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P178~

다림영 2008. 8. 23.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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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대가 아파트에 살면 노인은 불편하다고 한다.그래서 아파트 노인들은 단지 안에 있는 노인정에 모여

일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무로한 시간을 때운다. "남은 음식을 버리지 말라고 했더니 며느리가 분리

수거를 하니까 괜찮다고 하는데 그 분리 수거란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한 노인이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마른 쓰레기와 젖은 쓰레기를 따로따로 버린다는 말이지."

"아니야, 다시 못 쓸 쓰레기와 다시 쓸 수 있는 쓰레기를 분간해서 버린다는 말이야."

이렇게 의견이 갈리자 말문을 열었던 노인이 남은 음식은 쓰레기가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젊은 사람들은 남긴 것을 두었다 먹는 것을 싫어하지. 건강에 안좋다며 멀쩡한 음식도 찌꺼기라고 버리

지, 다 먹을 것이 남아돌아 그런거지"

 

그러자 한 옆에 묵묵히 앉아만 있던 노인이 옛말을 떠올렸다.

"논밭에 떨어진 이삭은 버린 것이 아니며, 밥알을 개수통에 버리면 돼지의 밥이 되지만 시�앙에 흘리면

밥을 버린 죄가 된다고 했었지"

가을 걷이를 할 때면 이삭을 조금쯤은 흘려 두었다. 논 주인은 흘린 이삭을 줍지 않았다. 논에 떨어진

이삭들은 못사는 사람들의 몫으로 여겼고 흙위에 떨어진 낟알들은 들쥐나 새들의 모이라고 생각했다.

밭에서 고구마를 캘 때도 굵은 것만 땃고 잔챙이는 그냥 두었다. 두더지의 양식거리라고 했다.

 

감나무에서 감을 딸때도 맨 꼭대에 몇알의 감을 남겨 두고 까치밥이라고 했었다.

이러한 마음 씨들을 노인들은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남은 음식을 버리면 죄가 된다는 노인

의 말을 반갑게 들었다.

 

불외위는 무슨 말인가. 不畏威

요즘 환경보호란 말을 자주한다. 공해 때문에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그렇게 부르짖는다. 그러나

환경 보호란 말부터 인간의 오만이다. 인간이 환경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이 인간을 보호하는 것이다.

환경은 천지의 것이고 인간은 거기에 세들어 사는 것 뿐이다. 그래서 장자는 천지는 하나의 주막이요,

인간은 거기에 머물다 가는 하나의 길손에 불과하다고 했다.

천지라는 주막에는 특실이 없다. 수 만 갈래의 모굿ㅁ들이 다 어울려 묵다가 명이 다 되면 떠나는 길손들

이다. 천지의 입장에서 보면 지렁이의 목숨은 천하고 인간의 목숨은 귀하다고는 하지 않는다고 노장은

밝힌다.

 

이러한 사상이 무위 자연이다. 그러나 인간은 천지라는 주막의 주인 행세를  하려고 한다. 집 주인이 아니

면서 집주인 행세를 하는 것이 인간의 물욕이요. 오만이다. 인간의 물욕이 빚어내는 살기와 오만은 죄를 두려워 하지 않는것과 같다.

대위지는 무슨 말인가.大威至

 

이삭을 남기면서도 곡식 낟알을 아까워하고 소중히 하는 것은 하늘을 두려워 하는 마음이다. 그러나 현대

인은 무엇이든 인간의 소유물로 만들어 풍족하게 쓸수 있어야 하고, 안되면 전쟁을 해서라도 뺏고 빼앗는

짓을 서슴치 않으며 물질의 풍요를 독차지해야 한다고 벼른다.

 

이처럼 인간은 철저하게 쟁취의 살기를 품은 동물로 표변했다. 이러한 표변이랴말로 노자가 밝힌 큰 재앙

을 만나게 되는 것 아닌가!

 

사는 것을 얕보지 마라.

천지를 더럽혀 놓고 뒤늦게야 환경을 보호하자고 하는 인간의 심사야말로 사는 곳을 얕보는 생각이다.

하늘을 두려워하고 천지의 고마움을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이대로 인간들이 만물을 남용하고 함부

로 대하면 천지는 쓰레기통처럼 될 것이다. 오로지 인간만이 쓰레기를 버리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숲속에 사는 새는 집을 짓되 나뭇가지 하나로 만족하고 강가에 사는 두더지는 목마름을 풀되 한모금의

물로 만족한다. 그러나 옛날에는 기와집이 오두막을 얕보았고, 이제는 양옥이 한옥을 얕보기도 하고. 큰

평수가 작은 평수를 얕보는 세태를 인간들이 저질러 댄다.

 

그러나 인간을 제외한 다른 생물은 목숨이 원하는 것만 누린 다음 천지에 다시 고스란히 되돌려 준다. 먹

고 남아 찌꺼기를 버리는 날짐승은 없고 오물로 물을 더럽히는 물고기도 없다. 오로지 인간들만 천지를

제것인 양 함부로  대하면서 사는 곳을 마음대로 다루며 더럽히는 오기를 부린다. 이러한 인간의 오기야

말로 사는 곳을 얕보는 짓이다. 사는 곳을 귀천을 두고 따지지 말라. 이것이 사는 곳을 얕보지 마라는 말

의 속뜻인 셈이다.

 

사는 바를 싫어하지 마라.

못되면 조상 탓이고 잘되면 내 덕이다. 이렇게 인생을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가난은 싫고 부자가 좋다는 발

상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태반이다. 제 인생을 이렇게 분별해 호오를 가린다면 제 인생을 스스로 업신여기

는 꼴이 되기 쉽다.

 

팔자타령을 하는 것도 제 인생을 미워하고 남의 인생을 부러워 하는 허망한 짓이다. 삶을 투정하고 시샘하

는 짓을 하면 할수록 삶은 초라하게 되거나 험하게 되고 심하면 망측하게 된다. 제 오지랖의 삶을 사랑하

면 목숨을 소중히 하는 것이고 싫어하면 목숨을 학대하는 것이다. 목숨에는 귀천도 없고 빈부도 없다.

 

참새는 참새대로 살고 꾀고리는 꾀꼬리 대로 산다. 토굴을 파고 사는 두더지는 나무 끝에 사는 까치의 집을

부러워 하지 않는다. 오로지 인간들만 제 인생을 남의 인생에 견주어 저울질을 하고 스스로 속을 썩인다.

이렇게 속앓이를 해서 무엇이 더 나아질 것인가.속을 태울 수록 살맛이 적어질 뿐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

는자를 돕는다고 하지 않는가. 제 인생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남의 인생도 사랑해 줄 수가 있다.

 

삶의 사랑이 귀천이나 빈부로 분별되는 것은 아니다. 군왕의 삶은 귀하고 백성의 삶은 천하다고 하면 군왕

의 목숨은 귀하고 백성의 목숨은 천하다는 말인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목숨과 삶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

이다. 자기에게 맡겨진 목숨을 소중히 하면 죄를 짓지 않게 되고 자기가 맡은 인생을 사랑하면 그 또한 죄

를 범하지 않게 된다. 이것이 사는 바를 싫어하지 마라는 말의 속뜻이라고 헤아리면 될 것이다.

 

자기를 알되 과시하지 마라.

뱁새가 황새걸음을 흉내내면 뱁새의 가랑이가 찢어지고 사슴이 나무를 타는 원숭이의 재주를 부러워하

면 발목이 부러진다고 한다. 제분수를 모르면 병신이 되게 마련이다

 

뱁새는 뱁새임을 알므로 황새를 부러워 하지 않으며 황새인 척하지 않고 사슴은 사슴임을 알므로 나무에

올라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처럼 인간을 제외한 모든 생물은 제 분수대로 삶을 꾸린다. 이렇게 사는 것

이 무위요 자연이다. 무엇을 얼마나 안다고 자랑한단 말인가 . 깊은 바다일 수록 되비춰주지 않는다고 하

지 않는가. 이러한 물음에 응하면 자기를 알되 과시하지 마라는 속뜻을 새길 수 있을 것이다.

 

자기를 사랑하되 대접을 요구하지 않음은 무슨 뜻일가.

홀대를 받아 서운하다고 꽁하게 생각할 것은 없다. 오히려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는 얌전한 강아지 노릇

을 하지 않았는지 자신을 되짚어 보는 편이 한결 낫다. 이렇게 마음을 돌려 쓴다면 대접받기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참뜻을 이해할 것이다.

 

내숭을 떨거나 속에 없는 염치를 부리면 당장에 그 얕은 속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누워 침 뱉는

짓을 하지 않으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왜 자기를 사랑해야 하는가. 맡은 바 인생을 사랑하고 맡은

목숨을 소중히 해야 하는 까닭이다.

 

죄를 두려워 하는 것도 인생을 사랑하는 것이요. 사는 곳을 얕보지 않는 것도 그러하며 삶을 싫어하지 않

는 것 또한 그렇다. 이처럼 인생을 사랑하고 목숨을 소중히 하려면 스스로를 아는 쪽을 택하고 자기를 과

시하는 쪽을 버릴 것이요. 자기를 대접해 달라고 요구하는 쪽을 버리고 자기를 사랑하는 쪽을 택하라.

 

그러면 저절로 목숨은 소중하게 되고 살면서 새삼스럽게 염증을 앓지 않아도 된다.

한마디로 죄를 두려워할 줄 알라. 그러면 인생을 고해라고 푸념할 것도 없다.

 

<원문의역>

사람이 죄를 두려워 하지 않으면 커다란 재앙을 만난다.

재앙을 맞지 않으려면 사는 곳을 얕보지 마라. 그리고 삶을 싫어 하지 마라. 그러면 무엇하나 싫어하

는 것이 없으므로 저절로 싫어하지 않게 된다.

이러하므로 성인은 자기를 알되 과시하지 않으며, 자기를 사랑하도 대접 받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인은 자기를 과시하거나 자기를 대접해 달라고 바라는 쪽을 버리고 자기를 알고 자기를 사랑하는 쪽을

택한다.

 

<도움말>

제 72장은 왜 죄를 두려워 하며 살아야 하는 가를 살피게 한다. 죄를 두려워 하면 언제 어디서나 악을 범

하지 않게 된다. 죄를 두려워하라는 말은 목숨을 사랑하라는 말과 통한다.

민불외위의 위는 죄를 뜻한다.

대위는 재앙을 뜻하고 살육을 범하는 전쟁과 같은 것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무압기소거의 압은 얕보는 것과 같다. 귀천을 따져 보려는 것과도 통한다.

무염기소생의 염은 싫어하는 것과 같다. 부유함은 귀하고 가난하면 천하다는 생각이 곧 인생의 염으로 통

한다.

자지부자현의 자지는 자기를 아는 것을 생각하게 하고 자현은 자기과시를 뜻한다. 자기를 아는 것은 명이

라고 노자는 밝혔다. 자애부자귀의 자애는 자기를 남과 대비해서 따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것을 뜻하고 자귀는 자신이 남조다 낫다는 자부심 같은 것을 듯한다.

거피취차의 피는 자현과 자귀를 말하고 차는 自知와 自愛를 말한다.

 

제 73장 하늘의 그물은 성글지만 빠져나갈 수 없다.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면 만용이다.

목매기<아직 코를 뚫지 않고 목에 고삐를 맨 송아지>는 억지를 부리다 코를 뚫리고 황소는 고집을 부리

다 뿔을 뽑힌다. 인간도 제 고집만 부리다 보면 제 발등을 제 손에 들린 도끼로 찍기도 하고 혹을 떼려다 하

나 더 붙이기도 한다. 외고집이든 옹고집이든 고집이란 것은 모조리 마음을 막고 막다른 골목으로 끌고 간

다.

 

막다른 골목에서는 생쥐도 고양이를 공격한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한 공격을 무모한 용기라고 한다.

고집을 일삼는 마음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독단이나 아집, 편견등은 고집스러운 마음의 씀씀이들

이다. 벽창호란 말이 있다. 남들이 여러 갈래로 알아듣게 아무리 말을 해주어도 통하지 않는 사람을 그렇

게 부른다.

 

꽉 막혀서 들고나는 통로가 없는 마음의 씀씀이는 한 생각만 옳고 다른 생각은 모조리 그릇되거나 틀렸

다고 단정을 내린다.이렇게 되면 자기가 내린 결정이 유일하고 절대적인 양 착각하게 된다. 어떠한 고집

이든 착각의 함정에 빠져 있으면서도 그런 줄 모르는 꼴이다. 외고집이나 옹고집이란 스스로 빠진 함정

속으로 점점 더 깊게 파고들어가 넓은 시야를 볼 수 없게 되어 버린다.

 

과감하다는 것을 자랑하지 마라. 결단을 내렸다고 단언하지 마라. 무엇을 하겟다고 생각을 하면 행동은

여러 생각들 중에서 하나만 선택해 실행하기를 좋아한다. 이렇게 되면 될 수록 마음은 조급한 결단을 내리

고 행동은 과감하게 된다. 성급한 결단은 언제나 허점을 남기고 과감한 행동은 항상 허술하면서도 거칠

게 드러난다. 이렇게 되어 일이 틀리고 꼬이며 풀리지 않게 된다.

 

결단은 하나만 생각하는 마음이며, 과감하다는 것은 하나만 노리는 행동이다. 결단은 하나만 결정한다

는 말이다. 결은 하나를 노리는 것이며 단은 하나만 옳고 다른 것은 틀렸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칼질과 같은

것이다. 과감도 하나만 노리는 행동이다. 감은 결과 통하며 이 또한 하나만 옳고 다른 것들은 틀린 것이라

단정하고 감행하는 행동이다.

 

개인이 옹고집을 부리면 그는 패하게 되고, 나라가 외고집을 부리면  그나라 또한 망한다. 나라으 외고집은

주로 유일 사상 따위로 드러난다. 그런 사상은 어떤 이념이 외고집을 부리게 되면 빚어진다. 유일 사상으로

나라가 무장을 하면 그 사상이 백성의 눈을 가리고 귀를 먹게 하며 입을 틀어 막는다. 그리고 외고집의 사

상은 만용을 부린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므로 백성의 뜻을 헤아리려고 하지 않게 되고 앎은 외곬으로 빠

져 막다른 골목으로 백성을 몰아가게 된다.

 

이념의 시대를 냉전의 시대라고 하는 것은 사상이 무기가 되어 다른 사상을 말살하려고 하는 까닭이다. 무

력 전쟁만이 사람을 살상하는 것은 아니다. 사상의 전쟁은 사람을 살려둔 채 로 죽인다.  이러한 만용들은

인간사에서 절대 선도 없고 절대 악도 없다는 것을 무시한 까닭에서 자행된다.

 

선을 지나치게 선이라고 고집하면 악이 되고 악을 지나치게 악이라고 고집하면 선이 되기도 한다는 노자의

말은 위와 같은 만용이 엄청난 착각임을 새기게 한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노자의 말을 새겨 듣는다면

결단에 앞서 무엇이 이롭고 무엇이 해로운 가를 넓게 두루 살펴보고 짚어 치우치는 어리석음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과감한 것에 빠져 용감하면 죽고, 과감한 것에 빠져들지 않고 용감하면 산다. 이두가지의 용기는 이롭기도

하고 해롭기도 하다. 천하가 싫어하는 까닭을 어느 누가 알것인가. 이러하므로 성인도 그 점을 어려워 한다.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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