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에서 배우다

이사 가는 날

다림영 2014. 5. 17.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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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014.5.14

惺全 스님. 남해 염불암 주지

숲이 어느새 녹음으로 물들어 간다. 연둣빛 숲의 여린 그 빛을 물들어가는 녹음이 가리고 있다. 봄인가 싶었는데 숲은 어느덧 이른 여름을 말하고 있다. 숲은 무상함을 이렇게 색(色)으로 말한다. 하지만 밉지가 않다.

연둣빛 숲도, 녹음이 짙어져 가는 숲도 내게는 모두 정답고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것 하나에 고정되어 있으면 변화가 마땅치 않은 것이 되지만 그 어디에도 고정되어 있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모두 좋은 것이 된다. 그래서 분별심(分別心)을 버리고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이 행복의 조건이 된다고 우리 불가(佛家)에서는 말한다.

 

변화는 사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본질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원히 젊기를 바라고 부자이기를 바라고, 건강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것은 가능한 것이 아니다. 불가능한 것을 향해 가능해야 한다고 집착하는 것은 탐욕이다. 탐욕은 우리를 한지점에 멈추게 한다. 그 순간 우리는 자유를 잃게 된다.

 

탐욕이 낳은 사람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는 한 대상에 집착함으로써 세상의 모든 가치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하나도 얻지 못한 채 전부를 잃는 것이 탐욕의 셈법이다. 이 막대한 손실의 셈법을 탐욕이 많은 사람은 끝내 알지 못한다. 좋은 사람들과, 사소한 기쁨과 행복을 모두 잃어버리는 것이 그 셈법의 결과라는 것을.

 

이제 나는 또 이사를 간다. 이삿짐을 싸면서 나는 탐욕에 대해 생각했다. 물건 하나를 쌀 때마다 내 마음의 탐욕 숮자를 헤아리기 시작했다. 100번이 더 지나도 그 번호가 끝나지 않았다. 급기야 내 마음에 탐욕이 이렇게 많았나 하고 나도 놀랄 지경이 되었다.

 

안되겠다 싶어 짐을 하나씩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하나씩 버릴 때마다 숫자도 하나씩 줄여 나갔다. 얼마나 숫자를 줄여 나갈 수 있었을가. 많지 않았다. 하나를 버릴 때마다 머뭇거리게 되었고, 그러다 마침내 버리는 것을 포기하게 되었다. 이것도 버리면 나중에 필요할지 모르는데 하는 생각이 손을 잡아 묶었다. 탐욕의 끈질긴 유혹이었다.

 

선방(禪房)을 다닐 때 나의 짐은 그냥 걸망 하나를 조금 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때는 정말 짐이 없었다. 그리고 짐이 있어도 어디 둘 곳이 없었다. 입고 있는 옷과 걸망에 든 옷가지와 비품 정도가 전부였다.

 

필요하면 그때그때 샀고 남들이 입던 옷가지는 기쁘게 얻어입고는 했다. 삶이 참 단출했던 시절이었다. 그때 느낀 것이 있다.

소유가 적으면 마음이 참 가벼워진다는 것이었다. 그때 내 마음은 내일에 대한 걱정이 없었다. 내일은 그냥 내일 가서 만나는 오늘일 뿐이었다. 시간의 하중이 없었으므로 사는 것이 편하고 자유로웠다.

 

이후 몇 번 짐을 쌌다. 그때마다 자꾸만 늘어나는 짐과 만나게 되었다. 짐을 쌀 때마다 늘어나는 짐이 내 탐욕의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많은 짐이 과연 내게 꼭 필요한 것일까하고 물으면 내 안의 나는 그렇다고 답한다. 하지만 더 깊은 곳의 나는 필요치 않으니 버리라고 한다. 이렇게 이삿짐을 쌀 때마다 탐욕을 좇으려는 나탐욕을 버리려는 나사이에서 나는 갈등한다. 이번에 이삿짐을 싸면서도 이 갈등은 계속되고 있다. 어느 나를 따라야 하는가.

 

이제 나는 이사에 대해서 내 나름의 정의가 생겼다. 이사는 단순한 공간 이동이 아니라 마음의 이동이라는 것이다. 마음을 옮겨서 내 안에 있는 탐욕을 버리려는 나를 만나는 일이라고 나는 이사를 정의하게 되었다. 이사를 할 때마다 갈등을 겪지만 그것 역시 좋은 수행의 계기인 셈이다. 자꾸 이사를 다니다 보면 버리는 데 익숙해질 것이고, 그러면 다시 탐욕이 사라진 자리에서 삶의 자유와 기쁨을 만나게 될 것이다.

 

숲이 신록에서 녹음으로 이동하듯이 우리 역시 끊임없이 이동하며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존재하는 모든 것의 본질이다. 그리고 그 이동은 삶에서 다시 죽음으로 이어진다.

나는 삶에서 죽음으로 이사 가는 날을 자주 생각해 본다. 그때 나의 모습은 어떨까. 의연할까 아니면 두려워할까. 두려움에 떨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밀려온다.

 

 

탐욕의 무게만큼 두려움이 따라온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죽는 그 순간까지도 탐욕을 버리지 못한다면 삶은 볼품없는 졸작(拙作)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이제 나는 8년동안 머물던 용문사를 떠나 이사를 간다. 그 이사가 단순한 공간 이동에 그친다면 탐욕을 버릴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마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셈이다. 이사를 가면서 내 안에 뿌리 깊게 자리한 탐욕 하나를 버려야 진정한 이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작은 암자로 가니 탐욕의 크기도 작아져야 한다. 그것이 작은 암자로 이사 가는 자의 기쁨이 아니겠는가. 암자로 오르는 길, 새소리가 유난히 투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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