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 쫓겨다녔던 조정의 무리들은 충무공을 놓고 시비를 걸었지만 백성은 충무공을 믿고 따랐다. 이는 충무공이 나라를 지키는 장수였지 궁궐의 문턱이나 지키는 장수가 아니었던 까닭이다.
백성을 믿고 따르는 장수는 덕장이다. 충무공은 침입해 온 왜군과 먼저 싸움을 걸지 않았다. 목을
찾아 기다렸다가 처들어 오는 적을 물리치곤 했다. 허술한 수군의 장비로 막강한 왜군의 해군력을 맞아
맞받아치면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충무공은 헤아렸던 것이다.
이름난 사냥꾼은 사냥개를 혹사시키지 않는다. 못난 사냥꾼이 사냥개를 온 골짜기에서 헤매게 할 뿐이
다.명포수는 산짐승의 길목을 먼저 살펴 사냥개를 풀어 놓고 사냥감의 뒤를 �도록 한다.
그리고 목에 기다리고 있다가 사냥감을 채는 것이다.
충무공은 왜군을 섬멸하는 데 병졸을 혹사시키지 않았다. 주변을 잘 살펴두고 왜군이 들이닥칠 길목
을 잡고 기다리게 한 다음 왜군이 힘을 과시할 때 허를 찔러 무찌르게 했다.
충무공이 13척의 군선으로 2백여 척의 왜군 선단을 무찔러 버린것은 군사력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다. 충무공이 싸움을 먼저 걸지않고 기다렸다가 걸어오는 싸움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용병의 나아감은 지
모와 용기만 앞세워 나아가 싸우는 것이 진이며, 싸움을 걸어오는 쪽의 허점을 찾아 기다린 다음 그 허
점을 찾을 때까지 기다기는 것이 무행이다.
용병의 무비란 무엇인가?
어깨가 없으면 팔을 휘둘러 댈 수 없다. 팔은 어깨를 믿고 힘을 부린다. 힘을 앞세워 남용하지 않고 힘
을 비축해 두면 그것이 무비이다.
용병의 무적이란 무엇인가?
적을 패하고 도주하면 적은 없어진다. 진군해 오는 적을 밀려오는 족족 물리쳐 버릴 수 있는 용병술 앞
에는 무적이다. 그러므로 무적은 승전의 징표인 셈이다.
용병의 무병이란 무엇인가?
병사의 손에 들린 총을 믿지 않고 병사의 마음을 믿는 것이 곧 무병이다. 말하자면 병기보다 는 병사를
소중하게 여기고 병력은 병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병사에 있다는 것이 곧 무병인 셈이다.
위와 같은 무행, 무비, 무적, 무병 등은 용병의 도덕에 해당한다. 도덕이란 하늘의 뜻을 말하며 그 뜻은
목숨을 소중히 하는 데 있으므로 군 역시 그 도덕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전쟁을 하지 않는 것이 용병의 도덕이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용병의 도덕을 무시할 것이 아니
라 그 도덕을 따라야 한다고 노자는 보았다. 그래서 노자는 다음처럼 절실하게 말하고 있다.
적을 얕보는 것보다 더 큰 탈은 없다. 적을 얕보고 소홀히 하면 내가 지닌 보물을 단번에 잃게 된다. 그
르므로 병력을 일으켜 서로 증강하는 것을 슬퍼하는 자는 승리한다. 왜군의 장수들이 충무공의 병기를
얕보고 덤볐다가 참패를 했었다. 이는 싸움을 건 쪽은 패하고 걸어오는 싸움을 기다렸던 객이 승리하는
용병의 증거이며, 병기의 힘만을 믿고 나아가는 쪽이 기다리는 쪽을 이길 수 없다는 증명이다. 용병의
주와 진은 적을 경시하는 데서 비롯되고 용병의 객과 퇴는 적을 소흘하게 다루지 않는 데서 이루어진다.
적을 얕보고 전쟁을 일으키면 백성은 가시밭길을 걷게 된다. 장수가 주둔한 병영에는 가시나무가 돋아
나고 논밭은 잡초로 무성하게 된다는 말은 곧 백성이 굶주리게 된다는 말과 같다. 그러면 백성은 소중
한 것을 잃고 만다. 소중한 것이란 무엇인가. 목숨이다. 그러므로 병기의 힘만을 앞세워 전쟁을 도발하
는 것은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탕진하는 꼴이 된다.
군비를 증강하고 힘으로 강대국 행세를 하려 했던 소련이 결국 망하는 꼴을 목격했다. 무기를 만들어 내
는 중공업은 발달했으면서도 백성의 생활을 돕는 경공업은 보잘것 없었다는 소련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인가. 군대가 강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것이 사실임을 입증해 준 셈이다. 군사력 증각을 서로 경쟁하는
것을 슬퍼하는 쪽이 승리를 거둔다는 노자의 말은 냉전시대의 종말에서 참말이 되었다. 여기서 승리란
전쟁을 하지 않고 얻는 것이고 그러한 승리는 백성을 행복하게 할 수가 있다.
전쟁을 일삼는 군대만 무서운 것이 아니다. 정치의 맛을 본 군도 역시 무섭다. 군사정치 역시 항병상가
의 일종인 까닭이다. 정권의 안보가 군의 수중에 있다면 나라는 곧 병영인 셈이고 모든 백성은 병졸과
다를 바가 없다. 나라를 지킨다는 것과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을 혼동하게 되면 시민이 곧 둔대처럼 되
어 인생을 훈련받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 그러면 소중한 보물은 명령의 복종에 전당잡히고 만다. 노자는
이를 슬퍼했다.
<원문의역>
병을 쓰는 것에 관한 말이 있다. 나는 감히 주가 되지 않고 객이 되고, 감히 한 뼘쯤 나아가지 않고 몇발
뒤로 물러선다. 이는 행동하지 않기를 행하는 것이며, 완력을 사용하지 않고 물리치는 것이요. 병을 일
으키지 않고 붙잡는 것이고, 적의 저항없이 나아가는 것이다.
적을 얕보는 것보다 더 큰 탈은 없다. 적을 얕보고 소홀히 하면 내가 지닌 보물을 단번에 잃게 된다. 그
러므로 병력을 일으켜 서로 증강하는 것을 슬퍼하는 자는 승리한다.
<도움말>
제 60장은 용병의 도덕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게 한다. 제 68장의 불무를 더 상세히 헤아리게 한다. 목숨
을 해치는 전쟁을 위해 용병해서는 안되고 백성의 목숨을 소중히 하는데 용병의 참뜻이 있음을 제 69장
은 말하고 있다.
불감위주이위객이 주는 전쟁을 일으키는 쪽이고객은 걸어오는 전쟁을 기다리는 쪽이다. 나아가 군대의
힘을 한 인간의 야망으로 사용하는 것도 용병의 주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충무공은 용병의 객을 보
였고 박정희는 용병의 주를 보였다. 주는 적을 얕보고 객은 적을 세심하게 경계한다.
불감진촌이퇴척의 진은 전쟁을 일으켜 나아가 싸우는 것이고 퇴는 걸어오는 저쟁을 기다리는 것이다.
진은 적을 얕보는 것이며 퇴는 적을 무시하지 않는 것이다.
무행은 전쟁을 도발하지 않음이다.
괴무비의 괴는 물리친다는 뜻이다.
잉무적의 잉은 나아가 취함이다.
집무병의 집은 승리를 거둔다는 말이다.
상오보의 상은 잃어버리는 것이며 보는 목숨이라고 보아도 된다. 소중한 것은 보이며 노자는 목숨을 소
중히 하는 것을 자검. 불감위선이라고 밝혔고 이를 삼보라고 말했다.
항병상가의 항은 들어 일으킴을 뜻하고 상가는 군사력을 다투어 서로 증강함을 말한다.
애자 승의 승은 전승을 뜻하지만 백성의 안녕을 뜻한다고 보아도 된다.
제 70장 언제쯤 노자의 탄식이 멈출까
왜인간은 노자를 울리는가
아무리 무위자연을 말하지만 노자 또한 인간이다. 노자는 목숨과 우리의 목숨은 다를 것이 없다. 노자
역시 살기를 바랐으므로 섭생을 소중히 했던 셈이다. 섭생이란 목숨이 내 것은 아니란 생각이다.
무릇 목숨이란 살아있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본능에서 성인 인들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나 성
인은 삶을 구걸하지 않으며 명에 따라온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그래서 성인은 인명재천을 의심
하지 않는다. 다만 범인이 그것을 모를 뿐이다.
노자의 무위자연은 무릇 목숨이라면 무엇이든 소중히 하라는 것에서 시작된다. 도의 품안을 떠나지 않
는것이 무위요. 자연이다. 도를 만물의 어머니라고 밝힌 것은 그 때문이다. 어머니의 품안에 안겨 있는
것처럼 마음을 쓰고 행동을 하면 그것이 곧 자연이요. 무위이다.
노자는 영악스런 사람이 되지 말고 갓난 아이같이 되라고 한다. 갓난 아이는 어머니의 품안을 떠나지
않는다. 갓난 아이는 어머니가 없으면 울고 품에 안기면 젖을 빨다 편안히 잠을 잔다. 그 품안이 목숨의
둥지요, 보금자리가 아닌가. 천지를 그렇게 맞이하고 누리는 것이 무위자연이다.
어머니의품안을 떠나 안타깝게 사는 인간을 향해 그 품안으로 되돌아가라고 노자가 아무리 말해도 인간
들은 못들은 척 하고 있는 중이다. 인간이여. 생활의 윤택을 원하는가 아니면 목숨의 윤택을 원하는가.
노자는 목숨의 윤택을 택하라고 한다. 그러나 인간은 생활의 윤택에 조급증을 떨며 생활의 윤택이 곧 목
숨의 윤택이라고 착각한다.
보다 많은 부를 소유하고 쟁취하기 위하여 얼마나 마음을 태우는가?목이며 손가락을 값비싼 보석으로
치장하려고 얼마나 속을 태우는가. 온갖 가전제품을 마련하고 문화생활을 한다면서 얼마나 피곤한가.
정말 부귀영화가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이렇게 자문해 보라. 결코 생활의 윤택이 마음을 편케 하는 것
이 아님을 알게 된다. 마음이 불편하고 초조하고 괴로우면 그만큼 목숨은 상처를 입는다. 몸이 귀중한
줄만 알고 마음이 귀한 줄모르면 목숨은 편할 수가 없다. 현대인은 이를 모른다. 그래서 겉치장만 하고
속은 썩든 말든 애를 태우고끓여 제대로 사는 것을 잊어 버렸다.
목숨을 아끼면서도 소중한 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착각은 없다. 이러한 착각을 노자는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노자는 무위를 말했고 자연을 말했다. 그러나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 인간은 여전히 인생을 시
비의 저울에 달고 물질의 탐욕에 바람이 나 몸둘 바를 모른다. 그러므로 노자의 다음과 같은 말은 아직
도 살아 있다.
말에는 근원이 있고, 일에는 근본이 있다. 내가 하는 말은 아주 알기 쉽고 아주 행하기도 쉽다. 그러나
세상은 내말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하는 구나. 나에게는 다만 무를 아는 것만 있다. 이때문
에 세상은 나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다면 그만큼 나는 귀한 것이다. 그래
서 성인은 갈포옷을 입고 옥을 가슴에 품는다.
자유당 정권이 싫었다. 무능해서 6.25를 막지 못했고 간신들이 판을 쳐 부정부패가 극심해 나라를 썩
게 했다. 소인배의 치자들이 정권욕에만 놀아나 백성만 보릿고개의 배고픔에 시달리게 해 자유당 정
권을 미워 했다. 4.19 덕으로 이루어졌으면서도 자리다툼으로 세월을 보냈고 여전히 배고픈 세상은 벌
집처럼 웅성거렸다. 그러한 틈새에 군이들이 야망을 품고 5.16을 도모했다. 그리고 도탄에 빠진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군대가 일어섰노라고 선언했다.
패거리싸움만 할 뿐 나라걱정을 뒤로 밀쳤던 정객들에게 백성은 진절머리를 앓고 있었던 터여서 백성
의 마음 속에는 '오죽하면 군대가 앞장서 나라를 구하겠다고 하겠는가!' 는 정서가 없었던것도 아니었
다. 그러나 권력의 고깃맛을 본 군대는 물러가지 않고 나라를 지키는 것만이 아니라 다스리겠다고 나
왔다. 그러자 백성은 밀어닥칠 무단정치의 시대를 예감하면서도 보릿고개를 없애겠다는 말에 체념했
었다.p1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