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8일
그만 잘못하여 새벽에 일어나 작업한 파일을 모두 날려 버렸습니다. 멍청한.....갑자기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습니다.
서가를 어슬렁거리다 책꽂이 깊숙이 꽂혀 있는 얇은 책 한 권을 빼들었습니다. 그리고 펼쳐 몇 페이지를 넘겼습니다. 이런 글이 있군요.
“어제는 가 버렸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겐 오늘이 있을 뿐입니다.
자, 시작합시다.“
-마더 테레사, <아름다운 선물> 중에서
나는 책상에 다시 앉았습니다. 다시 시작하면 되지, 뭐.....
6월 2일
봄에 천 개의 꽃을 가득 피웠던 목련의 가지를 짧게 잘라 주었습니다.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땀을 뻘뻘 흘리며 웃자란 부분들을 모두 쳐 주엇습니다. 비와 햇빛으로 자란 나무는 스스로 아름다워집니다. 웬만하면 손을 대지 않고 자연스럽게 자라도록 놓아 두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꼭 도와 주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너무 웃자라 가지가 처지고 뿌리가 견디기 어려워 하면 가지를 덜어내 주어야 합니다. 제 몸을 주체하기 어려운 경우지요. 비바람이 치면 가지가 부러지고 넘어지기도 하니까요. 자기를 가꾼다는 것은 치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답지 않은 군더더기들을 쳐내고 덜어내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잘라 주는 것을 아끼면, 결국 나무를 버리게 된다.”
-어느 정원사 할아버지
7월 4일
아침에 산에 다녀와 목욕을 했습니다. 아직 머리털의 물이 채 마르기 전에 책상에 앉아 책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해가 지기 시작했습니다. 좋은하루였습니다.
아침에는 돌구를 데리고 산에 갑니다. 이제 두 살 난 이 수캐는 산을 휘젓고 다니는 것을 제일 좋아합니다. 수없이 킁킁거리고, 줄 끝에 날 매달고 질주하고, 뽀족한 곳이 나오면 잊지 않고 물총을 쏘듯 가볍게 쉬를 쏴 줍니다. 점잖은 짓은 아니지요.
그러나 나는 길들지 않은 이런 야성을 즐깁니다. 집에 있을 때는 세상이 다 지루하고 그저 그렇더니 산에만 오면 눈빛이 살아납니다. 그 개를 보고 있으면 열중하고 몰입하는 모습을 늘 즐길 수 있습니다. 주인에 대한 친화적 제스처는 사라집니다. 꼬리를 하늘로 치켱세우고 뒷다리의 근육이 팽팽해지고 머리는 언제나 미지의 공간을 지켜보고 뾰족한 귀는 안테나처럼 부지런히 움직입니다.
코를 실룩거리고 혀는 길게 빠져 나와 심장의 박동을 따라 춤을 춥니다. 털 하나가지 살아 있는 듯합니다. 그때 그 털을 쓰다듬을 수 있다는 것이 개 키우는 맛입니다.
지금 두 살이니 사람의 나이로 따지자면 아마 한창 원기왕성한 이팔청춘쯤 되었을 것입니다. 움직임마다 힘이 넘쳐납니다. 10년쯤 지나면 나는 예순 살이고 개는 열두 살이니 저역시 고령일 것입니다. 죽음을 앞두고 있을 것입니다. 미리 조문을 지어 보았습니다.
“너는 평생 가죽 옷 하나로 살았다. 그 옷으로 눈도 맞고 비도 맞으며 투덜거리지 않았다. 밥 한 끼를 즐길 줄 알아 밥을 먹을 때마다 유쾌한 소리를 지르며 즐길 줄 알았다. 느티나무밑 우리에 갇혀 있을 때 산을 뛰어다니는 즐거움을 상상했고, 밤에 풀어 주면 현관 앞에서 집을 지켰다. 함께 산속을 산책할 때는 참 진지한 열정과 몰입으로 자연과 하나가 될 줄 알았다.
이제 너를 보내니 오랜 우정을 잊지 말고, 몸이 썩더라도 다른 무엇으로 다시 태어나 즐기도록 하여라.“
1월 10일
책을 읽다 재미있는 공식 하나를 발견 했습니다 . 누군가 아인슈타인에게 성공한 과학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을 물었다고 합니다. 그는 s=x+y+z라고 말했다고 하는군요.
s는 물론 성공입니다. x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 것‘ 이라는군요. z는 ’쫒기지 않는 한가함‘이라네요. y는 뭘까요? ’삶을 즐기는 것‘ 이랍니다.
아주 귀여운 공식입니다. 성공한 과학자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다운 사람들의 삶에 적용되는 공식이지요.
그렇게들 살고 계시지요?
적어도 눈이 내려 쌓인 다음 날에는 그렇게 살고 계신 거지요?
2월 9일
오늘은 심심해서 하루에 대한 잠언들을 몇 개 모아 보았습니다.
하루는 늘 잊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위대한 순간입니다.
평범과 일탈 그리고 어떤 도약, 진짜 살아 있는 짜릿한 물결같은 시간.
“오늘은 역사상 최고의 날이다. 어제는 그것이 비록 불가능했을지라도.”-잭 켄트 쿡(스포츠계 인사)
“매일 하루가 최고의 날임을 가슴에 새겨라. 하루가 끝나면 그것으로 마무리해라.그 하루 동안 당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은 한 것이니까. 물론 실수도 했을 것이고, 어리석은 일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가능한 한 빨리 잊어라. 내일은 새로운 날이 시작될 테니까.”-랄프 왈도 에머슨
“삶은 우리에게 다가와 속삭인다. ‘이리 들어와요, 사는 것은 멋진 일이니까? ’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뒤로 물러나 그것의 사진을 찍을 뿐이다.”-러셀 베이커(저술가)
현재에 존재하는 법. 현재만을 위해 사는 법, 있는 그대로의 하루를 즐길 것. 삶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을 용납하지 말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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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역의 계단에서 벌어졌다. 앞에서 천천히 내려가는 노인이 있었고 나는 마음속으로 투덜댔다. 계단은 어두웠고 선그라스를 끼고 있었다. 눈부신 아침 이었다.
분명 밑을 보고 걸어갔는데 아마도 내 마음을 노인이 알아챘는지 주술이라도 건 것 같았다. 빠르게도 움직이지 않았는데 말이다. 가방을 두 개나 들었고 단지 그냥 노인이 내 앞을 막는다는 것 뿐 이었다. 한 순간 계단을 하나 더 내려 디딘듯하다. 아찔했다. 가방을 다 놓아두고 주저앉아 일어서질 못했다. 잠시 정신을 차리고 발목을 조금 주무르니 괜찮은 듯 했고 난간을 잡고 일어날 수 있었다.
출근길이어서 병원을 갈까하다가 그만두고 파스만 사서 붙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걷는 것이 불편해졌다. 동생에게 전화를 넣고 얼음을 부탁했다. 종일 얼음찜질로 달래보나 호전되지 않는 것이다.
모든 일들은 그렇게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발생한다. 당장 내일부터 산책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또 돌아오는 휴일에는 근처 트래킹코스를 잡아 조금 긴 시간 걸어보려 했는데 수포로 돌아갔다.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그저 그런 일상, 평범한 날 들을 유지한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행운인가. 더 크게 다치지 않은 것만으로 감사한 마음이다.
어느새 밤이 찾아왔다. 유리창에 비치는 밤이 투명하기만 하다. 마음도 그와 같이 수없이 닦아야 할 것이다. 오늘 잠시 부정적인 생각이 사고를 불러일으킨 것임을 다시 한 번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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