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만권을 읽으면..

토마스머톤 에세이집/존재하는 것과 행하는 것/위미숙옮김

다림영 2008. 7. 31.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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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영등포에서 5월 26일 샀던 책..

책은 온통 줄이 그어져 있고

어렵고 어렵고 다시 어려운 ..

종이는 누렇게 변했고 글씨는 깨알같고

그러나 끝까지 눈비비며 다시 줄을 그으며 보다.

독서는 나를 성장시켜주는 단단한 힘일 것이다.

이른아침 일어나 책을 들추며 그 글자들이 확연이 몸으로 스며들때의 희열

그 낱낱의 기쁨을 조금씩 알아간다.

어제보다 한계단 올라서고 있는 나를 발견하며  어렵고 이해가 잘 가지 않아도 넘기다.

 

"존재하는 것과 행하는 것

 

우리를 따뜻하게 해주는 것은 불이지, 불에서 나오는 연기가 아니다. 우리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게 해주는 것은 배이지,

배가 지나간 자국이 아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참 모습은 우리 자신의 존재의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서 찾아지는 것이지

우리 자신의 행위에 대한 외적 성찰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진정한 자아는 우리의 존재의 충격에 의해 생겨난 거품

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모든 행위들의 본원인 우리자신의 영혼에서 찾아야만 한다.

그러나 나의 영혼은 숨겨져 있어서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나 자신으로 부터 숨겨져 있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직접 볼수

없다.  또한 나 자신의 눈도 볼 수 없다.  그것들은 너무나 가가이 있기 때문에 나는 그것들을 볼수가 없는 것이다. 눈은 자기자신

을 보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눈으로 다른 것들을 볼 때에야 내게 눈이 있다는 것을 안다.

 

 

나는 거울 에서는 내 눈을 볼 수 있다.나의 영혼도 역시 자신의 행위의 거울 속에 자신을 비출 수 있다. 그러나 거울에 비친 것은

나의 진정한 존재가 아니라 나의 그림자일 뿐이다. 말과 행위의 거울은 나의 존재를 다만 부분적으로만 보여준다.

 

나 자신으로 부터 나와 나자신의 외부에서 이루어지는 말과 행위들은 그것들의 근원인 '숨겨진 생명'에 비교하면 죽은 것들이다.

이 행위들은 일시적이고 피상적이다. 그것들은 재빨리 사라져 버리고 그 결과는 아주 잠시 동안 만 지속될 뿐이다. 그러나 영혼 자체

는 남아 있다. 영혼은 자신의 행위의 거울에서 자신을 본다.

 

나의 영혼은 활동하지 않으면 자신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활동해야 한다. 활동하지 않고 정체되어 있는 영혼은 죽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나의 영혼은 완전히 그것의 활동으로 말미암은 외적인 효과로만 나타나서는 안된다. 나는 나자신을 볼

필요는 없다. 나는 단지 나 자신이기만 하면 된다. 나는 살아 있는 존재처럼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나 나의 자아 전체를 생각하고

행하하는 것에 몰입시킬 필요가 없으며, 또한 항상 내가 한 일에서 나 자신을 찾으려 할 필요도 없다. 자신을 완전히 활동에만 투

사하는 영혼은, 마치 사람이 조용하고 따뜻한 자기집을 놔두고 자기 집앞의 길가에서 잠자는 것과 같다.  영혼이 자신을 집 밖으로

내던져 자신이 행한일의 결과에서 자기 자신을 찾으려 하는 것은 마치 불이 타기는 원하지도 않고 다만 연기만 피워 올리고자 하는

것과 같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되는것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보기를 갈망하는 이유는 그들이 진정으로 자신들의 존재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하느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자신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완전히 믿지 �한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도

자신들의 믿음을 실천에서 옮기지 않는 사람들과 믿음을 가지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도 이와 똑같다.

 

어느 경우에든, 믿음의 상실은 곧 실재한다는 감각의 완전한 상실을 의미한다. 진정한 자기가 미워하고 두려워하는 살마들에게는 존

재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 자신의 실재<그것은 하느님의 실재를 투사한다>에서 평화를 얻을 수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진정한 존재를 회피하기 위해 몸부림쳐야 하며, 끊임없이 자신들이 행한 일을 봄으로써 거짓된 존재를 확인한다.

그들은 확인하기 위해 거울 속을 계속 들여다 보아야 한다.

그들은 무엇을 보고자 하는가? 그들 자신은 아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미치광이 같은-불사신 같고, 강력하고, 무한히 현명하고 지극히

아름답고 소멸될 수없는 행위에 의해 그들이 되고자 소망하는 신이 되엇다는 어떤 표정을 희망하고 있다.

 

인간이 자신의 행위의 거울에서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보고 또 볼때, 그의 영혼이 가지고 있는 두개의 비전은 눈을 지나치게 써서

상하게 한다면 그는 어느것이 진짜인지를 잊어 벌니다. 사실상 실재는 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서도 또 그의 그림자에게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실체는 그 자체에서 빠져 나와 그림자 속으로 이미 가버렸기 때문에 그는 하나의 진정한 사람이 아니라 두개의 그림자가 되어

버린다.

그렇게 되면 싸움이 시작된다. 한 그림자는 한편으로는 다른 그림자를 칭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비난한다. 그를 찬양

하기 위해 했던 행동은 그를 꾸짖고 저주한다.  그것은 결코 실재하지 않는다. 결코 현재에 존재하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

...

..

활동은 바로 생명의 정상적인 표현 중의 하나이며, 그것이 표현하는 생명은 행위의 질서 정연한 조직에 의해 자신을 강화시킬 때에 가장

완전하다. 이 질서는 활동과 휴식의 현명한 교체를 요구한다.우리가 단지 전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더 많은 것을 경험한다고 해서

더 완전하게 사는 것은 아니다. 그 반대로 우리는 보통보다 더 적게 일하고, 보고 맛보고, 경험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만 비로소 보

다 완전하게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한 여행자가 여행 안내서를 들고 박물관에 들어가 열심히 중요한 것들을 모두 살피고 나왔을 때 그는 들어가기 전보다 더 생기를 잃어

버릴 수 잇다. 그는 모든 것을 보았으나 동시에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그는 많은 일을 했으나 그거은 다마 그를 피곤하게 만들 뿐이었다.

만약 그가 잠시 동안 멈추어서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그림을 보다가 다른 것들을 모조리 잊어버렸다면 그는 시간을 완전히 낭비

한 것만은 아니엇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위로 할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안에서 존재의 새로운 깊이를 인식할 것이며 또 새롭게 존재

하고 새롭게 행위할 수 있기 때문에 그의 삶은 풍요로와 질것이다.

 

우리의 삶은 단지 활동이나 경험에 의해서는 풍요로와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행위와 경험의 질이다. 올바르게 행해지지 않

은 수많은 행위와 경험들은 다만 우리의 삶을 피폐시키고 고갈 시킬 뿐이다. 올바르지 못하게 행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을 더욱

실재하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실재하지 못하면 못할 수록 우리는 점점 더 불행해지고 죄의식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의 양

심의 순결은 우리의 삶의 깊이와 행위의 질에 정비례한다. 우리의 활동이 늘 무질서할 때 우리의 흉한 모습을 한 양심은 우리에게

행위의 양을 증가시키는 것이 최상책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더욱더 나빠져서 우리자신을 피폐시키고 우리의 전 삶을 텅

비게 하여 절망에 빠지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온전히 존재케 하기 위해서는 잠시 동안 뒤로 물러나 아무것도 하짐 라아야 한다.  활동으로 인해 자기 자

신으로 부터 완전히 떠나 있는 사람은 조용히 앉아서 쉬는 것, 전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없다. 쉰다는 바로 그

행위는 그가 행할 수 잇는 가장 어렵고 가장 용감한 행위이며 흔히 그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행동이다.

...

..

우리의 활동의 가치는 거의 전적으로 우리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 할 줄 아는 겸손에 달려있다. 우리가 잘못 행동하는 이유는 우리가 할

수 잇는 것을 행하는 데 만족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할 성공을 우리의 것으로 삼고자 하며 우리에게 요구

된 일이 아닌것을 하고자 고집한다. 우리는 결코 자신의 일을 성공적으로 행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의 힘에 단지  비례할 뿐인 일을 맡고자 하지 않기 때문이다.

 

...

..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일부분만 믿는 것이 우리 자신에 대해 정당한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자신은 눈가림에 완전히 빠져 버린다면

우리는 잘못될 수 밖에 없다.

우리의 진정한 존재는 우리가 격렬한 경험을 한다고 해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영혼의 격동은 영적인 허약함의 표시이다. 기쁨이

표범처럼 우리의 깊은 내면에 솟아 나온다고 해서 우쭐해 할 것이 하나도 없다. 그 때 우리의 영혼의 생명은 위험에 처해 있다.

왜냐하면 강한 사람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들보다 언제나 더 위대하며, 자기 자신을 발견한 사람의 영혼은 많은 물고기들이 사는 깊은

바다와 같기 때문이다. 그고기들은 결코 바다위로 튀어나오지 않으며, 그것들 중 어느 것도 고요한 수면을 흔들어 놓을 만큼 크지

못한다. 그가 "존재한다는 것" 은 그가 느끼거나 행하는 그 어떤 것보다도 위대하다.

 

...

..

올바르게 실패한 사람은 그릇되게 성공한 사람보다 더 위대하다. 자신이 가진것에 만족하고, 필연적으로 삶에서 많은 것을 잃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은 것을 가�으나 항상 잃을 까봐 걱정하는 사람보다 훨씬 더 낫다. 우리의 마음이 언제나 진정ㅣ한 나와 그렇지 않은 나로 분열된다면 우리는 결코 최선의 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에 ㅁ대한 우리의 평가가 낮아지고 우리의 기대가 적어질 수록, 우리가 가진 것을 사용할 기회를 더 많이 갖게 된다.

우리가 얼마나 보잘것 없는 지를 알지 못한다면 우리가 실제로 가지고 있는 것을 결코 올바르게 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행위와 존재의 새로운 질서를 깨닫기 위해서는 -그리고 우리 안에서 우리는 결코 할 수 없는 일들을 이루시는 하느님 자신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자신이 약한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언제나 열정의 절정에서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행복해질 수 없다. 행복은 열정의 문제가 아니라 균형과 질서와 리듬과 조화의 문제이다.

 

음악은 소리만이 아니라 그 안에 침묵이 있기 때문에 즐겁다. 소리와 침묵이 교체되지 않는다면 리듬이 있을 수 없다. 만약 우리가

삶의 모든 침묵들을 소리를 채움으로써 행복해지고자 한다면 삶의 모든 여가를 일로 메꿈으로서 생산적이고자 한다면, 우리의 모든

존재를 행위로 대체해 버림으로써 실재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오직 지구상에서 지옥을 만들어 내는 일만 성공하고 말 것이다.

 

우리에게 침묵이 없다면 하느님은 우리의 음악을 듣지 못하신다. 우리에게휴식이 없다면 하느님은 우리의 일을 축복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우리의 삶의 모든 구석을 행위와 경험으로 채우기 위해 우리가 우리의 삶의 모든 구석을 행위와 경험으로 채우기 위해 우리의

삶을 찌그러 뜨린다면 하느님은 조용히 우리의 마음에서 떠나 우리를 텅 비게 하실 것이다.

그러니 불완전한 행위를 버리고 우리가 잃고 있는 것에 대해 지나치게 걱정하지 말고 다른 것으로 나아가도록 하자.

사실 우리는 잘못을 많이 저지른다. 그러나 그것들 중에서 가장 커다란 잘못은, 마치 우리가 결코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줄 알았다

는 듯이 잘못을 저지른 것에 대해 놀라는 것이다.

 

...

..

삶 자체는 불완전하다. 모든 피조물들은 태어나는 순간 부터 죽어가기 시작하고 어느 누구도 절대적으로 완전하게 되지 않으며

그렇게 살수는 더군다나 없다는 것을 알고 잇다. 각개체는 단지 그것의 특별한 종을 위해 계획한 이상의 스케치일 뿐이다. 그것에게

더이상 무엇을 요구하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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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상에서 사는 한 우리의 소명은 바로 우리 자체만으로는 불완전하고 미완성이고, 불충분하고 변화하고 불행하고 가난하고 허

약하고 무덤을 향해 서둘러 가는 거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전능과 그분의 영원하심과 그분의 평화와 그분의 완전하심과 그분의 영광은

반드시 우리의 삶속으로 들어와 우리가 여기에 사는 동안 그분께서 우리에게 뜻하신 대로 그분안에서 영원히 살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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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우리가 거의 모든것을 가버리게 놔 둘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있다면 아마도 우리에게 필요한 한가지것-그것이 무엇이든-을 보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ㅣ모든 것을 갈망한다면 분명히 우리가 필요로 하는 그 한가지 것까지도 놓치고 말 것이다.

 

행복은 바로 우리의 삶에 필요한 한가지의 것 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데에 , 그리고 �이 나머지 것들을 포기하는 데 있다. 그 때

우리는 우리가 필요로 했던 그 한가지 것과 다른 모든 것도 우리에게 주어진 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랑과 고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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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듯이, 땅에 뿌려진 씨앗은 죽지 않는다.ㅈ ㅏ신의 바로 그 삶의 바탕<땅>에 뿌려진 씨앗처럼 사는 것은 결실을

맺기 위해서 그 땅속으로 녹아 들어가는 것이다. 그 사람은 '사랑이 되기' 위해서 사랑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열매를 맺는 일은

인간의 계획과 이해 밖의 일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열매맺기'위해서는 , 열매를 맺는다거나 생산한다거나 하는 모든 생각을 버리고

단순히 존재해야 한다. 그가 거둔 열매는 믿음의 행위이자 동시에 의심의 행위이다. 다시 말해서 그가 여태까지 자신속에서 보아온 모든

것에대한 의심과 그 혼자 서는 상상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믿음의 열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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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는 것은 흔히 사랑이 아니라, 다만 우리의 환상 속에서 지탱되는 필요일 뿐이다. 그러나 이 환상들을 단념

할 때 우리는 진정한 연민을 품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아갈 수 잇다. 침묵속에서 환상은 마침내 소멸되어버린다. 그러나 그 환상들이 좀더

나쁜 형태로 변하여, 우리의 고독을 빛의 천사로 변장한 악마로 채워버린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만은 노력을 해야 한다.

사랑, 소박함, 연민은 우리를 이런 것들로 부터 보호해 준다.

진정으로 홀로 있는 사람은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는 연민을 자기 자신속에서 발견한다.

 

사랑과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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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진다' 는 표현은 운명적이거나 그렇지 않은 어떤 예기치 않은 재난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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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다름아닌 이러한 영적교류와 자기 초월을 위한 거이다. 우리는 사랑 안에서 서로에게 자기 자신을 내어줄 때

까지는 완전히 인간이 되었다고 할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성적인 충족에만 한정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사람의 모든 것을 포함한다.

자기를 주고 함께 나누고, 창조하고 서로 아껴주고, 영적으로 관심을 가져 줄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하는 것이다.

사랑은 우리의 참된 운명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만으로는 인생의 의미를 찾아내지 못한다. 다른 사람과 함께라야만 그것을 찾을 수 있다.

우리 자신의 고독한 명상에 의한 연구와 숙고만으로는 우리의 삶의 비밀을 발견하지 못한다. 삶의 의미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에 의해서

사랑안에서우리에게 드러내는 비밀이다. 만일 이 사랑이 존재하지 않으면 비밀은 발견되지 않을 것이고 신의 계시도 이해 될수 없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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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사랑을 거래처럼 생각한다. 그 거래는 우리 모두가 교환 수단에 의해 충족되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있다는 것을 전재로 한다.

거래를 하기 위해서 당신은 가치있는 물건을 가지고 시장으로 가야 하며 만약 그물건이 가치가 없으면 그것을 보기 좋은 포장지로 옷을

입혀야 성공할 수 잇을 것이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우리 자신을 시장에 나온 판매용 물건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팔리기를 원한다.

우리는 손님들의 마음에 들고 싶어한다. 우리는 값이 많이 나가는 물건처럼 보이기를 원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풍부한 시장 사회가

제시하는 상을 본따 우리 자신을 만드는 데 많은 시간을 소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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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랑으로서 우리 자신을 내어주지는 않고 자신의 물건의 가치를 높여 거래를 하며 따라서 거래는 끝나지 않는다. 우리의 눈은

이미 다음 거래에 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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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필요'를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지는 거래라고 여기는 사람은 누구나 순전히 양으로� 따지는 윤리에 빠질 위험이 있다.

사랑이 거래라면 가능한 한 많은 거래를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사람이 '필요'와 '성취'에 의거하여 사랑에 접근하면 그 순간부터 사랑은 거래가 되고 만다. 설상가상으로 우리는 끊임없이 불가능한 이상

을 성취하려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우리가 했던 거래에 대한 평가를 수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그거을 버리고 더만족스

러운 누군가와 '더 나은' 거래를 하지 않을 수 없다.

 

...

사랑은 결핍이고 공허이며 무가치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채워질 수 있는 공허이다. 우리가 큰소리로 오랫동안 가장 효과적인 방법

으로 외치면 사람들은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광고는 요람에서 부터 시작된다. 심리학자드은 우리의 시장사회가 가

지고 있는 사랑의 미숙함과 나르시시즘에 대하여 소박한 견해를 피력한 바있다. 시장사회에서 사랑은 즉각적인 만족을 요구하거나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다소 교활학 다른 사람을 속이는 완전히 자기 중심적인 욕구가 되어 버린다. 그러나 사랑은 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한 진실이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늘 당신이 원하는 것을 갖고, 늘 만족하고 늘 성취하겠다는 고집

은 사랑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당신은 모든 것을 '받기'만 하는 요람을 뛰어 넘어, 댓가로 특별한 어떤 것을 받는

다는 생각없이 아주 성숙한 단계로 성장해야 한다. 사랑은 거래가 아니라 희생이다. 사랑은 매매가 아니다.  그것은 예배의 한 형태이다.

 

사실상 사랑은 실재적인 힘이며 초월적. 영적인 힘이다. 실제로 그것은 인간 본성중 가장 깊이 내재한 창조적 힘이다. 생물학적으로

풍부한 우리의 유전질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사랑은 다른 사람과의 완전한 만남 속에서 삶에 대한 창조적 반응과 자유라는 영적인 꽃

을 피운다. 사랑은 삶의 가치이며 선물이라는 것을 생생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사랑은 충문하고 다양하고 풍요로운 삶의 경험을 준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삶의 내적인 신비를 알게 한다. 그것은 삶을 무진장한 행운으로 느끼게 한다.  지식은 이러한 행운을 결코 알아보지

못하나 사랑은 그것을 알아본다.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의 신비안에서 삶의 내적깊이를 탐구하는 자체의 지혜와, 자체의 과학과, 자체의 방법을 가지고 있다.

삶이 감격과 자유로움과 순종으로써 응답하는 한 사랑은 삶의 요구들을 알고, 이해하고 만족시켜준다.

사람들이 진실로 사랑을 하게 되면 말상대와 위로를 구하기 위해 서로를 필요로 했던 것, 그 이상의 것을 경험한다. 상호간에 관계를 맺음

으로써 그들은 다른 사람이 된다. 그들은 일상의 자기 자신을 넘어서서, 더 생기있고, 더 이해할 줄 알고, 더 참을 줄 알고, 또한 분명히

더 많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 된다. 그들은 새로운 존재가 된다.

 

...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지 않을 때보다 더 생기있고 진실하게 된다.

그것이 아마도 사랑이 위험스러워 ㅈ보이는 이유들 중 하나 일것이다.

사랑하는 이는 자신 속에서 너무나 많은 새로운 힘과 통찰력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삶을 완전히 달리보게 되고 그의 모든 가치기준은

변화한다.

..

순수한 사랑의 힘은 아주 깊고 아주 강하기 때문에 아무리 어리석은 그릇된 생각에 의해서도 그것의 참된 목표에서 빗나가지 않는다.

사랑이 한 인간안에서 살아있고 또 성숙해 있으면 그가 자기 자신이나 인생에 대해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잇는지의 여부는 중요한 문

제가 아니다. 사랑은 그자체가 지닌 내적인 진실에 따라 그를 인도해 갈것이며 자신도 모르게 그의 생각을 바로 잡아 줄것이다.

그것은 위험스러울지 모르지만 그러한 위험은 전해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인류는 100만 여년 동안이나 그러한 위험과 함께 살아왔다.

문제는 바로 우리의 잘못된 견해가 사랑이 우리의 삶에서 커가고 성숙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을 하면, 사랑은 우리의 생각을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잘못된 생각은 사랑을 저지할 수도 있다.필요와 충족의 측면에

대한 지나친 강조와 자의식적이고 쾌락에 대한 자기도취적인 집착을 북돋우는 강박관념등은 사랑의 성장을 쉽사리 꺾어버리거나 그르

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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