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만권을 읽으면..

장자/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마라/윤재근

다림영 2008. 8. 2.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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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는 장자에서 한 세상 사는 일은 여관에 한번 드는 일과 같다고 했다. 말하자면 인생이란 하나의 여정과 같다고 장자는 보았던

셈이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사람이 묵어가는 여인숙으로 보았던 셈이다.

장자 를 하나의 여인숙으로 치면된다. 그 여인숙에는 무수한 인물들이 묵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인생이란 골목을 걸어오면서

무수한 사연들을 몸으로 겪으면서 걸어온 당사자들이다.

 

작은 지혜는 큰 지혜에 미치지 못한다. 짧은 수명은 긴 수명에 미치지 못한다. 하루살이는 밤과 새벽을 모르고 매미는 봄과 가을

을 모른다. 이것이 짧은 수명이다.

 

무엇에 의지한다는 것은 완전한 자유를 누리지 못함을 말한다. 지인.신인.성인은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경지에서 노닌다.

 

"나에게 큰 나무가 한 그루 있는 데 사람들이 가죽나무라 하더군요. 몸통이 울퉁불퉁하여 먹줄을 칠 수가 없고 가지는 비비꼬여 자를

댈 수가 없지요. 그래서 목수가 거들떠 보지도 않지요. 그런데 선생의 말씀은 크기만 하였지 쓸모가 없어서 사람들이 외면하는 게지요."

"선생인 가지고 있다는 큰 나무가 쓸모가 없어서 걱정인 모양이지요. 어째서 드넓은 들판에 그 나무를 심고 그 밑에서 마음 내키는

대로 한가롭게 쉬어도 보고 그늘에 유유히 누워 잠을 자보지는 못하오. 도끼에 찍힐 일도 누가 해를 끼칠 일도 없을 것이오. 그런데

어쩌자고 쓸모가 없다고 괴로워 한단 말이오"

 

열자가 바람을 탄다는 것은 본래대로 있는 것이 아니다. 본래의 모습은 간직하면서 변화에 응해야 서로 노릴 수 있는 게다.  서로 노닐

수 있다면 구태여 무엇에 의존할 필요가 있을 것인가. 본연대로 서로 노니는 것이 자유 그 자체인것이다.

 

사람의 소리는 그냥 소리가 아니다. 그 소리가 뜻을 담고 있는 까닭이다. 누구나 마음을 간직하므로 뜻을 간직한다. 마음의 쓰임새가 곧

사람의 뜻을 이룬다. 살마마다 마음의 쓰임새가 한결같은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르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 통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씨는 백인 백색이다. 그러므로 사람으 소리인 말은 분명하기가 어렵다. 언제나 말은 꼬리를 남기게 된다. 그래서 말은 씹을 수록

다른 맛이 난다고 하는게다. 자기가 하나의 바람이 구멍에 따라 서로 다른 소리를 낸다고 한 것처럼 사람의 말이 그런 셈이다. 장자는

여기에 대하여 다음처럼 질문을 던지고 있다.

"말의 듯이 애매하여 분명치 않다면 말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까. 아니면 안한거나 마찬가지일까. 그러나 새새끼의 소리와는 다르다고

한다면 사람의 소리와 그 소리는 구별이 있는 걸까 없는 걸까"

 

 

크나큰 긍정, 그것은 시비를 넘어선 명지이다.明知의 긍정은 이것이 저것이고, 저것이 이것이다. 그러한 명지는 바퀴의 중심과 같다.

바퀴의 주임을 지도리라 한다. 바퀴는 돌아야 한다. 지도리가 없으면 그 바퀴는 돌 수가 없다. 그러나 인간의 백인백색이란 바퀴의

살과 같다. 돌아가는 살은 마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있는 살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분명 하나의 變轉이다. 이처럼 사람의 시비

는 사람이 짓는 변전일 뿐이다.

 

가장 가치있는 지식이란 모르고 있음을 아는것이다. 무위자연은 무엇을 안다고 우기지 않는다.

 

"네가 알고 있다는 것은 실로 모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모르고 있다는 것이 실은 알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 어디

너에게 물어 보자. 사람은 습한 데서 자면 허리병이 생겨 반신불수로 죽지만 미꾸라지도 그렇던가. 사람은 나무위에 있으면 무서워하

지만 원숭이도 그렇던가. 이 셋중에서 어느것이 올바른 거처를 알고 있는 것일까. 사람은 고기를 먹고 순록은 풀을 먹고 지네는 뱀

을 먹고 올빼미는 쥐를 먹는다. 이 넷중에서 어느것이 올바른 맛을 알고 있는 것일까. 암원숭이는 긴 팔 원숭이를 짝으로 삼고 순록은

사슴과 교배하며 미꾸라지는 물고기와 노닌다. 사람마다 미인이라고 하는 여희를 보면 미꾸라지는 물 속으로 숨고 새가 그녀를 보면 날아

가 버리고 순록이 그녀를 보면 부리나케 달아나 버린다. 이넷중 어느쪽이 세상의 올바른 아름다움을 알고 있다고 하겠는가. 내가 보기에

는 인의 의 발단이나 시비의 길이란 어수선하고 어지럽다. 어찌 네가 그 구별을 알겠나"

인간이 좀 안다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가. 안다 하더라도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가. 올바른 지식이란 참으로 말할 수 없음을 왕예는 아주

쉽게 가르쳐 준다. 그리고 사람만 유별난 것이 아니라 만물이 하나 같음을 깨우치게 한다.

 

언젠가 장주는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날아 다니는 나비가 된 채 유쾌하게 즐기면서도 자기가 장주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문득 깨어나 보니 틀림없은 장주가 아닌가. 도대체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꾼 것인가 아니면 나비가 장주가 된 꿈을 꾼 것인가.

장주는 장주이고 나비는 나비이다. 장주의 나비에는 분명히 구별이 있을게다. 하지만 장주가 나비가 되고 나비가 장주가 되는 그 꿈은

분명 변화를 말하고 있는게다. 장주가 나비로 변하고 나비가 장주로 변하는 이러한 꿈속의 변화말이다. 이러한 변화가 장주의 꿈에서는

얼마나 즐거운 것인가. 즐거운 변화를 아마도 장자는 물화라고 한 모양이다. 즐거운 물화에는 상대도 없고 차별도 없으며 무한한 변화

를 서로 즐기면 된다. 나비는 장주가 되어 즐기고 장주는 나비가 되어 즐기면 된다. 사람은 위대한 존재이고 나비는 보잘 것 없는 벌레에

불과하다는 판단이란 얼마나 성급한 판단인가를 장자와 나비의 꿈이 우리로 하여금 터득하게 한다.

 

인간의 앎이 인간을 행복하게만 하는 것은 아니다. 약을 주고 병을 주는 것일 뿐이다. 이쪽이 좋으면 저쪽은 나쁘게 되는 법이다.

 

상대방을 감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착각이다. 남을 감화 시키겠다는 것은 오직 자기 생각에만 잡혀 있는 셈이다.

 

"성공하려고 무리하게 권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나침이란 필요없는 것을 덧붙이며 애써 성공하려는 것은 위태롭게 하는 것입니다.

좋은 일이 이루어지자면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나쁜일은 순식간에 일어나므로 고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니 사물의 움직임에 따라 마

음을 유유히 자유롭게 풀어놓고 어쩔 수없는 상태에 몸을 맡겨두고 중도를 지켜가는 것이 제일입니다. 무어을 이것저것 조작해서 보고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군주의 명령을 그대로 전하느니만 못합니다. 그러나 그일이 매우어렵습니다."-자고

 

"당신은 호랑이 사육자를 아시지요. 그 호랑이에게 산 먹이를 주지 않지요. 호랑이가 그것을 죽이려고 노기를 내는 까닭이지요. 결코

먹이를 통째로 주지도 않지요. 그것을 찢어 발기려는 호랑이의 노기 때문이지요. 호랑이가 배부를 때와 배고플 때를 알아서 호랑이의

노기를 잘 다스려 가려고 하지요. 호랑이와 사람이 다르지만 자기를 길러준 사람을 호랑이가 따르는 것은 호랑이의 본성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호랑이가 사육자를 죽이게 되는 것은 호랑이에게 거역한 것입니다."-안합

 

"말을 사랑하는 사람은 값진 광주리로 말똥을 담고 값진 그릇으로 말오줌을 받지요.어쩌다가 모기나 등에가 말에 붙어 있다고 갑자기

그것을 내려치면 말은 놀래서 재갈을 물어뜯고 목이며 가슴을 치고 받아 부셔버립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하면서도 그 사랑을 잃

게 되는 경우기 이렇게 일어날 수도 있는게지요. 안합 당신 경우가 이와 비슷하니 삼가지 않을수 있을까요."-백옥

 

"너는 나를 무엇에다 비교하려 하느냐. 너는 나를 쓸모없는 나무로 치는거냐, 대체 아가위 배 귤 유자 따위의 열매를 맺는 나무는 그 열

매가 익게 되면 잡아 뜯기게 된다. 뜯기면 부러지고 꺾여지고 잔가지는 찢겨지고 만다. 이는 열매를 맺는 능력 탓으로 제 삶이 괴롭게

되는 게다. 그래서 천명을 누리지 못하고 도중에 죽게 되어 버린다. 스스로 세속의 타격을 받게 되어 버린다. 세상의 사물이란 다 이런것

이다. 나는 오랫동안 쓸모잇는 데가 없기를 바라왔다.죽을 뻔 했으나 오늘 자네가 쓸모 없다고 하여 비로소 나는 뜻을 이루어 내 큰 쓸모

로 삼게 되었다. 내가 쓸모 있었더라면 어떻게 이러히 크게 될 수 있었겠는가. 너나 내나 다 하찮은 것이다. 서로 하찮은 산인이 어찌 산

목을 알것인가."-꿈속에서 상수리나무가 장석에게

 

"새야새야 어째서 네 덕이 약해졌느냐, 앞날은 기대할 수가 없고 지난날은 좇을 수가 없구나. 천하에 도가 있다면 성인은 그것을 이룩하

지만 천하에 도가 없다면 성인은 그저 숨어서 살아갈 뿐이네. 지금 세상에는 형벌을 면하는 것으로 족할 뿐이지. 행복이란 깃털보다 가

벼우나 그것을 담을 줄을 모르네. 그만두게 그만두어. 도덕으로 사람을 대하는 짓은 그만두게. 위험하고 위험하네 . 땅에 금을 긋고 허둥

데는 것은 위험하네 가시나무여 가시여, 내 가는 길을 막지 를 말라. 내 가는 길은 구불구불하네. 발에 상처를 내지 말라. 산의 나무는 스

스로 베어가게 만들고 등불은 스스로 제몸을 태운다. 계수나무는 먹을 수 있어서 잘려지고 옻나무는 쓸모가 있어서 쪼개진다. 사람들은

모두 쓸모있는 것의 쓸모는 알아도 쓸모 없는 것의 쓸모를 모른다네."-장자서의 <인간세> 끝에서 접여가 공자를 이렇게 빗대어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장자의 이야기를 들었다.

 

흐르는 물을 거울로 삼지 않는다. 가라앉은 물을 거울로 삼는다. 가라앉아 잔잔하 물이기에 그 속에 가라앉은 온갖 것들을 잔잔하게

한다.  -공자..그러나 장자의 말일게다.

 

덕이란 무엇인가? 사람의 마음을 자연이게 하는 것이다.

..덕이란 自由이며 自遊이고 곧 만물을 하나같이 사랑하는 마음새일 것이 아닌가 싶어진다.

사람이란 어떤 자리에 있느냐에 따라서 그 됨됨이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에 따라 됨됨이가 정해지는 법이다.

 

사람들은 잊어야 할 것은 잊지 않고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잊어버리고 산다. 이러한 잊음을 '참으로 잊어버림'誠忘이라고 한다.

 

"옛날의 진인은 잠을 자도 꿈을 꾸지 않았다. 깨어 있어도 근심이 없었으며 맛있는 음식을 찾지 않았고 숨을 쉬면 깊고 고요하였다.

진인은 발꿈치로 숨을 쉬고 범인은 목구멍으로 숨을 쉰다. 밖의 것드로 매인 사람의 목에서 나오는 소리는 마치 토하는 것 같고 욕망

이 ㅁ낳은 자의 마음은 얕을 뿐이다."

"옛날의 진인은 삶을 ㅣ새삼 기뻐할 줄 모르며 죽음을 새삼 미워 할 줄 도 모른다. 태어남을 기뻐하거나 죽음을 거역하지도 않는다.

무심히 자연을 따라가고 무심히 자연을 따라올 뿐이다. 처음을 모르고 끝을 알려 하지도 않는다. 삶을 받으면 그대로 기뻐하고 죽음

을 받으면 제자리로 돌려준다. 이러한 것을 분별하려는 마음으로 도를 해치지 않는 것이라 하며 사람의 짓으로 자연을 돕는다고 여기지

않음이라고 하는셈이다. 이러한 경지에 있는 분이 곧 지인이다."

 

가장 높은 곳보다 더 위에 있으면서도 높은 척하지 않고 가장 깊은 곳보다 더 밑에 있으면서 깊은 척하지 않는다.  천지보다 머저 생겨

났으면서 오랜세월이라 여기지 않고 까마득한 옛날보다 더 오래이면서 늙었다고 여기지 않는다.  이처럼 대도는 언제나 항상 지금이고

여기 일뿐이다.

 

"삶을 죽이는 죽이는 자에게는 죽음이란 없지요. 삶을 살려고 하는 자에게는 삶이란 없는 겁니다. 도란 모든 것을 보내고 모든것을 맞

아 들이며 모든 것을 파괴하고 모든것을 이룩하는 거요. 이런 것을 변화속의 안정이라 하지요. 그러한 것은 변화가 있은 후에 비로소

이루어지는 겁니다"

-삶을 죽인다 함은 삶을 초월함이며 삶을 살려고 함이란 그것을 탐한는 것이다. 초월이란 모든 것을 보내고 모든것을 맞이할 수 있는

방법이며 그러한 방법을 타야 도의 길을 밟을 수 있음을 알려준다. 그길을 걷는 걸음은 파괴의 걸음이 창조를 밝고 창조의 걸음이 파괴를

밟아 걷는 걸음이며 그 걸음이 곧 변화이면서 안정인게다. 대립이 없으면 혼란은 없는 법이고그러한 법에는 질서라고 따로 일러서 강조할

것이 없는 법이다.

 

사는 일도 하나의 꿈결이고 죽는 일 역시 하나의 꿈결릴런지 모른다. 하늘을 떠가는 구름은 자신의 형체를 고집하질 않는다. 있으면 있

고 없어지면 없어지고 그렇게 그저 하늘을 노닌다. 만일 얽매인 구름이 있다면 그것은 구름이 아니다. 무엇이 아닌것은 자연에 없는 법

이다.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든 자연의 변화에 따를 뿐이다. 삶도있고 죽음도 있는 것이니 있다는 그것으로 자연에서는 하나일 뿐이다.

다만 옮겨졌을 뿐이다. ..

사람의 지식으로는 모른다. 자연이 하는 일을 사람은 모른다.그저 따를 뿐이다.

 

"도는 만물을 이루어 놓으면서도 의롭게 여기질 않고 언제나 미치는 은혜를 베풀면서도 어질다고 않는다. 천지를 싣고 감싸서 온갖 것을

조각해 내면서도 재주라고 여기질 않는다. 이것이 바로 마음을 노닐게 하는 경지일세"

 

비가와도 우산이 없다고 걱정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벗을 하고자 할게다.

 

욕심을 내지 말라. 이것이다. 자연이란 무엇인가? 바로 아무런 욕심을 내지 않음이 곧 자연이다.

 

비치면 비춰주고 사라지면 그래도 그만이다. 이처럼 응하되 무엇 하나 감추거나 탐하지 않는다.그래서 거울은 온갖 사물이 거기에 비

치인들 하나도 상하지 않는다. 이 얼마나 자유인가. 자연은 그러한 거울 같고 인간은 마치 상을 한사코 잡아두려고 발버둥치는 비디오 테

입과 같을 뿐이다. 그러니 살마은 항상 한숨을 쉬면서 절망하고 아파하며 괴로워한다. 우리가 한숨과 절망과 고통을 버릴 수 있는 비밀

은 무엇일까? 자연을 닮아야 한다는 말은 아직도 여전히 참다운 도가 아닌가. 자기를 주장하면 할 수록 그 자기는 사라져 가고 자기를 고

집하지 않는 곳에서 그 자기는 살아 있음일게다.

 

높은 지위를 꿈꾸고 억만금을 꿈꾸면서 사람은 그것을 위대한 야심이라고 칭송하낟. 그러나 아무도 꽃이 되어 보려고 꿈을 꾼다든지 거

지가 되어 보려고 꿈을 꾼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장자는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고  나비가 장자로 되는 꾼다. 장자의 꿈은 분명

청운의 꿈 같은 게 아니다.

 

물이 괸곳이 깊지 않으면 큰배를 띄울만한 힘이 없다. 한잔의 물을 마루의 패인곳에 엎지르면 풀잎은 떠서 배가 되지만 거기에 잔을

놓으면 마루바닥에 닿는 다. 물은 얕은데 배가 크기 때문이다.

 

하루 살이는 밤과 새벽을 모르고 매미는 봄과 가을을 모른다.

 

지인에게는 자기란 것이 없고 신인에게는 공적이란 것이 없으며 성인에게는 명예란 것이 없다.

 

뱁새가 깊은숲속에다 둥지를 튼다한들 나뭇가지 하나면 족하고 두더지가 강물을 마신다고 한들 그 작은 배를 채우는데 불과하다.

 

어찌 장님이나 귀머거리가 육체에만 있다는 말인가. 지식에도 장님이 있고 귀머거리가 있다.

 

지금 나는 내 존재를 잊어 버렸다. 너는 그것을 알수 있겠는가. 너는 사람의 피리소리는 들어도 땅의 소리는 듣질 못했지. 또 당의 소리

를 듣는다해도 하늘의 소리는 듣질 못했겠지.

 

말하자면 대지가 내쉬는 숨결을 바람이라고 하지. 그게 일지 않으면 그뿐이지만 한 번 일었다 하면 온갖 구멍이 다 요란하게 울린다.

 

수 많은 걷들에 바람이 불어 서로들 다른 소리를 내지만 제 스스로 소리를 내고 있는 게지. 사나운 소리를 나게 하는게 누구이겠는가.

 

크나큰 지혜는 한가하고 작은 지혜는 따지려 든다. 크나큰 말은 담담하고 작은 말은 수다스럽다.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 근심과 한탄, 변덕과 고집, 아첨과 거만, 개방과 꾸밈 이것들이 없으면 내가 있을 수 없고 내가 없으면

그것들이 나타날 데가 없다.

 

백개의 뼈마디 아홉개의 구멍, 여섯개의 내장이 갖추어져 있어도 우리는 그중 어느하나만 좋아한다고 할 수는 없다.

 

진리는 잔재주에 가려지고 말은 꾸며서 가려진다. 그래서 유가와 묵가의 시비가 벌어져서 상대가 나쁘다는 것을 좋다 하고 상대가 좋

다는 것을 나쁘다고 한다. 상대가 나쁘다는 것을 좋다하고 상대가 좋다는 것을 나쁘다고 할테면 그러한 시비를 넘어선 밝은 지혜에 서는

것만 못하다.

 

내 몸속의 간이 쓸개보다 더 중하다고 여길 것인가. 다 같이 중하다고 누구나 생각한다.이러한 생각이 곧 마음을 발게 하고 가볍게 한다.

남의 모을 내몸처럼 여긴다면 만물은 하나가 된다

 

사물은 이것 아닌것이 없고 저것 아닌것이 없다... 이것이 저것이고 저것이 또한 이것이다. 저것도 하나의 시비이며 이것도 하나의 시

비이다. 과연 저것과 이것이 있다는 말인가 없다는 말인가. 저것과 이것이 서로 대립을 없애는 경지를 도의 중심이라고 한다.

 

천지는 하나의 손가락이고 만물은 한마리 말이다. -생사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위와 같이 응하면 된다. 생사 사이를 삶이라 한다.

삶이 무엇이냐고 물어도 위와 같이 응하면 된다. 산다는 일은 고달픈 것이다. 고달플 때마다 하나의 손가락이 천지이고 고달프게

하는 온갖것이란 한마리의 말이라고 여기면 된다. 이 얼마나 행복한가.

 

한쪽에서 보면 분열이고 다른 쪽에서 보면 합침이다. 한쪽에서의 합침은 다른 족에서의 파괴이다. 모든 사물은 합침이든 파괴이든 다

같이 하나이다.

 

아침에 세개 저녁에 네개 했던 모든 원숭이들이 화를 냈다. 그래서 아침에 네개 저녁에 세개 했더니 원숭이들이 모두 좋아했다.

 

완성과 파괴가 잇는 것은 소씨가 거문고를 뜯었을 때이고 완성과 파괴가 없는 것은 소씨가 거문고를 뜯지 않았을 때이다.-

소의 네발이 없다면 소는 얼마나 불편하고 괴로울 것인가.ㄱ ㅡ러나 소에게 코뚜레가 없다면 얼마나 편하고 숨을 쉬기가쉬울 것인가.

소는 사람을 위하여 세상에 있는 것이아니다. 산새나 산짐승처럼 아무런 억압없이 산천의 풀밭에서 마음대로 풀을 뜯고 사람과 함께

살아야 할 목숨이다. 그런데도 소는 코뚜레를 끼이기 위하여 코에 구멍을 내고 피를 흘려야 한다. 그렇게 하는 손은 누구의 것인가.

바로 사람의 것이다. 이러한 손이 타는 거문고의 소리가 완성과 파괴일지라도 사람은 불편하고 탈을 입게 된다. 그렇다면 차라리 사람의

손이 거문고를 타지 ㅇ낳는 편이 나을게다. 그러나 사람의 손이 아니라 자연의 손이라면 이미 소씨 이전에 거문고는 타고 있었다. 대지에

바람이 불면 천만개의 구멍에서 천만개의 소리가 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바람이 자면 천만개의 구멍은 쉰다. 우리가 사는곳은 항상

바람이 부는 곳이고 천지만물을 있게 한 그무엇인 도는 바람이 불어도 그대로이고 쉬어도 그대로이다. 다만 바람ㅁ이 불면 나뭇가지를

흔들리게 하고 바람이 쉼녀 가지도 쉬게 할 뿐이다. 무엇을 억지로 지어서 만들지 않는다. 그러니 거문고를 뜯어도 그만이고 쉬어도 그만

이다. 하지만 사람의 손은 끊임없이 코뚜레를 만들어 소의 코에다 꿰어야 한다. 소의 코가 사람의 코라고 생각하면 된다. 사람은 저마다

문화의 코걸이를 달고 사회에서 활보를 한다.

 

유와 무 중에서 어는것이 유이고 어느것이 무인지 알 수가 없다.지금 내가 이렇게 말했지만 내가 한 말이 있는 셈이 되는 것일까.

내가 한말이 없는 셈이 되는 것일까.-이것은 있는 것이고 저것은 없는 것이라고 잘라 말할 수는 엇ㅂ다. 무엇이든 있다가 없다가 있게 되

는 까닭이다. 무엇하나 그대로 있는 것은 없다고 여래도 이미 말을 하였다. 그렇다면 무엇은 항상 유이고 무엇은 항 상 무일수는 없는 일

이다. 그래서 노자도 유는 무에서 나오고 만물은 유에서 나온다고 했던 모양이다.

 

이 세상에서 가을짐승의 털끝보다 큰 것은 없고 태산은 작은 것이다. 어려서 죽은 아이보다 오래 산 자는 없으며 팽자는요절한 자이다.

-마음이란 자루는 시간이 갈수록 때가 묻어서 들어가는 것을 썩게 하고 숨을 죽여 싱싱한 모습을 잃어버리게도 한다. 그래서 마음은 만

물을 담기도 하지만 더럽힌다. 이를 두고 버릇이라고 한다. 몸버릇은 고치면 되지만 마음버릇은 뒤집어야 한다. 말하자면 마음이란 자루

를 뒤집어서 털어야 한다. ..

한방울의 물이 모여 강물이 되어 흐름을 알게 된다. 그러한 마음으로 한강이 크다고 할 것인가 한방울의 물이 크다고 할 것인가. 한방울

의 물이 한강보다 크고 한강은 한방울의 물보다 작다고 하는말을 들을수 있게 되는 법이다. 그렇게 되면 마음은 저절로 뒤집혀져서 상

하가 따로 있는 게 아님을 알게 되고 전후와 내외도 따로 있는 게 아님을 알게 될 것이며 내외가따로 아님을 알게 될 것이 아닌가.

 

무릇 도에는 한계가 없다. 말이란 본래 일정한 거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구별이 생기게 된다.- 말이란 흐르는 물과 같아서 물을 손바닥으

로 떠올릴 수가 없다. 같은 말을 할지라도 하기 나름이고 듣기 나름이다. 그래서 세치 혀가 군중을 진정 시킬수도 있고 선동할 수도 있게

된다. 그러므로 말이 천지를 들었다 놓았다 하게된다. 이러한 말이니 말짓은 참말이 되기가 어렵고 거짓말이 되기 일 쑤이다.

 

무릇 참된 도는 나타낼 수 없고 참된 밝힘은 말로 하지 못한다. 참된 인은 인이라 하지 않으며 참으로 청렴하면 겸손하지 않고 참된 요

기는 남을 해치지 않는다.

 

살고 죽는 것을 잊어버리고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짓을 잊어버리면 한계가 없는 곳으로 뻗어나간다.

 

제가 반기는 것은 도입니다. 재주 따위보다야 훨씬 우월하답니다. 제가 처음 소를 잡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면 무엇이나 소뿐이었습

니다.  삼년 이 지난뒤에는 소의 온모습은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요즘 저는 정신으로 대하고 있고 눈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사물을 제대로 보려면 눈을 뜨지 말고 눈을 감으라는 말이 있다. 얼굴에 붙어 있는 두 눈은 사물의 모습을 보는 것으로 그치고 사물을

보지는 않은다. 사물을 보려면 마음으롭 ㅗ아야 한다. 사물을 보는 마음을 정신이라고 하는 셈이다.

 

못가의 꿩은 열걸음 걸어서 한 입 쪼아 먹고 백걸음을 걸어야 물 한 모금마시지만 조롱속에서 길러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기력은 왕성

할 런지 모르지만 편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손가락이 땔나무 지피는 일을 다하면 불은 계속 타며 꺼질 줄을 모른다. - 영원이란 변함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끊임없는 변화

를 하는 것이  곧 영원이니 그러한 영원이란 바로 자연의 흐름일 수가 있을게다. 도라는 것이 자연의 변화를 바라볼 때 그것은 마치 불

타는 모습과 같을 런지모른다. 불이란 바로 파괴이면서 창조인 까닭이다.

 

덕은 명예욕 탓으로 탕진되고 지식은 경쟁심에서 생긴다. 명예욕은 서로 헐뜯는 것이며 지식이란 서로 다투기 위한 수단이다.

 

마음을 통일하라.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어라. 마음으로 듣지를 말고 기로 들어라 귀는 소리를 들을 뿐이고 마음은 밖의 것들로

맞추어 깨달을 뿐이지만 기는 공허하여 무엇이든 다 받아들인다.

 

저 텅빈것을 잘 보라. 텅 빈 방에 햇빛이 비쳐 밝지 않은가. 행복은 텅 빈곳에 머문다.

 

귀나 눈을 안으로 통하게 하고 마음의 작용을 밖으로 향하게 하면 귀신도 찾아와 머물 것이다.

 

항상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전해주고 지나친 말을 전하지 않으면 우선은 안전하다.

 

말이란 진실에서 시작되어 늘 거짓으로 끝나게 된다. 그 시작은 간략하지만 끝날 무렵에는 반드시 엄청나게 커진다.

 

말이란 바람이나 물결과 같다. 행위란 득실이 있다. 바람이나 물결은 움직이기 쉽고 득실은 위험에 빠지기가 쉽다.

 

그서 사물의 움직임에 따라 마음을 자유롭게 풀어두고 어쩔 수 없는 상태에 몸을 맡긴 채로 중도를 키워가는 것이 제일이다.

 

그대는 사마귀란 것을 알지요.그놈은 팔뚝을 휘둘러 수레와 맞서려고 합니다. 제놈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겁니다.

자기 재능의 훌륭함만을 자랑하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하더라도 그 사랑을 잃는 경우가 있다. 삼가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너무 달면 혀가 굳어져 혀는 단맛을 잃어 벌니다. 물론 써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목이 말라도 한 사발의 물이면 족하고 아무리 배가 고파도 한그릇의 밥이면 족하다. 참새는 참새만큼

먹어야 하고 돼지는 돼지만큼 먹는 법이다. 먹는 것도 이처럼 알맞게 먹어야 하고 그 양을 넘어서면 뒷탈이 나는 법이다.

 

너든 나든 모두 다 하찮은 것이다. 어찌 서로를 그렇다고 헐뜯을 것인가. 거의 죽은 것이나 진배없어 쓸모 없는 인간이 어찌 산목을 알것인가.

 

지금 세상은 형벌을 면하는게 고작일 뿐 행복은 깃털보다 가벼워도 담을 줄을 모르고 불행은 땅보다 무거워도 피할 줄을 모른다. 그만두게 그만둬.

 

산의 나무는 스스로 잘리게 하고 등불은 스스로 제 몸을 태운다. 계수나무는 먹을 수 있어서 베이고, 옻나무는 쓸모가 있어서 벗겨진다.

사람은 쓸모 있는 것의 쓸모는 알아도 쓸모없는 것의 쓸모는 모른다.

 

행복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마음을 가볍게 하는 것이다. 불행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가?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이다. 욕심의 저울은

무게를 항상 반대로 단다. 무거운 것을 가볍다고 하고 가벼운 것을 무겁다고 한다.

 

삶과 죽음은 중대한 일이다. 하지만 그런 변화와 함께 변하는 일이 없다. 하늘이 뒤집히고 땅이 꺼져도 역시 함께 떨어지지 않는다.

-행복은 오라 한다고 오는 것이 아니며 불행은 가라 한다고 가는 것이 아니다. 밤은 밤이고 낮은 낮인 것처럼 태어남은 태어남이고

죽음은 죽음인 것이다. 다만 밤이 낮으로 이어지고 태어남이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인간의 욕망은

열을 내리기 시작할 수도 있는 일이다. 단풍이 든 가을나뭇잎이 청청한 여름의 잎으로 바귀는 것은 아니다. 낙엽은 흙이되고 물이

되고 바람이 될 뿐이다. 그러나 다시 흙속에서 물속에서 그리고 바람속에서 새 잎이 트는 봄을 마주하면 청청한 잎이 낙엽으로 이어지

고 낙엽이 청청한 잎으로 이어지는 자연의 말을 듣게 된다. 인간의 생사도 이러한 순환이라면 유모차에 탄 아이를 기뻐하고 흙속으로

돌아갈 늙은이를 슬퍼할 것은 없는 일이다.

 

서로 다른 입장에서 본다면 한 몸속에 있는 간이나 쓸개도 초나라와 월나라 같다.같은 처지에서 본다면 만물은 모두 하나이다.

-비가 오면 모든 것들이 고루 젖는다. 그리고 햇빛이 나면 모든 것들이 고루 말려진다. 자연은 미운놈만 골라서 젖게 한다거나 이쁜

놈만 골라서 젖게 하지 않으며 이것에게는 햇빛을 주고 저것에게는 햇빛을 거두는 짓을 모른다. 그러나 사람은 손이 안으로 굽는 법

이란 말을 믿는다. 이러한 사람의 짓은 분별하는 기질의 탓이다.

 

사람은 흐르는 물을 거울 삼지 않는다. 가라앉은물을 거울로 삼는다. 잔잔히 가라앉아서 다른 모든 가라앉은 것들을 잔잔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은 참으로 묘하다.산천에 흐르는 물은 고여있기만 하면 썩어버리지만 마음은 흐르기만 하면 썩어버린다. 마음이

살아서 숨을 쉬려면 고여 잇어야 하고 마음이 상해서 썩어지려면 한사코 흘러야 한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소인은 정신없이 쏘다

녀 마음을 잃어 버리고 대인은 때때로 가만히 마음을 가누어 그 마음이 거울이 되게 하여 스스로를 들여다 보는 연습을 하는게다

 

거울이 밝은 것은 때와 티끌이 앉지 않아서이고 그것들이 앉게 되면 흐려진다. 오랫동안 현인과 함께 있으면 잘못이 없어진다.

 

스스로 잘못을 변명하며 발을 잘리지 않았어야 했다고 하는 자는 많아도 잘못을 변명하질 않고 발이 있어서는 안되었다고 말하는

자는 적다. -마음을 도둑질 당한 것을 알수 없으니 손이 없었더라면 마음을 도둑질 당하는 버릇에 물들어 버리지 않았을 것을 누가

알 것인가. 이는 다 인간이 덕을 잃어 버린 탓이 아닌가 말이다. 덕은 무엇인가. 마음을 도둑질 하는 것을 도둑놈이라고 밝혀 주는

것이다.

 

그 사람은 매우 괴상한 명성을 바라고 있겠지만 지인으 그 명성을 스스로를 묶는 수갑이나 족쇄로 여기는 것을 그는 모른다.

 

수평이란 물이 멈춘 상태이다. 그것이 본보기가 될 수 있음은 안에 고요를 간직하고 겉이 출렁이지 않는 까닭이다. 덕이란 사물의 조

화가 잘 이루어진 상태이다.덕이 나타나지 않으면 사람들은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 -재주는 빨랫줄에 걸린 속옷과 같고 덕은 장농속

에 넣어둔 속옷과 같다. 산들바람만 스쳐도 대낮 하늘밑에서 창피한줄도 모르고 오고 가는 사람들의 눈앞에서 재주라는 속옷은 나풀

거린다. 그러나 장농속의 덕이란 속옷은 남의 눈을 피하여 그것을 입을 사람에게 추위를 면하게 해주려고 항상기다리고만 있을 뿐이다.

..덕이란 무엇인가. 고마운 마음을 얻게 하는 것이다. 덕은 마음을 가볍게 하고 입을 무겁게 하며 귀를 두텁게 하고 눈을 밝게 한다. 그러

나 덕이 마음속에서 나와 입을 통해 바람을 탈때는 반나절 양지 쪽 햇볕에 불과 할뿐이다. 햇볕은 지나가기 마련이고 밤이되면 하늘에

서 내려오고 땅에서 솟아오르는 냉기를 막아줄 수 없는 경우가 생긴다. 그러므로 덕이 많ㅇ다고 내놓는 사람은 실은 마음속에 쌓아

둔 덕이 바닥에 나버린 상태나 마찬가지다.

 

덕이 뛰어나면 겉 따위는 잊게 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잊어야 할 것은 잊지 않고 잊어서는 안될 것은 잊고 있다. 이러한 잊음을 성망이라고 한다.

이미 자연이 먹여 살리는 데 인위가 필요한 것인가. -사람의 삶은 여러 갈래로 고통을 받는다. 그러한 고통은 따지고 본다면 사람만 받는

것은 아니다. 나무의 삶이나 풀의 삶도 고통을 받고 새나 짐승의 삶도 고통을 받기 마련이다. 나무나 풀에게 겨울은 분명 고통의 순간

이다. 새나 짐승도 늙고 병들어 죽기도 하고 겨울이면 먹이가 없어서 굶거나 허기져 죽기도 한다. 산야에서 편히 사는 것처럼 보이는

새나 짐승에게 도 이처럼 고통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만 삶의 고통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만이 그러한 고통을 이

겨내려는 마음을 먹는다. 그런 마음 먹기가 바로 인위인 셈이다. 그 인위에서 사람의 삶이 더 많은  고통을 겪게 된다는 것을 인간은 알면

서도 그 인위를 버릴 수가 없다.人爲

 

 

사람의 모습은 하고 있지만 사람의 정을 지니지 않는다. 사람의 모습이므로 사람들과 함께 살지만 그 정이 없으므로 옳다 그르다는 판

단을 몸에서 구할 수는 없다. 너무도 작은 것들이 사람의 속에 있기 때문이다. -지인에게는 그러한 꼬리표가 달린 정이란 것은 없다.

그저 모든 것이 자연이기 때문이다. 지인은 유정하다는 거을 따지고 보면 잔인한 것이고 무정한 것이 어질다는 비밀을 안다.

 

사람에겐 본래 정이 없는 것인가. 그렇다. 사람이면서 정이 없으면 어찌 사람이라 할 것인가. 도가 사람의 얼굴을 베풀어주고 자연이 사람

의 형체를 베풀어 주었는데 어찌 사람이 아니라 할 수 있겠나. -인간의 다춤은 모두 어디서 비롯되는가. 마음을 창고로 만들어 놓고 문에

자물쇠를 걸게 하는 정에서 비롯된다. 그러한 창고를 부셔버린 인간에게 무슨 정 따위가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장자가 존경하는 지인은

무정한 사람이고 그는곧 자연이다.

 

이미 사람이라고 하면 정이 있을 터인데 어찌 정이 없다고 하는가. 그건 내가 말하는 정이 아닐세. 내가 정이 없다고 하는 것은 사람이 좋

고 나쁨에 의해 스스로의 몸속을 해치지 않고 언제나 자연을 따르면서 삶을 덧붙이려 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일세. -욕심의 정이 자연을

해치는 법이다. 욕심 탓으로 애닳아 하면 그 애닳음이 마음을 상하게 한다. 상해야 하는 마음은 바로 자연의 것임을 안다면 왜 남을 해할

욕심을 낼 것인가. 욕심의 정에 미쳐 버리면 못하는 짓이 없어져 버린다.

 

자연이 하는 일을 알고 하는일을 알면 최고이다. 자연이 하는일을 아는 자는 자연 그대로 살아가고 사람이 하는 일을 아는자는 자기가 아

는 것으로써 그 앎이 알지 못하는 바를 키워 나간다.

 

밖의 사물에 굴복하는 자는 그 목에서 나오는 소리가 마치 토하는 것 같고 욕망이 깊은 자는 그 마음의 작용이 얕다

무심히 자연을 따라가고 무심히 자연을 따라올 뿐이다. 그 시초를 모르고 그 끝을 알려하지 않는다.

사물을 뜻대로 하기를 바라는 자는 성인이 아니다. 편애하는 자는 어진 사람이 아니다. 자연을 시간으로 구분하는 자는 현자가 아니다.

이로움과 해로움을 구별하는 자는 선비가 아니다.

그 하나라는 것으로 자연의 무리가 되고 하나가 아니라는 것으로 사람의 무리가 된다. 자연과 사람이 서로 다투지 않는다. 이런 사람

을 진인이라고 한다. -분별하지 말라. 그러면 자연이 된다.분별하라. 그러면 사람이 된다. 사람과 자연이 서로 다른 얼굴로 말하는 것은

여기서 비롯된다.

샘물이 말라 물고기가 땅위에 모여 서로 물기를 끼얹고 서로 물거품으로 적셔준들 강이나 호수에서 서로 잊고 있는 것만 못하다. -사람은

바람을 모르고 물고기는 물을 모른다. 바람의 고마움을 알게 되면 사람은 목숨을 알수가 있는 것이고 물의 고마움을 알면 고기가 땅위

를 탐하지 않을게다...마치 물이 불을 만나면 물이 끓거나 아니면 불이 꺼져야 하지만 물만 있으면 그저 흐르면 되고 불만 있으면 그저

타오르기만 하면 된다. 살아 있는 모습이란 불과 물이 만난 것이고 죽은 모습이란 바로 물은 물대로 불은 불대로 흩어지는 것과 같은 셈

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분명 죽음은 쉬는 것이다. 이것도 자연이다.

 

 

자연은 우리에게 모습을 주었다. 우리에게 삶을 주어 수고하게 하고 늙음을 주며 편하게 하며 죽음을 주어 쉬게 한다.

작은 것을 큰것속에 잘 감추었다고 해도 역시 다른데로 가지고 갈데는 있다. 하지만 만약 온세상을 온세상에 감추면 가져갈 데란 없

어진다. 이것이 만물의 커다란 진리이다. -완전하게 감출 수 있게 되려면 온세상을 송두리째 감추어 버리는 일이다. 이러한 짓은 자연

밖에 할 수 없다. 자연은 모든것을 드러내 놓고감추어 둔다. 낮이면 모든것을 보여준다. 그러다가 밤이 되면 모든것을 감추어 버린다. 이렇게 큰 손이 인간에게는 없다.

 

도는 천지보다 먼저 태어났으면서도 오랜 세월이라 여기질 않는다. 까미득한 옛날보다 더 오래이면서도 늙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신을

믿듯이 도를 믿어 버린다면 도가 왜 젊음도 없고 늙음도 없는 지를 짚을수가 있을게다. 하나의모래알도 도의 얼굴이며 하나의 풀잎도 도

의 얼굴이라고 여겨도 될게다. 그러므로 만물이 도의 얼굴아닌것이 없는 셈이다.

 

삶을 죽이는 자에게 죽음이란 없다. 삶을 살려고 하는 자에게 삶이란 없다. <이것이 도이다>도란 모든것을 맞아들이며 모든것을

파괴하고 모든 것을 이룩한다.

누가 없음을 머리로 삼고 삶을 등골로 알며 죽음을 꽁무니로 여길 수 있을까. 누가 죽음고 삶, 있음과 없음이 하나임을 알수 있을까.-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을 하늘의 구름을 보면 안다. 천지의 편에서 본다면 인간역시 한쪽의 구름에 불과 할 뿐이다. 구름

을 보라. 잠시도 그모양을 그대로 간직하질 않는다. 만물이란 다 이 모양이다.

새는 높이 날아 화살의 위험을 피하고 새앙쥐는 제단 밑 깊숙이 굴을 파고서 연기에 그을리거나 파헤쳐지는 화를 피한다.

끝없이 넓은 들판에서 살려고 한다. 그런데 너는 또 무엇 때문에 천하를 다스리는 일 따위로 내 마음을 움직이려 하는가.

 

암컷이 많아도 수컷이 없으면 어찌 알이 생기겠는가. 껍질만 있는 도로써 세상과 맞붙어 싸우며 억지로 출세하려고 하는가.

 

소용돌이로 굽이치는 물도 연못이고 멈추어 괴어 있는 물도 연못이며 흐르는 깊은 물도 연못이다. -변함없는 것이란 없다.

자연에서 항상 그대로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얼음이 녹으면 물이라 하고 물이 얼면 얼음이라 한다. 그러나 얼음도 여전히 물일 뿐이다.

얼음은 다만 물의 모습이 변한 것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물이 다르고 얼음이 다르다고 할 수 없다. ..이렇게 분별로 치닫는 앎이란 알고

보면 아주 작은 것에 불과하다. ..

이러한 인간의 비위가 바로 시비의 근원이다. 시비를 가지고 저울질을 하면 그 눈금은 항상 엉망이다. 무엇을 제대로 달수 없는일이다.

선악이니 진위니 미추니 하는 것은 시비의 한계안에서만 가능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것들은 인간의 시비에서만 따져지는 값일

뿐이다.

 

허실을 깍아내 버리고 소박함으로 돌아가 무심히 독립해 잇으면 온갖 일이 일어나도 얽매이지 않는다.

명예의 표적이 되지마라. 모략의 곳간이되지마라.일의 책임자가 되지 마라. 지식의 주인이 되지 말라. -한번 오르면 반드시 내려오게

되어 있다. 높이 오를 수록 떨어져서 입게 될 상처의 아픔은 커지기 마련이다. 

 

지인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거울같다. 사물을 보내지도 맞아들이지도 않는다. 사물에 응하되 감추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은 무엇

을 꾸미려고 하지만 자연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언제나 변화를 하되 한결같다.

 

사람은 누구나 일곱구멍이 있어서 보고 듣고 먹고 숨을 쉬는데 이 혼돈에만 그게 없다. 어디 시험삼아 구멍을 뚫어주자. 그래서 날마다

한 구멍씩 뚫었는데 이레가 지나자 그 혼돈은 죽고 말았다. -그대로 두면 그만이지만 억지를 부리면 언젠가는 탈이난다.무엇이든

탈이 날 조짐을 안고 있는 것이 바로 문명이란 것이다. 문명은 오로지 인간만을 위하여 만물을 무자비하게 활용해야 한다는 인간의 욕심

에서 비롯된 것이다. 문명은 자연에 인간이 구멍을 뚫는 짓일게다. ..

..육신의 병은 문명이 내 놓은 의술로 고칠런지 모르지만 살기와 광기로 가득찬 인간의 마음을 고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정신의 살기와 광기는 바로 문명이란 송곳이 인간의 마음에 뚫어 놓은 구멍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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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늦은 밤부터 읽기 시작한 장자..오늘 밤 8시 가 조금 못되어 간신히 다 읽었다. 읽었다고 알것인가. 언젠가 다시 들출것이

확연하고 나는 밑도 끝도 없이 알수 없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삶에 대한 고뇌... 자연의 흐름처럼 늙어야 하는 것을 수긍하지만

욕심으로 하루를 매듭짓게 될 것이다. 그러나  수없이 넘기는 책갈피속에서 분명 작은 얻음으로 다시 비워지는 내가 되리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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