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주자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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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것은 일종의 신경쓰이는 일로서, 말을 가급적 적게 하거나 혹은 가능한 한 말하지 않거나 또는 마땅히 말을 아껴야 한다거나 아예 말하지 않는 것에 이르기가지 정말 다양하다. 침묵은 실제로 장수의 비결이기도 하다.
그리고 자기 PR이 진실로 중요하다는데, 어느 누가 부인하겠는가. 그러나 생면부지인 사람에게는 헛수고일뿐이다. 그는 당신이 자신을 선전하는 취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당신의 치기어린 열정을 속으로 비웃을 것이다. 어쩌면 당신과 인사하고 악수를 나눈 뒤 깨끗이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친구와 낯선 사람과의 차이점은 그들이 당신 말을 들어줄 수 있고 또한 기꺼이 들어주려 하느냐에 있다. 즉 자랑이나 선전 따위 말이다. 이것을 굳이 교환이라고까지 말할 필요는 없지만 교환적이라 해도 무방하다. 어쨌든 그들은, 정도 차이가 있겠지만 , 당신의 말은 그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가운데 매우 흥미롭게 듣게 된다. 당신의 말이 심각하거나 슬픔에 가득찼을 때 그들이 예의를 갖추는 이유는 그들 또한 잠시나마 당신의 감정 속에 젖어들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 만족하는 것은 당신이며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긍지를 느낄지도 모른다. 그들은 ‘응당’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으며, 이건 사실 희생이나 다름없으니 ‘응당’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으며, 이건 사실 희생이나 다름없으니 ‘응당’ 또한 고마워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설사 절친한 친구 사이라 해도 당신은 말을 너무 많이 해서는 안된다. 똑 같은 이야기나 감정 그리고 경구나 격언 따위의 말은 중복해서는 안 된다. 당신 스스로가 상당히 자제해야 하며 당신의 말이 친구들의 마음까지도 차지할 수 있다는 망상은 버려야 한다. 마찬가지로 당신의 마음도 다른 사람이 완전히 점령할 수 없는 것 아닌가. 당신은 더욱더 당신 자신을 감추는 방법을 알아야만 한다. 다만 알 수 없고 얻을 수 없을 때야 비로소 좇을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설령 당신이 당신의 모든 것을 누군가에게 다 준다해도 그것은 누군가에 대해서나 이 세상에 대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마치 의대생들이 실습할 때 해부해 본 시체처럼 그것은 불가사의한 고독이며 당신은 자신을 지탱하지 못해 끝이 안 보이는 어둠 속에 스러지고 말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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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침묵은 가끔 시적의미를 지닌다. 말하자면 한가한 오후에, 붉게 물든 황혼에, 깊고 깊은 밤에 그리고 크고 조용한 방안에 흐르는 잠깐 동안의 침묵은 끊임없이 밀려오는 권태로운 대화를 능가하다 못해 아름답기만하다. 누군가 이런 경지를 일컬어 ‘무언의미(無言之美)라했다. 당신 역시 너무나 예쁜 이름이라 생각되지 않는가. 물론 ’염화미소(拈花微笑)‘의 경지라면 더욱 훌륭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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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당신은 고개를 끄덕인다든지, 코를 흥흥거린다든지 때론 탄식도 하면서 맞춰주면 되는 것이다. 그가 말을 다 마쳤다면 당신은 다시 고개를 들고 아까처럼 그대로 들어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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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두콩 깍지 까는 일 돕기/필립 들레름
콩깍지 까는 일은 언제나 시간이 고여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아침 시간에 하게 된다. 이때 시간은 더 이상 무(無)를 향해 기울지 않는다. 시간은 텅 비어 있다. 식탁 위에는 아침 식사때 사용한 카페 오 레 볼이며 빵 부스러기들이 그대로 어질러져 있고, 천천히 점심식사를 준비하는 좋은 냄새는 아직 나지 않는다. 식사 시간이 되려면 멀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에 부엌은 너무나 고요하다. 거의 추상적으로 느껴진다. 꼭 신문지 크기만 한 방수포 위에, 완두콩 깍지가 한 무더기 들어있는 샐러드 볼이 놓여 있다.
당신은 콩깍지 벗기기에 막바로 들어가는 법이 없다. 우선 우편물이 도착했는지 알아보기 위해 부엌을 가로질러 마당으로 나가본다. 그러고 나서 공연히 아내에게 한마디 던지는 것이다.
“내가 당신을 도울 수 있을까?”
하나마나 한 얘기, 물론 도울 수 있다. 가족이 식사하는 식탁에 자리잡고 앉으면 콩깍지를 벗기는 데 필요한 그 나른한 리듬을 당장이라도 발견할 수 있다. 마치 내면의 메트로놈에 맞춰 똑딱거리는 듯한 평화로운 리듬.
완두콩 깍지를 까는 일은 쉽다. 콩깍지 틈에 엄지손가락을 대고 누르면, 껍질이 얌전하게 툭, 벌어진다. 좀 덜 익은 콩깍지는 좀더 버틴다. 둘째 손가락 손톱으로 껍질에 홈을 내주면, 초록색 껍질이 벗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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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을 까다보면 조그만 소리로 서로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나지막한 음악같은 말들은 마치 평화롭고 친근한 내면으로부터 솟아오른 것처럼 느껴진다. 이따금, 한마디 말을 끝내고 난 뒤, 상대방의 얼굴을 바라보려고 고개를 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상대방은 틀림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것은 일종의 약호(約號)같은 것이다. 일, 앞으로의 계획, 피곤 따위에 대해 말하지만 심리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완두콩 까지를 까는 시간은 이러쿵저러쿵 설명을 늘어놓기 위한 시간이 아니다. 그냥 가볍게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5분이면 끝날 일이지만, 옷소매를 걷어 올리고 하나하나 콩을 까면서 아침 시간을 느지거니 늘여보는 것도 괜찮다. 샐러드 볼에 가득 찬 콩 속에 손을 집어넣어 본다. 부드럽다. 올망졸망한 둥근 완두콩들이 따뜻한 초록색 물처럼 느껴진다 그런데도 손이 젖지 않는 게 신기하다. 맑은 행복과 긴 침묵. 그리고:
‘이제 빵만 사 오면 되겠군.’
작은기쁨/헤세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쁨도 없고 멋도 없는 무덤덤함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섬세한 사람들은 틀에 박힌 삶의 형태를 답답히 여기고 고통스럽게 생각하며 일상에서 한 발쯤 물러나 있다. 짧은 사실주의의 시기가 지난 후, 예술과 문학 세계의 도처에서 불만이 드러나고 있다 . 가장 두드러진 징후로는 르네상스와 신 낭만주의에 대한 향수들을 들수 있다.
교회는 “그대들은 믿음이 부족하다”고 외치고, 아베리우스는 “그대들은 예술잉 없다”고 외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우리에겐 기쁨이 없다. 르네상스가 그토록 우리의 마음을 끄는 것은 고양된 삶의 감흥, 즉 삶을 축제로 파악했다는 데 그 까닭이 있다고 하겠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분이나 초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 즉 조급해하는 것은 의심할 바 없이 기쁨에 대한 가장 위험한 적이다. 지난 세기의 목가적인 글과 감상적인 여행기를 읽을 때 우리는 동경 어린 미소를 짓게 된다. 무엇 때문에 우리 조상들은 여유가 없었단 말인가? 나는 산책하면서 프리드리히 슐레겔의 목동을 노래한 시를 읽었을 때 , “만약 우리 시대의 일을 그들이 해야 된다면 그들은 얼마나 한숨을 쉴까?” 하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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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의 습관은 “작은 기쁨”을 즐길 수 있는 능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런 능력은, 원래 모든 인간에게 타고난 것으로 현대의 일상생활에 서 여러모로 위축되고 사라져 버린 것, 즉 어느정도의 명랑성과 사랑과 시적 감정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 작은 기쁨은 수없이 일상생활 속에 파묻혀 드러나지 않아, 많은 노동자들의 무딘 감각은 이를 쉽게 느끼지 못한다. 작은 기쁨은 눈에 띄지 않고 칭송되지도 않으며 돈도 들지 않는다.(이상하게도 가난한 사람들도 가장 아름다운 기쁨에 돈이 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이런 기쁨 가운데서도 자연과의 만남이 주는 기쁨이 가장 크다. 무엇보다도 많이 잘못 사용된 우리의 눈, 즉 현대인의 지나치게 긴장된 눈은 원하기만 한다면 아주 고갈되지 않은 향락을 누릴 능력을 지니고 있다. 내가 아침에 일하러 갈 때면 수많은 노동자들과 만난다. 그중에는 방금 잠에서 깬 후 침대에서 빠져 나와 한기를 느끼며 나와 같은 방향이든 반대방향이든 빠르게 거리를 건너가는 사람들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빨리 걸으면서 눈을 길위에 고정시키거나 고작해야 지나가는 사람들의 옷과 얼굴에만 고정시킨다. 친구들이여 고개를 들기 바람다. 부디 나무나 하늘 한 조각을 한번 쳐다보도록 시도해 보기 바란다. 꼭 푸른 하늘일 필요는 없다. 어떻든 태양 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매일 아침 한순간이라도 하늘을 쳐다보는 데 습관을 들이면 어느새 그대들 주위에 공기를 , 잠과 일 사이에 그대들에게 허락된 상쾌한 아침 공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대들은 하루하루가, 또 모든 지붕이 나름대로의 모양과 특별한 빛깔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다면 그날 내내 상쾌한 기분이 될 것이며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이 주는 여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점차 눈은 저절로 많은 작은 매력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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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릭/솔제니친
우리집 정원 옆에서 옆집 소년이 ‘샤릭’이라고 하는 작은 개 한 마리를 기르고 있었다. 이 개는 새끼강아지 때부터 쇠사슬에 묶여서 길러졌던 것이다.
어느 날 나는 고소한 냄새가 제법 풍기는 닭뼈를 ‘샤릭’에게 주려고 정원으로 가지고 나갔다. 마침 그때 소년은 마당을 뛰어다니게 하려고 ‘샤릭’을 풀어 놓았을 때였다. 마당엔 함박눈이 수북하게 깔려 있었다. ‘샤릭’은 깡충깡충 토끼처럼 뛰면서 앞발을 높이 쳐들고 서기도 하고, 더러는 코를 눈속에 처박기도 하면서 신나게 정원의 구석구석을 뛰어 다녔다.
복슬강아지 ‘샤릭’은 내게 달려와서 반갑다는 듯이 몸을 내 다리에다 부벼대며 뛰어오르기만 할 뿐, 내가 주는 닭 뼈다귀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든 듯 다시 눈 속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마치 ‘샤릭’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 따위 닭 뼈다귀는 필요치 않아. 내게 필요한 것은 오직 자유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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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편지/정운
가을이 더없이 깊어갑니다. 오늘 아침 바람은 겨울처럼 차가웠습니다. 두터운 점퍼 호주머니에 두 손을 집어넣고 걸었습니다. 그래도 좋았습니다. 햇살은 보석처럼 반짝이고 낙엽은 자유롭게 구르고 하늘은 높았습니다. 모든 것이 수채화처럼 맑기만 했습니다. 그러한 풍경들이 얼마나 좋던지 나도 모르게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오래된 핸드폰에 풍경을 담으며 문득 소원했던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가을은 아마도 이런 것인가 합니다. 멋진 풍경을 보면 생각나고 계절이 시작되면 또 전하고 싶은 그런 것 말입니다.
내복도 입고 머플러도 두르고 겉옷도 겨울옷으로 갈아입고 철저한 무장으로 출근을 했습니다. 볕드는 가게 앞에 내어 말리던 호박이 어느새 햇살을 품고 단단해졌습니다. 그래도 오늘까지는 내어놓아야 할 것 같았습니다.
좋은 하루가 시작될 것 같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아침에 가을메시지를 보냈던 친구가 달콤한 케익을 들고 환하게 들어옵니다. ‘네가 내가 여기 올 줄 알았나보다. 다림질을 하면서 엄마에게 가는 길에 들려야지 했었는데....’ 통하는 것이란 이런 것이겠지요?
그녀는 그동안 쌓아놓았던 얘기보따리를 풀었습니다. 11월의 가을처럼 깊은 눈이 된 그녀의 이야기에 나는 취했습니다.
어느새 해는 서녘으로 기울고 눈 빠지게 막내딸을 기다릴 엄마에게로 그녀는 달려갔습니다. 정말 11월엔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것 같습니다. 이 쌀쌀한 첫날에 궁금하던 친구가 불현 듯 나를 찾아오다니 말입니다.
건너편 가로수는 그녀에게 손이라도 흔드는 것인지 마구 휘청 입니다. 그의 옷은 이제 다 떨어져가고 있고 그의 추위가 사뭇 느껴집니다. 언제나 한 자리에 서서 그는 종일 나를 지켜봅니다. 오늘은 내가 그를 지켜봅니다. 아무래도 하루에 두 잔만 하던 커피를 더 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에게도 커피를 건네고 싶어지는 오후입니다. 라임오렌지나무의 어린 주인공처럼 그의 곁에 가서 따뜻한 인사라도 건네 보고 싶어지는 날입니다.
친구가 들고 온 달콤한 케익 한 조각을 입에 넣습니다. 어두운 방의 스위치를 누른듯 나는 더없이 환해집니다 누군가 좋은 마음으로 제공한 음악 또한 이제 곧 떠나갈 가을이 한껏 실려 있습니다. 문득 마음을 활짝 열고 보낸 간단한 몇 자의 메시지가 오늘 지금 나를 가득 차게 합니다. 11월의 문이 이렇게 열렸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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