 전과 묵을 시켜 들면서 이런저런 얘길 나눈다.

 

평범한 식당에서 먹는 칼국수와는 많이 달랐다. 국수가 그렇게 가늘고 쫀득할 수가 없다. 칼국수 값치고는 비싸긴 했다. 보통이 7,000원 , 곱배기는 8,000원이다.  그러나 1969년도에 문을 연 칼국수집에서 먹었다는 것에 의미를 두니 나그네의 특별한 기쁨이었다.

 

 

 

 

 

국시를 먹고 돌아나오는데 거리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이집에서 사람들의 굉장한 북적임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올려다 보니.. 사십오년된식당 !..한여름에 먹어야 하는 몸보신 식당이었다.

 

아하.. 처음 골목에서 보았던 자장면 집이 삼십오년되었다고 했던가..

그러고 보니 성북동은 그러한 동네였던 것이다.

 

 

 

 

또 특별한 곳이  있었다. 역으로 향하던중 차관리 하는 사람이 있었고 사람들이 마구 들어가 따라가 보았더니.. 빵집?...얼떨결에 들어가 좋아하는 호밀빵 두개를 샀는데 몇분을 기다렸는지.. 참 쉽지 않았다. 몇줄을 서고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굉장한 빵집이었다.  차는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나처럼 달랑 두개만 사가는 이는 단 한명도 없었다.   자연발효빵이 많았다.

 

 

혜화문 을 마지막으로 성북동 기행은  여기서 마친다. 특별한 곳이었다. 내게는 더 특별한 얘기 하나 있다.

 

 

어제 엄마에게 성북동을 다녀왔다고 하니 엄마는 내가 세살때 그곳에서 우리가 세를 살았다고 한다. 물도 나오지 않는 아주 높은 곳이었는데 그곳의 주인은 부녀지간이었고 그 할아버지께서 나를 예뻐하셨단다. 그땐 떡장수가 머리에 떡을 이고 다니며 집집마다 돌며 장사를 했는데 나는 영악해서 떡장수만 오면 오원짜리 떡하고 삼원짜리 떡중에 훨씬 큰 오원짜리 떡을 냉큼 쥐고  도망하더란 얘길 하는 것이다. 밥도 제대로 못먹고 살때 였단다. ..그러고 보니 이 모두가 우연의 법칙에서 어긋난다.  난 왜 이곳을 다녀온 것인가?

 

 

 

 

 성북 한성대 입구 전철역 4번 출구 앞에서 누군가 기다리는 착해보이는 학생에게 한컷 부탁했다.  너무 정 중앙이다. 약간 비켜난 모습이 좋은데.. 그렇지만 너무  고맙다. 말도 하지 않았는데 두번이나 셔터를 눌러주다니... 인정스런 사람들.. 이곳엔 그런이들이 많은 동네다. 정겨운 골목처럼 오래된 식당처럼 ..

 

 

 

 

ps

 

1.한성대에 다니는 착하고 든든한 아들을 둔 친구가 있다. 어젠 그녀가 문득 나타나  제주도 올레길에 대한 얘기가 들어있는 책을 빌려주고 갔다. 큰일났다. 아무래도 사고치겠다.

 

2.아름다운 날들이다. 현실적인 수확은 별반 없으나 마음은 풍요로운 날들이다. 어딘가 다녀올 때마다 내 마음엔 수많은 과일과 열매들의 달콤한 향기로 출렁인다. 수리할 일로 서울에 올라간 그에게 전화가 또 왔다. 손님이없느냐며 내게 괜스레 호통을 친다. 일보러 다니는데 힘좀 실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한다. .. 날더러 어쩌라고.... 이크 손님이 오셨다.손님이 오신덕에 에어컨도 킨다. .. "왓 ! 이만오천원!..매출이 일어난다. 난 그러면 이런다. 오늘 매출이 이만오천원이면 이만오천원 벌었다 하고!..그에게 힘을 실어주어야 하겠다. .. 애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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