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어느 바람부는 봄날에

다림영 2013. 4. 11.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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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니 하나가 없고 곱슬머리에 키가 좀 작은 남자가 들어왔다.

수줍게 웃으며 말하는 모양새가 아이처럼 순해보였다.

불현 듯 시집 한 권을 내밀더니 저는 권투선수라며 후원해 주는 이 없으니 이렇게 방문해서 시집을 판다는 것이다. 일 년에 책 한 권도 읽을까 말까 한다는 대한민국 국민성을 그는 얘기 못 들었나보다. 하고 많은 상품 중 시집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시인이라도 꿈꿨던 것일까. 아니면 그의 첫사랑이 시를 좋아하는 여자였을까. 나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마음 문이 활짝 열리고 말았다. 인터넷으로만 들여다보는 시 읽기가 왠지 싫어 시집 한 권이라도 사야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던 터였다. 어찌 이 마음을 알고 신은 내게 이런 분을 보내셨는지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아주 예의 바른 배꼽인사를 하며 앞으로 잘 지켜봐달라는 남자의 눈은 깊었다.

 

반찬거리 하나 들었다 놨다 하는 시절이다. 책을 사본지가 언제인지 기억이 희미하다. 덜컥 시집 한권을 사고 성급히 넘기는 페이지마다 마음으로 쑤욱 들어오는 시들이 가시밭 인생길을 안내한다.

 

오늘 내가 단돈 구천 원을 후원한 권투 선수가 성공하길 바라는 것은 욕심일 것이다. 낯선 길에서 꽃잎 같은 시가 담긴 시집을 팔며 그의 꿈이 이루어졌다는 소문을 기대하는 것은 헛된 꿈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바람 부는 어느 봄날, 팔을 궤고 먼 곳을 바라보며 동화 속 여자아이처럼 누군가에게 아득한 꿈같은 얘기를 마구마구 퍼뜨리는 그림을 그려본다. 그의 가난한 삶을 위로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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