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산에는 꽃이 피네

다림영 2009. 11. 3.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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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일.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자신에게 자신을 만들어 준다. 이 창조의 노력이 멎을 때 나무건 사람이건, 늙음과 질병과 죽음이 온다.

 

 

겉으로 보기에 나무들은 표정을 잃은 채 덤덤히 서 있는 것 같지만, 안으로는 잠시도 창조의 일손을 멈추지 않는다.

땅의 은밀한 말씀에 귀 기울이면서 새 봄의 싹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시절 인연이 오면 안으로 다스리던 생명력을 대지 위에 활짝 펼쳐 보일 것이다.

법정스님 수상집<산방한담>중에서

 

 

얼마전 서울의 명동 성당에서 법정 스님을 초청해 가톨릭 신도들과 수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법문을 들었다. 명동 성당이 세워진 지 백 년을 기념하기 위해 열린 강연회였다.  불교 수행자가 그 설교단에 올라 법문을 한 것은 그때가 최초의 일이었다.

 

 

그 자리에서 스님은 이렇게 말문을 여셨다.

'방금 신부님게서 말씀하셔듯이 제 자신도 더러 수녀원에가서 강론한 적은 있지만 이런 큰 성당에서 말하게 된 기회는 오늘이 처음입니다. 저를 오늘 이 자리에 초대해 주신 명동 성다윽에 감사 말씀 드리고, 성당이 축성된 지 올해가 백돌 되는 해에 저와 같은 사람을 이런 자리에 서게 해주신 천주님의 뜻에 거듭 감사드립니다.'

 

 

 그러자 청중들 사이에서 환호와 박수가 터져나왔다. 그 자리에 있던 나 역시 잔잔한 감동이 느껴졌다. 두 종교의 만남이라는 거죽의 일이 아니더라도, 십자가 앞에 서 계신 스님의 모습은 보는 이들에게 ㅁ낳은 감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내가 알기로 스님은 그동안 어떤 거국적인 종교계의 기도회나 합동 모임에도 참석하신 적이 없으시다. 그분은 다시 태어난다 해도 그런 형식적인 자리에 얼굴을 내미실 분이 아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스님은 카톨릭이나 기독교의 몇몇 분들과 친분이 두터우시다. 오랜 세월을 장익 주교님과 ㅁ나나오면서 두 분 사이에 복장의 차이뿐 다른 차이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씀  하신다. 장안의 언론이 떠들썩했지만, 서울의 길상사 개원식에 김쉬환 추기경이 참석해 불상 앞에서 축사를 읽으신 것도 따라서 우연힌 일이 아니었다.

 

 

그것에 대한 화답으로 스님은 그해 크리스마스에 성탄절 축하 메시지를 보내셨다.

스님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살아간 모습을 좋아하셔서 자주 언급하신다. 사막 교부의  일화들도 곧잘 인용하신다. 그런가 하면 랍비와 힌두교 시인들도 좋아하신다.

 

 

나를 만날 때마다 매번 크리슈나무르티의 '마지막일기'가 갖고 이는 아름다움과 감동을 말씀하신다. 연륜있는 한 수도자의 이러한 태도는 나 자신뿐 아니라 수행하는 사람들,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큰 깨우침이라고 나는 믿는다.

 

 

네덜란드 출신의 명상화가 프레테릭 프랑크는 말한다.

'진정한 예술은 예술이라는 것 너머에 있고, 진리는 종교라는 울타리 밖에 있으며, 사랑은 껴안는 행위 너머에 있다.'

불교 전통에 따라 누군가 삼배를 올리면 스님은 그렇게 불편해 하실 수가 없다. 그 불편해 하는 모습에서 인간적인 순수함이 드러난다.

 

 

그 순수함과 진실을 직시하는 눈빛은 종교에 오래 몸담은 사람일수록 가장 먼저 잃어 버리기 쉬운 요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옛 선승들도 '배는 강을 건너라고 있는 것이고 , 종교는 그것을 뛰어넘으라고 있는것' 임을 가르쳤지 않았는가. 명동성당의 설교단에 서서 약간은 수줍어하는 말투로 프란치스코 성인의 일화를 예로 드는 스님을 바라보면서, 나는 문득 한 사람의 참 인간이 내 앞에 서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엮은이

 

 

소유의 비좁은 골방

성 프란치스코의 말을 빌리자면 가난은 우리 자신을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들어올리는 길이다.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이웃과 나눠 가질 때 그것은 우리 자신을 높이 들어올리는 행위라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마주친 삶의 경제적인 위기는 우리 자신을 떨어드리지 ㅇ낳고 우리 자신을 높이 들어올리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죽음에 임박했을 때 가난과 겸손을 보다 온전하게 지키기 위해 형제들의 모든 집과 움막은 반드시 흙과 나무로 지어야 한다는 내용을 유언에 넣도록 당부했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

 

 

동서고금을 물을 것 없이 그 시대아 후세에까지 모범이 된 신앙인들을 가난과 어려움 속에서 믿음의 꽃을 피우고 그 열매를 맺었다.

불교 경전에도 보면 수도자는 먼저 가난해야 한다고 적혀있다. 가난하지 않고서는 보리심이나 어떤  진리에 대한 자각이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것이다. 주어진 가난은 우리가 극복해야 할 과제이지만, 스스로 선택한 맑은 가난, 즉 청빈은 절제된 아름다움이며 삶의 미덕이다.

 

 

풍요 속에서는 사람이 타락하기 수비다. 그러나 맑은 가난은 우리에게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 주고 올바른 정신을 지니게 한다.

 

 

온갖 욕망과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살마은 비로소 온 우주와 하나가 될 수 있다. 욕망과 아집에 사로잡히면 자신의 외부에 가득차 있는 우주의 생명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러므로 소유물을 최소한으로 줄여서 스스로를 우주적 인 생명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맑은 가난, 곧 청빈이다. 청빈은 절제된 아름다움이며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기본적인 조건이다. 예로부터 깨어 있는 정신들은 늘 자신의 삶을  절제된 아름다움으로 가꾸어 나갔다.

 

 

청빈의 덕을 쌓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엇보다 따듯한 가슴을 지녀야 한다. 우리 둘레에 편리한 물건의 더미는 한없이 쌓여 있지만 그것들을 사용하면서 우리는 과연 행복한가 스스로에게 물어 봐야 한다. 일상적인 물건들을 사용하면서 우리는 과연 행복한다.

 

 

단추 하나만 눌러도 밥이 되고 냉장이 되고 세탁이 된다. 이렇게 편리한 연장을 쓰면서 과연 우리는 얼마만큼 행복을 느끼고 있는가. 그런 사실에대해 고마움을 느끼고 있는가.

 

 

사람은 머리만 갖고는 제대로 살 수 없는 존재이다. 머리의 회전만을 중시하는 세상은 더없이 냉혹하고 차갑다. 이사회는 머리만이 존재할 뿐 따뜻한 가슴이 끼어들 틈이 없다. 보라. 온갖 종류의 부정과비리, 사기와 속임수, 그 밑 바탕에는 간교한 머리가 작용하고있다.

 

 

심장은 그런 데 관여하지않는다. 가슴은 그런 일에 관계하지 않는다. 사람을 뽑는 대학에서 머리만 중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머리의 회전만을 중요시하는 사회는 문제를 안을 수 밖에 없다.

 

 

믿음은 머리에서 나오지 않는다. 가슴에서 온다. 머리에서 오는 것은 지극히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다. 머리는 늘 따지고 의심한다. 그러나 가슴은 받아들인다. 열린 가슴으로 믿을 때 그 믿음은 진실한 것이고 또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인간의 신뢰와 성실성도 머리가 아닌 가슴에서 온다.

 

 

삶의 질이란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따뜻한 가슴에 있다. 진정한 삶의 질을 누리려면 가슴이 따뜻해야 한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마음써야 할 것은 만나는 이웃에게 좀더 친절해지는 것이다. 내가 오늘 어떤 사람을 만났다면 그 사람을 통해서 내 안의 따뜻한 가슴이 전해져야 한다. 그래야 만나는 것이다.

 

 

따뜻한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친절이야말로 모든 삶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보다 더 친절하고 사랑한다면 우주는 그만큼 선한 기운으로 채워질 것이다.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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