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에서 배우다

임진마창(臨陳磨槍)

다림영 2014. 5. 10. 19:56
728x90
반응형

조선일보 2014.4.30

정민의 世設新語

 

홍루몽적진과 마주해 창을 갈아봤자 아무 쓸데가 없다(臨陳磨槍,也不中用)’는 말이 나온다. 평소에 빈둥대며 놀다가 이제 막 전투가 시작되려는 참에 잠깐 , 창날 좀 갈고 싸우자!”고 외치는 꼴이란 말이다. 200년전 다산은 군기론(軍器論)’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각 고을에 보관된 군기(軍器)는 활을 들면 좀먹은 부스러기가 우수수 쏟아지고 , 화살을 들면 깃촉이 쑥쑥 빠진다. 칼을 봅으면 날은 칼집에 꽂힌채 칼자루만 쑥 뽑힌다. 총을 보면 녹이 슬어 총구가 아예 막혀 있다. 하루 아침에 환난이 있게 되면 온 나라가 모두 맨손인 셈이다.

 

고을살이를 나가 무기고를 점검해보니 말할 수 없이 한심했다. 활은 좀을 먹어 시위를 당기자 줄이 툭 귾어지고 화살은 그저 들고만 있어도 삭은 깃촉이 땅에 우수수 떨어진다. 칼은 칼집 속에 박혀 나올 생각이 아예 없다. 총구는 녹슬어 구멍이 꽉 막혀 버렸다. 갑작스러운 변고라도 잇게 되면 적수공권(赤手空券)으로 적과 싸울 수 밖에 없다. 군대의 일은 만에 하나 있을 변고에 대비하기 위함인데 지금 당장 일이 없다고 무사안일로 이리 방치하면 유사시에 어찌할 것인가?

 

다산이 200년 전에 한 염려가 오늘날 우리 사회를 관통하고 있다. 어디를 봐도 겉만 멀쩡했지 속은 곪을 대로 곪아 고름이 터지기 직전이다. 호들갑 떨며 대충 시늉뿐이고 잇속 챙기기만 바쁘다. 문제가 생기면 돈으로 입막음한다.

 

관행이었다고 둘러대다 우리만 그랬느냐고 강변한다. 문제를 덮은 뒤엔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시치미를 떼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다. 충격 상쇄용 기사를 만들어 국민의 관심을 딴 데로 돌리는 것이 국가 기관의 위기 대응 매뉴얼이었다니 할말이 없다.

 

성과 위주의 졸속과 한탕주의는 우리 사회 곳곳에 세균과 독버섯처럼 퍼져 있다. 일이 생기면 허둥지둥 우왕좌왕정신이 하나도 없다. 구명보트는 처음부터 펴질 수 없는 상태였다. 국가의 재난 대응시스템도 그 구명보트의 몰골과 엇비슷한 수준이었다.지금 우리가 더더욱 참담해진 이유다. 왜 늘 일이 벌어진 뒤에 뒷북만 치는가?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반응형

'신문에서 배우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몸살의 가르침  (0) 2014.05.23
이사 가는 날  (0) 2014.05.17
임진마창(臨陳磨槍)  (0) 2014.04.30
존댓말의 힘  (0) 2014.04.12
이 봄 벚꽃처럼 가끔은 시간을 어겨도 된다  (0) 2014.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