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만권을 읽으면..

친절한 복희씨/박완서/문학과 지성사

다림영 2012. 11. 6.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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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얼마나 비싼 약이라고 여기까지 힘들게 온 노인 헛걸음을 시키고 그래요.”

비싸서 안 드린 게 아니라 위험하니까요.”

그러면서 약사가 내민 종이엔 낯익은 그의 삐뚤삐뚤한 왼손솜씨로 그린 정력제 비아그라그런 글씨들이 징그러운 벌레처럼 기어다니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없다고 말씀드렸는데도 구해달라고 부탁을 하시고는 자꾸 들르시는 거예요. 말씀은 어눌해도 말귀는 잘 알아들으시니까. 그 몸으로 그런 약 드시면 큰일 난다고 누누이 말씀 드렸죠. 그랬더니 오늘은 또 종이를 달래시더니 마누라가 그걸 너무 좋아하니 좀 봐달라시는 거예요. 그래서 할머니를 좀 뵙자고, 할머니한테 직접 드릴 수는 있다고 말씀 드렸죠. 연세 차이가 많이 나시는 것 같으니까 그 나름의 고충은 있으시겠지만 참으셔야지 어쩌겠어요. 정말 큰일 나는 수가 있거든요. 비타민 같은 걸 드릴 테니 그거라도 속이시는 것도 한 방법이지 싶은데요.”

 

나는 무슨 말이 더 나오기 전에 약국 앞을 황급히 벗어났다. 내딸보다 어린 약사의 능멸과 동정어린 시선의 기시권에서 벗어나려고 달음질쳐 우리집이 보이는 골목으로 꺾어들자 비로소 모닥불을 뒤집어쓴 것처럼 화끈한 치욕감이 온몸을 엄습한다.

이런 치욕보다는 차라리 분신의 고통이 견디기 쉬울 것 같았다.

죽이고 싶은 건지 죽고 싶은 건지 대상이 분명치 않은 살의가 극에 달한 채 집안으로 돌진했다. 그가 기대에 찬 시선으로 나를 맞이한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침까지 흘리고 있다. 안방으로 들어가 드르륵 소리 나게 서랍을 연다. 떨리는 손으로 철갑을 꺼내 안에 든 걸 확인한다. 까만 고약 같은 덩어리는 오래전에 말라비틀어진 채 갑 속 가득 충만해 있다. 그걸 주머니에 넣고 다시 현관문을 나서는데도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아마 돈을 안가지고 가서 다시 가지러 온 것쯤으로 착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와 나 사이의 착각은 바로 우리의 운명이다. 나는 더는 그 운명에 휘둘리지 않을 것이다. 약국을 피해 반대 방향으로 꼬부라져 큰길로 나가면 바로 지하철 정류장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 나는 정처없이 전철을 탄다. 무작정 타고 무작정 가는 동안에도 내 살의는 진정되지 않는다. 강변역이라는 소리가 죽고 싶다는 생각과 잘 맞아떨어진다.

 

다년간 위안 받은 고약덩어리지만 그 실효는 암만해도 믿기지 않는다. 아무래도 괜찮다. 더크게 더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을 테니까. 강변역 어디에서도 한강은 보이지 않지만 자꾸만 시퍼런 강물이 손짓하는 것 같아 목구멍에서 그르렁대는 소리가 난다. 한강물을 보기 전부터 물귀신의 끌어당기는 힘과 그걸 거부하려는 내 안의 힘을 팽팽하게 느낀다. 한강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도 한강이 안 보이는 길을 무작정 헤매기를 한동안, 드디어 진퇴양난, 한강 다리로 건널 수 밖에 없는 길로 접어든다.

 

어느새 날이 어두워 유유히 흐르는 강물 위로 수많은 한강 다리의 가지각색의 조명을 볼 수 있다. 세상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내가 죽기도 억울하고, 누굴 죽일 용기도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너 죽고 나 죽기를 선택한다. 나는 오랫동안 간직해온 죽음의 상자를 주머니에서 꺼내 검은 강을 향해 힘껏 던진다. 그 갑은 너무 작아서 허공에 어떤 선을 그었는지, 한강에 무슨 파문을 일으켰는지도 보이지 않는다. 그가 죽고 내가 죽는다 해도 이 세상엔 그만한 흔적도 남기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나는 허공에서 치마 두른 한 여자가 한 남자의 깍짓동만 한 허리를 껴안고 일단 하늘 높이 비상해 찰나의 자유를 맛보고 나서 곧장 강물로 추락하는 환(), 인생읮 러정의 순간이 이러하리라 싶게 터질듯한 환희로 지켜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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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친구들을 만났을 때 무슨 이야기 때문에 이런 주제로 흘러들었다. 나와 대부분의 친구들의 생각이 다른 것을 알게 되었고 그 다름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친구가 한 명만 있었다. 모두의 방향은 남자들의 생각과 비슷했다.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나이 들면서 어찌 다른 좋은 곳에 마음을 돌리지 못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들은 내가 잘 못된 것이라 했다. 아마 환경 탓일거라고 저희맘대로 결론을 내렸지만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만약에 친절한 복희씨에서처럼 나이가 그렇게 들어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면 독한마음으로 어떤 선택을 할 것 같다. 남자란 참으로 이상한 사람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맑고 고요하게 늙을 수는 없는 것인지 병이 들어서도 그런 생각만을 담고 하루를 살다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일이다.

 

친절한 복희씨’..복희씨는 친절했을 것이다. ..

평범하고 특별한 것 하나도 없는 글줄에도 친절함을 베풀며 마음을 담아주는 사람, 작은 것 하나에도 깊은 인사를 하고 성심껏 답변을 해 주는 사람 ...그런 친절을 베푸는 사람이 좋다. 그것은 누구나 마찬가지 일 것이다. 친절을 베풀기란 웬만한 마음으론 쉽지 않다. 작은 것 하나에도 마음을 담아 친절해야 하겠다. 전화든 인사든 그 무엇이든 .. 누군가 베푼 친절이 나를 따뜻하게 한다. 부쩍 날이 추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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