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에게 짜이 한 잔을 건네며 날마다 그곳에 오는 이유를 물었다. 뜨거운 유리잔을 때묻은 손으로 감싸고서 남자는 턱으로 찻집 안을 가리켜 보았다. 처음에는 그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가늠할 수 없았다. 내가 어리둥절해 하자 그는 손가락으로 찻집 안 맞은 편 벽을 가리켰다. 그제야 나는 그곳에 걸린 그림을 보게 되었다.
작은 액자에 담긴 그림이었다. 여러번 그곳을 들른 나도 눈여겨본 적 없는, 찻집 주인의 동생이 그린 평범한 작품이었다. 가느다란 선에 옅은 푸른색과 갈색물감을 번지도록 칠한 그림속에서 사리를 입은 여인이 두 팔로 갓난 아이를 공중에 들어 올리며 사랑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림을 응시하는 남자의 눈에 물기가 어려 있었다. 초점없는 눈처럼 보였던 것은 그 물기 때문이었다.
짜이를 마실 생각도 하지 않고 남자는 자신에게도 그림 속여인 같은 아내와 아이가 잇엇다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가 과거형으로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아내와 아이가 일 년전 자동차 사고로 죽은 것이다. 충격을 받은 그는 떠돌며 살아갔고 그러다가 우연히 찻집에 걸린 물기 맺힌 눈으로 바라보게된 것이다. 자신의 아내가 아이를 공중으로 들어올리며 행복하게 쳐다보는 모습을....
살아 있는 것은 아프다. 고통은 한계를 넘을 때 스스로 치유제가 된다고 하는데, 그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어쩌면 우리는 신의 존재를 믿는 것이 아니라 다만 신에게 의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듬해 다시 갔을 때는 며칠을 기다려도 남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앗다. 찻집 형제와 단골손님들에게 물어도 행방을 모른다는 대답뿐이었다. 그 그림만 변함없이 벽에 걸려 있었다.
내 인도인 친구 산자이가 즐겨 부르는 영화 주제곡에 이런 가사가 있다.
"두니아 메 키트나 감 헤. 메라 감 키트나 캄 헤."
'세상에 슬픔은 얼마나 많은가. 내 슬픔은 얼마나 작은가'라는 뜻이다. 다른 사람들의 슬픔을 알고 나면 나의 슬픔이 작게 느껴진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곡식의 여신 데메테르는 딸 페르세포네가 지하의 신에게 납치당하자 상심한 나머지 곡물을 자라게 하는 임무를 더 이상 수행하지 않고 울기만 한다. 그래서 온대지에 기근이 펴진다. 인도의 신화의 라마 신도 아내와 헤어지자 견디지 못하고 오열한다.
이 세상 누구도, 신들조차 슬픔과 고난으로 부터 자유롭지 않음을 알 때 우리는 자신의 행복과 불행에 크게 동요되지 않을 수 있다. 그렇지 ㅇ낳으면 태풍이 멈췄는데도 계속 흔들리는 나무 처럼 된ㄴ다.
속속들이 알기 전에는 모두가 평화로워 보인다. 수피즘(이슬람신비주의)의 우화가 있다. 한 남자가 매일 밤 신에게 기도했다.
"저의 부탁을 한 가지만 들어주세요. 저보다 불행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누구의 삶도 저보다 나을거예요. 저는 축복을 바라지 않습니다. 단 한번만이라도 저의 인생을 다른 사람의 인생과 바꿀 기회를 주세요. 이것이 지나친 부탁인가요?"
남자가 밤마다 큰소리로 외쳤기 때문에 신은 평화로울수가 없었다. 마침내 하늘에서 큰 음성이 모든 사람에게 말했다.
"그대들 각자가 겪은 불행한 일들을 보자기에 써서 사원 마당으로 가지고 오라."
잠이 깬 사람들은 자신의 불행한 일들을 보자기에 싸기 시작했다. 남자는 매우 기뻤다.
'이제 드디어 다른 삶을 선택할 기회가 왔군!"
그는 자신의 보자기를 들고 서둘러 사원으로 향했다. 다른 사람들도 보자기를 들고 달려가고 있었다. 사원이 가까워질 수록 남자는 겁이 났다. 사람들이 그의 것보다 더 큰 보자기를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웃던 사람들, 좋은 옷을 입고 항상 밝은 얘기만 하던 사람들이 더 큰 보자기를 어깨에 지고 가고 있었다.남자는 망설였지만 평생 기도했기 때문에 사원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하늘의 음성이 말했다.
"그대들의 보자기를 모두 펼쳐 놓으라."
모두가 보자기를 펼쳐놓자 그 음성이 다시 말했다.
"이제 서로의 내용물들을 살펴보고 각자 원하는 보자기를 선택하라."
다른 사람의 불행한 일들을 알게 되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모두가 자신의 보자기를 향해 달려간 것이다.
이 남자 역시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불행을 고를까봐 서둘러 자신의 보자기를 향해 뛰어갔다. 다른 사람의 삶에 어떤 큰 고통이 있는 지 알수 없으며 , 적어도 자신의 불행에는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후 남자는 불평하는 기도를 멈췄다.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삶을 여정에서 막힌 길은 하나의 계시이다. 만약 우리가 전체 이야기를 안다면, 지금의 막힌 길이 언젠가는 선물이 되어 돌아오리라는 것을 알게 될까?
길이 막히는 것은 내면에서 그 길을 진정으로 원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삶이 때로 우리의 계획과는 다른 길로 우리를 데려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길이 우리 가슴이 원하는 길이다. 머리로는 이 방식을 이해할 수 없으나 가슴은 안다.
이 문제 많은 세상을
인내심을 가지고 걸으라.
중요한 보물을 발견하게 되리니,
그대의 집이 작아도, 그 안을 들여다 보라
보이지 않는 세계의 비밀들을 찾게 되린.
나는 물었다.
'왜 나에게 이것밖에 주지 않는거죠?'
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이것만이 너를 저것으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 페르시아의 시인 잘랄루딘 루미
우리는 신에게 , 삶에게 묻곤 한다. '왜 나에게는 이것밖에 주지 않는거지?' 그러나 보이지 않는 목소리가 답한다. '이것만이 너를 네가 원하는 것에게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 그 속삭임을 듣지 못할 때 우리는 세상과의 내적인 논쟁에 시간을 허비한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여행을 이해하지 못하는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스스로가 자신의 여행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자신이 결코 팔을 갖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새의 몸에서 날개가 돋아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우리는 자신을 무조건 사랑해 줄 누군가를 갈구한다. '넌 불완전해, 언제까지나 불완전할 수밖에 없어. 하지만 넌 아름다우.'라고 말해줄 살마을.하지만 만약 그 눈군가가 자기 자신안에 있다면 더없이 기쁠 것이다. 이 말은 얼마나 좋은 말인가! 불완전한 사람도 완벽한 장미를 선물할 수 있다는 것.
'매장'과 '파종'의 차이는 있다고 믿는다. 생의 한때에 자신이 캄캄한 암흑속에 매장되었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다. 어둠 속을 전력질주해도 빛이 보이지 않을때가. 그러나사실 그때 우리는 어둠의 층에 매장된 것이 아니라 파종된 것이다.
청각과 후각을 키우고 저 밑바닥으로 뿌리를 내려 계절이 되었을 때 꽃을 피우고 삶에 열릴 수 있도록, 세상이 자신을 매장시킨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을 파종으로 바꾸는 것은 우리자신이다. 매장이 아닌 파종을 받아들인다면 불행은 이야기의 끝이 아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좋아하고 그 사람과 함께 있고 싶어지는 이유는 단순히 그사람이 좋아서만이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나 자신이 좋아지고 가장 나다워지기 때문이다. 또 누군가를 멀리하고 기피하는 이유는 그사람과 함께 있을 때 나 자신이 싫어지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그런 행운을 가졌는가? 누군가가 당신에게 "나는 너와 함께 있을 때의 내가 가장 좋아" 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떤 사람을 만날 때 마음이 열리는 순간이 있다. 나의 감각과 느낌, 혹은 삶에서 경험하는 기쁨이나 두려움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사람과는 나눌 수 있을 것만 같다. 그 자발적인 열림이 폭풍에 길 잃은 새 같던 우리를 연결시켜 주며, 그때 세상과의 거리도 가까워진다. 삶이라는 여행의 한 구간을 그런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은 행운이다.
심리학자 밀턴 에릭슨이 대학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책을 팔러 다닐 때의 일이다. 하루는 농가에 가서 어느 농부에게 책을 권하자 농부는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난 아무것도 읽지 않고, 아무것도 읽을 필요가 없어. 난 단지 우리 돼지들한테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에릭슨은 "열심히 돼지를 먹이시는 동안 잠깐 옆에 서서 말씀 나눠도 될까요.?"하고 묻고는 책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무심결에 땅바닥에서 납작한 돌멩이 하나를 주워 돼지 등을 긁어주었다. 에릭슨 자신도 어린 시절을 농장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그러자 농부가 하던일을 멈추고 말했다.
"자네는 돼지를 좋아하는군. 돼지들이 원하는 대로 등을 긁어줄 줄 아는 사람이라면 나도 그 사람에 대해 알고 싶네!. 오늘 저녁은 나와 함께 먹고 우리 집에서 공짜로 하룻밤 묵고 가면 어떻겠나? 책은 내가 사주겠네."
농부의 마음이 에릭슨의 무의식적인 행동에 반응한 것이다. 사실 우리는 날마다 본성 차원에서 타인과 접촉하고 있다. 우리마음을 둘러싼 장벽이 그 접촉을 가로막은 것처럼 느낄지라도, 우리는 늘 그 순수한 차원을 품은 채 타인을 만나고 서로를 알아차린다.
미국 시인 마야 안젤루는 썼다.
"사람들은 당신이 한 말과 당신이 한 행동을 잊지만 당신이 그들에게 어떻게 느끼게 했는가는 잊지 않는다."
나 자신이 실제로 누구인가는 감추거나 꾸미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부지불식간에 그것을 드러내며, 내가 주장하는 사상이나 철학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행동이 나에 대해 가장 잘 말해준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을 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고 어떤 사람인가? 그것이 가장 진실된 나의 모습에 가깝다.
어느 작가가 영국의 시골마을을 여행하다가 그 지역의 나이든 농부들과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노인들은 열사람의 농부가 쟁기질을 한 넓은 밭을 둘러보면서 누가 어느구역을 쟁기질했는지 정확히 알아맞혔다. 조금씩 다르게 쟁기질한다고 해서 수확량이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왜 그 점을 중요히 여기느냐고 묻자, 농부들으 돈 때문이 아니라 이랑의 모습이 그 사람 자신과 마찬가지 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작가는 그 말의 의미를 단순히 밭이 아닌 삶에 대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신은 우리의 말을 들음으로써가 아니라 행위를 바라봄으로써 우리를 신뢰한다. 내가 설명하지 않는 것을 내 삶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에서는 '코람 데오'를 이야기한다. 즉 '신 앞에 선 단독자인 너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이다. 신앞에서는 어떤 가면으로도 본연의 모습을 숨길 수 없기 때문이다.
어느날 코끼리와 개미가 숨바꼭질 놀이를 했다. 처음에는 개미가 술래가 되어 코끼리가 숨었는데, 몸집이 커서 금방 발각되었다. 이번에는 코끼리가 술래가 되자 개미는 코끼리가 들어올 수 없게 작은 사원 안으로 들어가 숨었다. 하지만 코끼리는 쉽게 개미가 숨은 곳을 찾아낼 수 있었다. 개미가 평소의 행동대로 신발을 벗어놓고 사원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탁닛한은 [화해]에서 내면 아이 치유를 이야기한다. "우리 내면에는 여리고 아픈 아이가 한 명씩 있다. 우리 모두는 어린 시절에 힘든 시간을 보냈으며, 아픈 경험이 만져질 때마다 그 감정과 기억들을 무의식 깊은 곳으로 밀어넣는다. 수십년 동안 이 아이를 바라보지 않는다. 그러나 모른척한다고 내면아이가 그곳에 없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그곳에 있으면서 우리의 관심을 받고 싶어한다. 아이는 속삭인다. '나 여기에 있어. 나를 피하지 말아줘.'우리는 그 아이를 내면 깊숙이 밀어넣고 최대한 멀리 떨어짐으로써 고통을 끝내고 싶어한다.ㅎ ㅏ지만 그것은 고통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아픔의 시간을 길어지게 할 뿐이다. 아이를 찾으러 먼 과거로 갈 필요가 없다. 우리안을 깊이 들여다보기만 하면 그 아이를 만날 수 있다. 상처받은 아이의 고통이 지금 이순간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
한 아버지가 아들의 방문을 두드리며 소리친다.
"어서 일어나!"
아들이 문도 열지 않고 말한다.
"일어나기 싫어요. 아빠."
아버지가 다시 소리친다.
"얼른 일어나! 학교가야지."
"가고싶지 않아요."
"왜 가고 싶지 않다는 거니?"
아들은 말한다.
"세가지 이유때문이에요. 첫째, 학교가 너무 재미없어요, 둘째, 아이들이 나를 괴롭혀요. 셋째, 학교가 너무 싫어요."
아버지가 말한다.
"네가 학교를 가야만 한는 세 가지 이유를 말해주지.
첫째, 학교에 가는 것이 너의 의무이기 때문이야. 둘째, 아이들이 너를 괴롭힌 건 오래전일이야. 넌 지금 쉰두살이야. 그리고 셋째, 넌 학교 교장이야. 어서 일어나! 장난감 그만 갖고 놀고."
쉰 두살이 되어도, 학교교장이 되어도, 상처받은 내면 아이는 그곳에 있다.
탁닛한의 말이 이어진다.
"상처받은 아이를 처음 발견했을 때, 우리가 할 일은 그 아이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하는 일이다. 그것이 전부이다. 어쩌면 아이가 슬퍼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느껴지면 호흡을 하면서 '네 안에 슬픔이 있는 것을 알아. 그동안은 내가 바쁘게만 살아왔어. 하지만 이제는 내가 너를 안아줄게.' 하고 말한다. 감정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잘 보살피는 것이다. 상처받은 아이를 알아보고 부드럽게 안아주는 것은 아픔을 덜어준다. 다루기 힘든 감정은 여전히 남겠지만 , 아픔은 훨씬 가벼워질 것이다."
티베트 우화에 이런이야기가 있다.히말라야의 어느 골짜기에 수달이 사는 호수가 있다. 달 밝은 밤이면 수달이 물속에서 물고기를 잡아 수면으로 헤엄쳐 올라온다. 그러면 호숫가 나무위를 배회하던 올빼미가 재빨리 내려와 수달의 손에서 물고기를 낚아챈다.
얼핏보면 올빼미가 수달의 먹이를 빼앗는 것 같다. 하지만 조금만 관찰해보면 수달이 자발적으로 물고기를 내주는 것임을 알수 있다. 다음날 밤이 되면 수달은 어김없이 물고기를 잡아 물 위로 떠오르고 , 나무에서 기다리던 올빼미가 또다시 날아 내려와 낚아채 간다.
둘의 관계에서 수달이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보인다. 그냥 끝없이 자기를 희생하며 올빼미에게 물고기를 잡아다 바칠 분이다. 올빼미는 수고하지 않고도 매일 밤 맛있는 식사를 즐기지만, 수달은 좀처럼 긴장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올빼미 때문에 하루도 마음편한 날없이 매일 밤 물고기를 잡기 위해 분투해야만 한다. 자신은 굶더라도 올빼미를 배불리 먹여야 하는 것이다. 수달이 조금만 늦어도 올빼미는 배고프다고 소리를 지르고 , 수달은 올빼미의 감정에 동화되어 어쩔 줄 몰라 하며 연신 자맥질을 한다.
아무리 봐도 이 관계는 매우 불균형적이고 불공평해 보인다. 올배미의 요구를 계속 충족시켜 주면서도 수달은 심리적 만족조차 얻지 못한다. 오히려 올빼미가 자기를 떠날까봐 불안해하며 넓은 호수를 외면하고 나무 주위를 떠나지 않는다. 그럴수록 올빼미는 더 당당하고 당연하게 수달의 노고를 가로챈다.
자신도 뚜렷한 이유를 모르는 상태에서 수달은 언제까지나 올빼미의 육체적 정신적 노예가 되어 갈수록 덩치가 커져가는 올빼미를 위해 더 많은은 물고기를 찾아 헤맨다. 올빼미는 거꾸로 불만과 요구가 늘어만 간다.
수달이 약하고 올빼미가 강하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실제로 수달은 야행성이라서 밤에 매우 강하며, 물새의 발을 물고 물속으로 끌고 들어가 잡아먹기도 한다. 올뻬미가 추격할 수 없는 깊이로 얼마든지 잠수할 수도 잇다.
그러나 수달은 올빼미 소리가 들리면 최면에 걸린 듯 자신도 모르게 복종한다.
이 수달과 올빼미의 관계를 티베트어로 '렌착'이라 부른다. '렌착'은 간단히 말해 '전생의 빚'을 의미한다. 전생이나 전전생에 수달이 올빼미에게 빚을 졌기 때문에 이번생에서 갚는중이라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누군가에게 돈을 빌리고 갚지 않거나 강제로 혹은 속임수를 써서 금품을 빼앗았다면, 일 년후든 십 년 후든 그 사람의 이름을 들으면 당신은 자동적으로 죄책감가 부채감을 느낄 것이다. 마찬가지로 전생에 그런 행위를 저지른 경우에 이번 생에서 구체적으로 기억하지는 못할 지라도 죄책감과 부채감때문에 무의식적으로 끌려가게 된다는 것이 렌착이다.
과거에 티베트인들은 심심풀이 삼아 도박을 즐겼는데, 돈이 없기 때문에 작은 조약돌을 가지고 내기를 했다. 이 때 조약돌 몇 개라도 빚을 지고 갚지않으면 다음 생에 그 사람의 종이 되어 몇배로 갚게 된다고 그들은 믿었다. 렌착은 그런 인생관이 낳은 해석이다.
논리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일을 전생의 인과관계로 돌리는 것이다.
한편으로 티베트 불교의 스승들은 과거의 행위보다 지금 이 순간 쌓는 업에 깨어 있으라고 가르친다. 수달과 올빼미의 에너지 흐름은 양쪽 모두에게 해로울 수 있다. 수달의 애착은 기쁨도 보상도 없는 자기희생에 불과하며, 올빼미의 만족할 줄 모르는 착취는 돌이킬 수 없는 영적 타락으로 이어진다.
둘다 모두 어떤 긍정적인 것도 얻을 수가 없다. 의무감에 매달리느라 수달은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산 적이 없다. 전생의 빚이 원인이라 해도, 이번 생의 불건강한 관계는 다음 생의 또 다른 불행한 관계로 악순환될 수 밖에 없다.
인간관계에도 가지치기가 필요하다. 훌륭한 정원사는 어느가지가 나무에 유익하고, 어느 가지가 단지 자양분을 빼앗을 뿐인지 구분할 줄 안다. 가지치기 안 된 나무가 과수원을 망가뜨리듯 정리되지 않은 관계는 인생을 고갈시키고 불만족과 고통의 원인이 된다. 고통은 우리를 떠나는 것들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을 떠나보내지 못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관계의 가지치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올빼미가 없으면 수달은 넓은 호수를 헤엄치며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 수달이 없으면 올빼미는 충분히 맹금류로 살아갈 수 있다. 수달의 삶은 수달의 삶이고, 올빼미의 인생은 올빼미의 인생이다. 이 단순한 자각이 불건강한 관계를 끊는 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가 렌착인지 진정한 애정인지 알아차려야 한다. 그 기준은 이것이다.
'관계가 순수한 기쁨을 주는가? 서로에 대한 존중과 존경이 자리하고 있는가? 자기희생이 서로에게 긍정적인 결과와 성장을 가져다 주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관계와 작별하는 것은 잘못이거나 이기적인 일이 아니다. 전생의 빚을 갚는 중이라고 스스로 최면을 거는 수달로 살아갈 이유가 없다. 전생이라는 것도 마음이 지어낸 환영에 불과하다고 태베트 불교스승들은 말한다.
중독적인 관계나 렌착은 상대방의 불완전함과 연약함을 받아들이고 연민심을 갖는 것과는 다르다. 아픔을 공감하고 연민을 느끼는 것은 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진실하고 건강한 관계를 맺는 것은 그것보다 더 소중하다.
렌착을 끊는 또 하나의 기준은 이것이다.
'나는 내 삶의 중요한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질 능력이 있다고 믿는가?"
이 우화의 결말은 당신이 써보길 바란다.
"어느날 , 수달은 깨달았다...
한번은 누군가가 태국의 아잔 차 스님에게 물었다.
"이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변화하여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이별과 상실은 우리 존재에 내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행복이 있을 수 있습니까? 어떤 것도 우리가 원하는 대로 고정되어 있지 않은데 어떻게 안전할 수 있습니까?"
아잔차는 따뜻한 눈으로 그 사람을 바라보고 나서 탁자 옆에 놓인 유리잔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나는 이 유리잔을 좋아한다. 이 유리잔으로 물을 마신다. 이 유리잔은 놀라울 만큼 훌륭하게 물을 담고 있으며 햇빛을 아름답게 반사한다.두드리면 맑고 투명한 소리를 낸다. 그러나 나에게 유리잔은 이미 깨진 것과 같다. 언젠가는 반드시 깨질 것이기 때문이다. 선반에 올려놓았는데 바람이 불어 넘어지거나 내 팔꿈치에 맞아 탁자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면 유리잔은 산산조각이 난다.
나는 그것을 당연한 일이라고 여긴다. 이 유리잔의 속성안에 '필연적인 깨어짐'이 담겨있다. 그것은 우리가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 유리잔이 이미 깨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임을 이해할 때, 그것과 함께 하는 모든 순간이 소중해진다. 그것과 함께 하는 모든 순간이 행복하다.
그 유리잔처럼 나의 육체도, 내 연인의 육체도 이미 부서진것과 마찬가지임을 알 때 삶의 매 순간이 소중해진다. 소중함과 가치가 두려움과 슬픔보다 앞선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상'은 '덧없고 영원하지 않으니 집착하지 말라.'는 의미만이 아니라 '영원하지 않음을 깨달음으로써 지금 이순간 속에 있는 것을 소중히 여기라.'는 뜻이다. '영원하지 않음'을 우리가 통제하려고 하지 않을 때 마음은 평화롭다.
어느명상센터에서는 이렇게 기도한다.
'내가 가능한 한 사랑과 연민의 마음을 갖기를. 만약 내가 이 순간에 사랑과 연민의 마음을 가질 수 없다면 친절하기를. 만약 내가 친절할 수 없다면 판단하지 않기를. 만약 내가 판단하지 않을수 없다면 해를 끼치지 않기를. 그리고 만약 내가 해를 끼치지 않을 수 없다면 가능한 한 최소한의 해를 끼치기를.'
소설가 보르헤스는 썼다.
"우리 삶을 스쳐 지나가는 모든 이들은 각각 특별한 존재이다. 누구든 항상 그의 무언가를 남기고 또 우리의 무언가를 가져간다. 많은 것을 남긴 사람도 적은 것을 남긴 사람도 있지만 , 무엇도 남기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은 없다. 이것은 누구든 단순한 우연에 의해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분명한 증거이다. "
어딘가에 나에게 정해진 섭리나 계획이 있고 그것을 일깨우기 위해 적절한 시기에 사람들이 내 앞에 나타난다고 나는 믿는다.
지금의 내 삶에 그 관계가 필요하기 대문에 그들은 온다. 사람들은 이유가 있어서 우리 삶에 나타나고 때가되면 우리는 그 이유를 알게된다. 이것이 진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의 나는 내게 길을 가르쳐준 모든 만남과 부딪침의 결과물이다. 누구도 내가 걷는 길을 무작위로 교차하지 않는다.
여기 인생의 만남에 관한 작자 미상의 글이 있다.
"당신의 삶에 나타나는 사람들은 어떤 이유가 있어서 오는 사람, 한 계절에만 등장하는 사람, 혹은 평생동안 만남을 갖는 사람이 있다. 그중 어디에 속하는지 알면, 저마다의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 지 알게 될 것이다.
어떤 이유가 있어 당신의 삶에 온 경우, 그들은 대개 당신이 드러내 보인 필요를 충족해 주기 위해 온다. 당신이 고난을 통과하도록 돕고, 길을 안내하고, 지지해주려고 온다.
물질적으로 정서적을 혹은 영적으로 당신을 도우려고 온다. 그들은 신이 보낸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며, 실제로도 그렇다. 그들은 당신이그들을 필요로 하는 그 이유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그들은 당신 잘못이 전혀 없는데도, 혹은 좋지 않은 시기에, 관계를 끝낼 것 같은 말이나 행동을 하기도 한다. 때로는 죽거나 어디론가 떠나 버리기도 한다.
때로는 과격한 행동을 해서 당신이 분명한 결단을 내리게 만든다. 이때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의 필요가 충족되었다는 것, 우리가 바라던 것이 채워졌다는 것, 그래서 그들의 역할이 끝났다는 사실이다. 당신이 올려 보낸 기도는 응답받았으며 , 이제는 앞으로 나아갈 때가 온 것이다.
한계절 동안만 당신 삶에 들어오는 살마도 있다. 그것은 당신이 나누고, 성장하고, 배우는 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들은 당신에게 평화로운 시간을 가져다주고 당신을 웃게 할 것이다. 당신이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일을 가르쳐 줄지도 모른다. 그들은 대개 믿을 수 없을 만큼의 기쁨을 당신에게 준다. 이것을 믿으라. 이것은 사실이다. 다만 한계절 동안만.
모든 일은 이유가 있기 때문에 일어나며, 모든 만남에는 의미가 있다. 누구도 우리의 삶에 우연히 나타나지 않는다. 누군가는 내 삶에 왔다가 금방 떠나고 누군가는 오래 곁에 머물지만, 그들 모두 내 가슴에 크고 작은 자국을 남겨 나는 어느덧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당신이 내 삶에 나타나 준 것에 감사한다. 그것이 이유가 있는 만남이든, 한 계절 동안의 만남이든, 생애를 관총하는 만남이든.
스승은 말했다.
"나무에 대해서든 사람에 대해서든 한 계절의 모습으로 전채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나무와 사람은 모든 계절을 겪은 후에야 결실을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힘든 계절만으로 인생을 판단해선 안된다. 한계절의 고통으로 나머지 계절들이 가져다줄 기쁨을 파괴하지 말아야 한다. 겨울만 겪어보고 포기하면 봄의 약속도 여름의 아름다움도, 가을의 결실도 놓칠 것이다. "-작자미상의 이야기
힌디어에 '킬레가 또 데켕게'라는 격언이 있다. '꽃이피면 알게 될 것이다.When it flowers, we will see'.라는 뜻이다. 지금은 나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고 설명할 길이 없어도 언젠가 내가 꽃을 피우면 사람들이 그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자신의 현재 모습에 대해 자신이 통과하는 게절에 대해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시간이 흘러 결실을 맺으면 사람들은 자연히 알게 될 것이므로.
독일 시인 라이너 쿤체는 썼다.
꽃피어야만 하는 것은 꽃 핀다
자갈 비탈에서도 돌 틈에서도
어떤눈길 닿지 않아도
인내는 단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인내는 앞을 내다볼 줄 알고 살아가는 일이다. 가시를 보고 피어날 장미를 아는 것이고, 어둠을 보고 떠오르는 보름달을 아는 것이다.
세상을 한 번 둘러보라. 완벽한 곳은 없다. 또한 아무리 부정하거나 외면하려 해도 아름다운 것을 한 가지라도 발견할 수 없는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티유는 말한다.
"두사람이 있으면, 사물을 바라보는 두 가지 방식이 있게 된다. 60억의 사람이 있으면 60억개의 세상이 있다."
트라피스트회 신부 토머스 머튼은 [인간은 섬이아니다]에서 썼다
"인간은 다른 누군가와 소통할 수 없는 그 자신만의 비밀과 고독을 가지고 있기에 독립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를 독립적인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것들도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종종 사람들과 자신의 영혼을 모두 황폐하게 만든다 . 그것은 자신을 중심에 놓고 자기 삶의 방식에서 상대를 판단하기 때문이다. "
신이 배치해 둔 표식들에 귀를 기울이라. 그러면 길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가 찾는 것이 사실은 우리를 찾고 있다. 표식들을 발견하지 못하고 이미 길들을 지나쳐왔다면 잠시 뒤돌아보라. 당신이 여행한 어느골목, 어느 지점에선가 당신의 시선을 붙잡으려고 기다리던 어떤 표식이 떠오를지도 모른다. 당신의 삶을 변화시켰을지도 모를 우연히 넘긴 책의 한 구절이 , 삶이 당신에게 말을 걸어왔을 때가.
얼마전 델리에 사는 친구가 이야기 하나를 보내 주었다. 2차세계대전 때 많은 공을 세운 아난드라는 이름의 공군 비행대장이 있엇다. 적진까지 출격해 중요한 군사기지들을 파괴함으로써 적의 전쟁의지를 꺾어놓은 인물이었다. 한번은 적의포격에 격추되기도 했지만 무사히 낙하산을 펼쳐 탈출할 수 있었다.
제대 후에 고향으로 내려가 살았는데, 어느 날 카페에서 한 남자가 다가와 그에게 군대식으로 경례를 했다. 아난드는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미안해하며"전에 만난 적이 있던가요?"하고 물었다.
남자가 말했다.
"저는 비행대장님을 잘압니다. 제가 근무하던 부대에 함께 계셨습니다. 전투기가 격추되었을 때 대령님은 낙하산으 타고 안전하게 착륙하셨지요. 그날 낙하산을 접어 대령님 전투기에 설치한 담당 병사가 저였습니다. 무사생환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쁘고 자랑스러웠는지 모릅니다."
아난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를 와락 껴안았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그 남자에게 진심어린 감사의 말을 했다. 그의 전문적인 낙하산 접는 실력 덕분에 목숨을 구한 것이다. 만약 제대로 접혀있지 않았다면 제때 펼쳐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날밤 아난드는 잠을 이룰수 없었다. 같은 공군부대에 근무하면서 그 병사를 얼마나 많이 지나쳤겠는가. 하지만 그를 알아보지도 못햇고, 자신은 장교이고 그는 사병이었기 때문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낙하산을 접어주는 사람을 얼마나 인식하며 살아가는가? 우리가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지지해주고 , 기도해주며, 중요한 순간마다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온갖 종류의 낙하산을 접어주는 사람으 혹시 잊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우리는 다른 누군가를 위해 얼마나 낙하산을 접어주며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이 우리를 찾고 있다
내 시는 음악도 아니고 악기도 아니다
내 시는 나 자신이 부서지면서 내는 소리
모든 것 속에 당신이 있으나
그 어떤 것도 당신과 같지 않네
새들을 허공에 날아가게 하라
너의 새는 돌아 올 것이니
-
왜 붙잡으려고 하는가? 떠나는 것을 떠나게 하고, 끝나는 것을 끝이게 하라. 결국 너읙 ㅓㅅ이라면 언젠가는 네게 돌아올 것이니, 고통은 너를 떠나는 것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떠나 보내지 못하는 네 마음에 있다. 놓아버려야 할 것들을 계속 붙잡고 있는 마음에.
손금을 보려고 하지말라
손이 없는자에게도 행운이 찾아올지니
물방울의 기쁨은 바닷속으로 사라지는것
고통은 그 한계를 넘을 때 스스로 치료제가 되네
천개의 욕망 모두 목숨을 걸 가치가 있으니
그중 많은 것을 이루었으나 난 여전히 더 많은 걸 원하네
신이여 사람들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으녀 앞으로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에게 다른 가슴을 주시든지, 아니면 차라리 내가 다른 방식으로 말하게 하소서
나를 떠나면서 당신은 세상의 끝날에 우리가 만날 것이라고 말했다
-갈리브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속 양치기 청년도 여러번 '표식sign'이라는 말을 듣는 다. 늙은 왕은 그에게 말한다.
"표식에 주의를 기울이게."
목표에 이르게 하는 표식, 길을 안내하는 표식들이 곳곳에 있을 테니 잘 살피라고 노인은 존언한다.
"신은 인간들 각자가 따라가야 하는 길을 적어주셨어. 보물이 있는 곳에 도달하려면 그 표식들을 잘 따라가야해."
나는 그 표식을 '공개된비밀open secret'이라고 부른다. 모두에게 공개되어 있으나 아직 그것을 볼 수 없는 사람에게는 비밀인 채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신이 우리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방식이라고 나는 생각하낟. 사실 그것은 숨겨져 있지 않다. 단지. 우리가 현실속에서 불필요한 것들에 너무 많이 시선을 빼앗기고 있어서 못보고 지나치는 것일 뿐.
시인 루미는 말한다.
"그대가 사랑하는 것이 그대를 끌어당길 것이다. 그것을 말없이 따라가라.그대는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 "
신이 배치해둔 표식들에 귀를 기울이라. 그러면 길을 발견할 것이다. 나무에 새겨진 표시를 따라 방향을 정하듯, 불분명하게 뒤엉킨 삶의 미로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 일상속 어디에나, 타인과의 대화나 꿈속에도 삶을 방향을 가리키는 작은 표지판들이 있다. 모두가 발견하는 것은 아니다 . 우리가 찾는것이 사실은 우리를 찾고 잇다.
우연히 넘긴 책의 한 구절이, 삶이 당신에게 말을 걸어왔을 때가.
꽃들은 세상의 구경거리를 감상하는 법을 가르쳐주네
모든 색깔을 알아차리려면 눈을 뜨고 있어야 한다고.
갈리브는 썼다.
'번개는 나에게 쳤어야 한다."
--친정엄마에게 빌려드린 책이었다.
귀한 내용을 늦게 발견했다.
오늘은 책을 가져다 주는 날이었고 바빴다.
그러나 다행이 들여다 볼수 있었다.
좋은하루였다.
즐거운 책읽기였다.
류시화님의 책을 오늘도 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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