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산에는 꽃이 피네

다림영 2009. 11. 9.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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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정빈은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일시적인 생활방편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두고두고 배우며 익혀 가야할 항구적이고 지속적인 우리의 생활규범이 되어야 한다.

 

 

이 지구촌에는 나눠 가져야 할 이웃들이 너무도 많다. 절제된 미덕인 청빈은 그 뜻이 나눠 갖는 다는 뜻이 나눠 갖는다는 뜻이다. 청빈은 그저 맑은 가난이 아니라,그 원뜻은 나눠 가진다는 뜻이다.

 

 

청빈의 상대 개념은 부가 아니라 탐욕이다. 한자로 '탐貪'자는 조개 '패'위에 이제 '금'자이고, 가난할  '빈貧'자는 조개 패위에 나눌 '분'자이다. 탐욕은 화폐를 거머쥐고 있는 것이고, 가난함은 그것을 나눠 갖는다는 뜻이다.

 

 

사람들에게 만일 가난이 없었다면 나눠 가질 줄도 몰랐을 것이다. 내가 가난해 봄으로써 우리 이웃의 가난, 어려움에 눈을 돌리게 된다.

 

 

성 프란치스코는 수도자가 사는 집은 흙과 나무로만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흙과 나무는 기본적인 소재이다. 흙과  나무로만 짓게 되면 자연히 검소한 집이된다. 성 프란치스코는 그런 수도원을 그들이 소유하지 말고 그 속에서 순례자나 여행자처럼 살자고 역설했다.

진정으로 우리가 삶을 살 줄 안다면 순례자나 여행자처럼 살 수 있어야 한다. 순례자나 여행자는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그날그날 감사하면서, 나눠 가지면서 삶을 산다. 집이든 물건이든,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순례자처럼  살아야 한다.

 

 

내 자신이 몹시 초라하고 부끄럽게 느낄 때가 있다. 그것은 내가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갖고 있는 사람 앞에 섰을 때는 결코 아니다. 나보다 훨씬 적게 가졌어도 그 단순과 간소함 속에서 삶의 기븜과 순수성을 잃지 않는 사람 앞에 섰을 때이다. 그때 내 자신이 몹시 초라하고 가난하게 되돌아보인다.

 

 

다시 말하거니와, 내가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갖고 있는 사람 앞에 섰을 때 나는 기가 죽지 않는다. 내가 기가 죽을 때는 내 자신이 부끄럽고 가난함을 느낄 때는, 나보다 훨씬 적게 갖고 있으면서도 그 단순과 간소함 속에서 여전히 삶의 기쁨과 순수함을 잃지 않는 사람을 만났을때이다.

 

 

옛사람은 어렵고 가난한 생활 가운데서도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즐길 줄 알았다. 마음의 안정과 여유를 잃지 않고 살았다. '안빈낙도 安貧樂道'란 그래서 생긴 말이다.

가난 속에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즐기며 산다는 뜻이다. 그 지혜를 우리가 배워야만 한다.

 

 

어려울 때일수록 낙관적인 생활 태도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 어떤 명상서적을 읽어보면. 우주의 기운은 자력과 같아서 우리가 어두운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 어두운 기운이 몰려온다고 적혀 있다. 우리가 밝은 마음을 지니고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살면 밝은 기운이 밀려온다는 것이다.일리가 있는 말이다.

 

 

누구에게나 삶의 고민이 있다. 그것이 그 삶의 무게이다. 그것이 그 삶의 빛깔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 한 물건도 갖고 오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한들 무슨 손해가 있겠는가. 내가 태어날 때 아무것도 갖고 오지 않았는데 가난한들 손해될 게 무엇인가. 또 살 만큼 살다 이 세상을 하직할 때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다. 죽을 대 부유한들 무슨 이익이 되겠는가. 내것이 어디 있는가.

 

 

우리는  이 우주의 선물을, 신이 주신 선물을 잠시 맡아서 관리하는 것일 뿐이다. 그 기간이 끝나거나 관리를 잘못하면 곧바로 회수당한다. 이것이 우주의 리듬이다.

 

 

 

내가 좋아하는 옛시조가 있다.

 

십 년을 경영하여 초가삼간 지어내니

나 한 칸 달 한 칸에 청풍 한 칸 맡겨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

 

 

요즘은 뚝딱하면 하루 아침에 다 지어내는데 십년을 벼르고 별러, 그것도 초가 삼 칸을 지었다는 것이다. 나 혼자 살기 위해 지은 것도 아니다. 나는 그 중에서 한 칸만 차지하면 되는 것이다. 나 한 칸, 달 한 칸에, 맑은 바람에게도 나머지 한 칸을 주었다. 집이 비좁으니까 강과 산을 들여놓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주위에 둘러두고 보겠다는 것이다.

이런 시조야말로 청빈의 절제된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이다.

 

문명은 사람을 병들게 한다 그렇지만 자연은 사람을 소생시켜준다. 사람을 거듭나게 한다. 자연과 더불어 살 때 사람은 시들지 않고 삶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어떤 선사는 그의 오두막을 두고 이렇게 노래한다.

 

 

벽이 무너져 남북이 트이고

추녀가 성글어 하늘이 가깝다.

쓸쓸하다고 말하지 말게.

바람을 맞이하고 달을 먼저 본다네.

 

 

집이 다 허물어지고 낡았기 때문에 바람을 맞이하고 달을 먼저 보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집이 낡아 추녀 벗겨진 지붕 사이로 하늘이 다 보이자, 사람들이 와서 을시년스럽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선사는 말하고 있다. 쏠쏠하다고 말하지 말게. 집이 다허물어진 덕분에 달을 먼저 볼 수 있지 않은가.

스스로 선택한 청빈은 단순한 가난이 아니라 삶의 어떤 운치이다.

 

 

세상이 달라지기를 바란다면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이 달라져야 한다. 내 자신부터 달라져야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모습이 달라져야 한다. 그래야만 세상이 달라진다. 내 자신이 세상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의 일부이다.

 

 

우리 앞에는 항상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놓여 있다. 이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각자 삶의 양식에 따라서 오르막길을 오르는 사람도 있고 내리막길을 내려가는 사람도 있다.

 

 

오르막길은 어렵고 힘들지만 그 길은 인간의 길이고 꼭대기에 이르는 길이다. 내리막길은 쉽고 편리하지만 그 길은 짐승의 길이고 구렁으로 떨어지는 길이다.

 

 

만일 우리가 평탄한 길만 걷는다고 생각해 보라. 십 년 이십 년 한생애를 늘 평탄한 길만 간다고 생각해 보라. 그생이 얼마나 지루하겠는가. 그것은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오르막길을 통해 뭔가 뻐근한 삶의 저항 같은 것도 느낄고 , 창조의 의욕도 생겨나고, 새로운 삶의 의지도 지닐 수 있다. 오르막길을 통해 우리는 거듭 태어날 수 있다. 어려움을 겪지 않고는 거듭 태어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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