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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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림영 2008. 8. 26.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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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집이나 새 며느리를 맞으면 시어머니는 집안 내력의 입맛을 알려 주어야 한다. 입맛이란  주로 반찬

을 마련할 때 들어가는 양념의 종류와 얼만큼의 양을 잡아넣느냐에 따라 버릇된 먹음새이다.

 

짜게 할 것인가 싱겁게 할 것인가를 알려 입맛에 맞는 간을 내게 하고, 얼마나 맵게 할 것이며 갖가지 양

념들을 어떻게 골고루 알맞게 무쳐 입에 맞는 맛을 낼 것인가를 시어머니는 새 며느리에게 손수 보여주게

마련이다. 이렇게 해서 시어머니는 새 며느리에게 음식을 마련하는 손 끝을 대물림 하게 된다.

 

왜 시어머니는 새 며느리에게 집안 입맛의 내력을 들어 음식 만드는 손끝을 가르쳐 주려고 하는가

음식맛은 대물림으로 식솔들이 건강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는 까닭이다.

옛날 시어머니는 새 며느리에게 간장맛을 보게 하고 된장맛을 보게 하며 고추장 맛을 보게 한다. 그리고

어떤 때 간장, 된장, 고추장으로 간을 맞추는가를 알려 주려고 했다.  그것은 집마다 간맛들이 조금씩 다

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양념그릇들을 살피게 한다. 집집마다 입맛을 내는 취향이 다른 까닭이다. 새 며느리에게 입맛의

취향을 가르칠 때는 찌개를 끓여 손수 보여 준다. 한 집안의 찌개 맛은 입맛의 집안 내력을 구체적으로 보

여주는까닭에서이다.

 

이렇게 며칠동안 길들이기를 한 다음 시어머니는 새 며느리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겨 주었다.

"내가 막 시집와서 시어머님으로 부터 들었던 말을 그대로 들려 주마.

'곡식도 한가지 거름만 먹으면 죽는다. 사람의 목숨도 곡식의 목숨처럼 여러가지를 골고루 먹어야 튼튼

하다. 꿀 같은 것은 양념을 치지 않아도 잘먹는다. 하지만 거친 음식일 수록 맛을 잘 내야 먹으려고 하낟. 입에 맛는 음식이 따로 없느니라.'

 

이렇게 돌아가신 시할머니께서 나에게 타이르셨다. 새애기도 잘 들어 두고 그대로 시행하면 가솔들의 몸

튼튼하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가솔들이 골고루 먹도록 애를 써야 한다."

 

왜 과감함 것에 빠져 용감하면 죽는 것인가?

곡식도 한 가지 거름만 먹으면 죽는다고 했던 시어머니의 말은 새겨 들으면 그 까닭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쇠고기의 영양가가 높다고 그것만 먹으면 살 수가 없고 쌀밥만 좋다고 그것만 먹어도 살지 못한다. 이처럼

한가지에만 치우쳐 마음을 쓰고 행동을 부리면 그 끝은 망하게 마련이다.

생각을 결정하고 행동으로 옮기면 그 나름대로 일에 따라 용기를 내야 한다. 그러나 성인은 한가지 생각

에 치우쳐 용맹을 떨치려고 한다. 그래서 군자의 용기는 치우치지 않는 것을 따르지만 소인의 용기는 치우

치는 것을 따르려고 하는 것에서 차이가 드러난다.

 

황희 정승의 용기는 덕선에서 비롯된 것이고 성삼문의 용기는 충의 에서 비롯된 것이며 임꺽정의 용기는

혈기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죽음을 불사하는 전승의 용기도 있다. 이러한 용기가 성인에게는

선이 되지만 소인에게는 불선이 된다고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성인은 강강 맹렬을 멀리 하고 소인은 그러

기를 탐하기 때문이다.

 

하나에 치우치는 용감이란 부드럽고 약한 것이 굳고 강한 것을 모른다. 끝가지 굳건해야 하고 강해야 하며

사납고 열열한 것이 이긴다고 여기는 치우침 때문에 여러 탈을 가져오게 되는 줄을 소인의 용심은 모른다.

외곬로 치우치면 생각과 행동은 강강하고 맹렬하게 빠지고 그렇게 빠지는 것은 불선으로 동양정신은 보

는 것 이다. 강강하고 맹렬하게 앞으로 나아가려고 할 뿐 피할 것은 피하고 멀리 할 것은 멀리하면서 화근

을 미리 없앨 줄 모르는 것이 용어감이라고 헤아려도 무방할 것이다.

 

불감이란 무슨 말인가.

중용은 치우침이 없는 마음과 몸가짐에 속하고 중도 역시 시비의 분별을 떠나 어울리는 길을 찾는 것을

것을 뜻한다. 중용과 중도는 외곬로 치우치지 마라 함이 아닌가!

노자의 부지와 무지 또한 중용과 중도의 지에 속하고 위하 역시 그러하다. 일에는 해야 할 때가 있음을 알

고 그일을 해야 하는 계기를 아는 것은 만용이나 결단을 멀리하게 된다.

 

 

어떤 편견 이나 독단이나 욕심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용심을 비우고 근본이치를 잘 밝히는 것을 바탕에

두고 일에 임하면 그 도한 만용이나 결단을 멀리 하게 한다. 어떤 편견이나 독단이나 욕심에서 비롯되는 것

이며, 용심을 비우고 근본이치를 멀리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은 인간사에는 이해가 끼여들기 때

문이다.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이 별개라고 여기면 만용이나 결단이 용솟음치게 된다. 이러한 시비분별을

세상이 싫어하는 것이라고 노자는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세상이 왜 그러한지는 성인도 몰라 생각을

하고 행동을 옮기는 데 어려워 한다는 것이 아닌가!

 

 

하늘은 분별해 심판하지 않는다.

옳은 것은 선이고 그른것은 악일 까

좋은 것은 선이고 싫은 것은 악일가

싱싱한 것은 선이고 썩은 것은 악일까

향기는 선이고 구린내는 악일 까

깨끗한 것은 선이고 더러운 것은 악일까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지면 인간은 그렇다고 수긍한다. 이처럼 인간은 선악이란 시비의 분별에 따라 나름대

로 느끼고생각하며 이해하고 판단한다. 그러나 노자는 이러한 선악의 분별이나 차별의 시비는 오로지

인간의 것일 뿐 자연은 아니라고 말한다.

 

낚시꾼에게 낚시질이 악이라고 하면 펄쩍 뛸 것이다. 낚시질은 정신건강에 좋다고 항변을 늘어놓은 다음

그러므로 낚시는 악이 아니라 선이라고 할 것이다. 낚시질이 인간의 정신을 건강하게 한다는 판단은 철저

하게 인간의 것일 뿐 자연은 아니다. 왜냐하면 물고기에게는 목숨이 달린 문제이므로 물고기의 편에서 본

다면 그보다 더한 악은 없기 때문이다.

 

가뭄이 들어 산하가 타면 비를 바라고 장마가 들어 홍수가 나면 비를 원망한다. 알맞게 내린 비는 선이고

지나치게 많이 내린 비는 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판단일 뿐이다. 가랑비도 내리고 소나기도 내리

고 폭우도 내린다. 비가 내리는 자연일 뿐 선악에 따라 많이 내리고 적게 내리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인간의

편에 정해 놓고 선악의 분별을 할 뿐이다.

 

만일 인간 중심을 벗어나 우주만물을 바라보면 인간들의 선악이 얼마나 편견인가를 살필 수가 있다. 천지

가 인간만을 위해 있는 것이라면 화성이나 금성에 가서는 왜 살 수 없으며, 지구에서도 사막과 설원은 왜

있으며 독거미와 방울뱀은 왜 있을 것인가! 천지는 만물이 있는 곳이지 인간만을 위해 마련 된 곳은 아니다.

 

 

인간을 중심으로 보면 어느것 하나 시비 아닌 것이 없고 투쟁아닌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만이 빈부

귀천의 호오를 따져 차별하고 선별하기 때문이다. 천지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있고,

있을 만큼 있으면 무엇이든 사라진다. 이처럼 존재하는 것이면 성명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동양정신은 파악

하게 되었다.

 

성명은 천지의 뜻이다 성은 하늘의 뜻이고 명은 땅의 뜻이다. 존재하는 것이면 이러한 성명을 벗어날 수가

없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모든 존재는 그 성명에 순응하며 살지만 인간만이 자연을 어기려고 한다. 노자의

무위자연은 자연의 성명에 어긋나는 짓을 하지 마라 함이다. 물론 아무리 인간이 어긋나는 짓을 할지언정

천지의 그물을 빠져 나갈 수는 없다. 진시황 이 죽지 않으려고 불사약을 찾아 �하를 누비게 한 것은 부질

없는 짓이었다. 태어난 것은 죽는다. 즉 생성된 것이면 소멸하고 그 소멸로 부터 다시 생성된다.

 

이러한 생성 소멸에는 억지가 없다. 누구는 한번만 태어나고 누구는 두번 태어나는 짓을 천지는 하지 않

는다.  그러한 연유를 노자는 다음처럼 밝히고 있다. 하늘의 도는 다투지 않고 잘 이기며, 말을 하지 않고

도 잘 응하며 부르지 않아도 저절로 오고, 잠자코 가만히 있어도 뜻을 잘 세운다. 하늘의 그물은 넓고 넓어

성글지만 어느것 하나 빠져 나가게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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