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에서 배우다

몸살의 가르침

다림영 2014. 5. 23.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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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47

一事一言

 

 

몸살을 앓았다. 분갈이 몸살이니, 이사몸살이니 또는 환절기 몸살이니 하는 고상한 몸살이 아니라 그럴 수만 있다면 이제 더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가혹한 몸살이었다. 머릿속의 생각과 기억이 다 타버릴 것 같은 고열과 몸살통(痛)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을, 아니 어쩌면 언표불능이라 해야 할 통증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리며 온종일 누워 있었다.

 

이미 몸살은 오래전부터 내 안에 자라고 있었다. 몸 곳곳에서 위험 신호를 감지 했고 심지어 수일 전에는 몸살 리허설을 하고서도 둔한 나는 멈추어 설 줄 몰랐다.

 

어디 이유 없는 무덤이 있겠는가. 고개를 넘기 위해서는 다소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화를 부른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과욕이 화근이다. 잠시 몸을 쉬게 하고 숨을 고르는 겸손이 필요했다.

 

몸살은 몸이 살자는 몸부림이다. 몸이 스스로를 살리기 위하여 고열과 통증을 무릎쓰고 내리는 극약처방이다. 마음만 믿고 그대로 방치했다가는 돌이키기에 너무 멀리 가버릴 것 같으므로 몸 스스로가 브레이크를 건 것이다. 열이나 통증은 무너진 균형을 바로잡으려는 몸부림의 부산물이다. 하루 동안의 가택연금은 한점의 에너지라도 허투루 쓰지 못하게 하려는 몸의 금계(禁戒)였. 몸의 집중이었다.

 

마음에는 몸이 지닌 본능적인 자동 제어장치가 없다. 예를 들어 팔씨름을 할 때 팔의 근육이 끊어질 때까지 힘을 쓰는 사람은 없다. 마음이 이제 힘 그만 쓰자고 타일러서 그렇게 되는 게 아니라 몸의 자동 제어장치가 저절로 발동해 그런 극한 상황까지는 가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은 다르다. 의식적으로 브레이크를 걸지 않는 한 갈 데까지 가는 게 마음이다. 대개는 극한 상황까지 가고 나서야 뭔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안다.

 

한계를 모른다는 것은 마음의 특권인 동시에 아킬레스건인 셈이다. 멈추어 설 줄 아는 지혜를 갖출 때 비로소 마음은 빛나는 물건이 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마음이 몸보다 고상한 대우를 받아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이거룡.선문대 통합의학대학원장(인도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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