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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아침 출근길, 갑자기 북촌 골목길이 보고 싶다며 회사와 정 반대 방향으로 버스를 갈아타는 사람을 만난다면 , 부럽다. 그가 다음날 사표를 내고 그다음 날 밤 인도의 어느 부둣가를 어슬렁어슬렁 걷고 있다면, 부럽다. 그의 낡은 배낭 속에 먹을 거리, 입을 거리 대신 빨간색 하모니카 하나만 달랑 들어 있다면, 부럽다.
며칠 후 그가 부다페스트의 호숫가 어느 마을에서 꼬마 다섯을 모아 놓고 작은 연주회를 연다면, 부럽다.
이 완전한 자유는 가끔 '부럽다'에 두 글자를 더한 다섯 글자의 반응을 낳기도 한다. 그가 여행에서 돌아와 맨 먼저 한 일이 쌀독에 쌀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살피는 일이 아니라 동네 서점을 찾아 그동아 어떤 책이 나왔는지 살피는 일이라면, 정말 부럽다.
부럽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하고 난 후 뒷감당에 자신이 없다는 뜻이다. 우리는 자유를 향해 달려가다 늘 현실이라는 벽, 욕심이라는 벽에 가로 막힌다. 그 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벽위에 부럽다, 라고 큼지막하게 낙서를 하는 것뿐이다.
벽을 부수거나 담쟁이처럼 그 벽을 타고 넘으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다. 이렇게 우리는 완전한 자유와 적당히 거리를 두고 타협이라는 것을 한다. 타협, 좋지않은 어감을 지닌 말이다.
하지만 자유에 관한 한 우리는 타협을 해야 한다. 타협을 잘 해야 한다. 현실을 완전히 무시할 수도, 욕심을 완전히 내려놓을 수도 없는 우리에겐 타협 이외의 선택이 없다. 타협이 만들어 준 자유, 나는 그것을 51%의 자유라 부른다.
51%의 자유란 움직임에 한계가 있는 자유를 말한다. 두 발은 땅에 딛고 두 발을 제외한 나머지 몸과 마음에겐 모든 움직임을 허락하는 것이다. 두 발까지 마구 움직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우리는 모두 생활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 하는 생활인이다.
자유인이 아니라 생활인이다. 생활인은 생활인에게 허락된 만큼만 자유를 욕심내야 한다. 물론 그것은 불완전한 자유, 불충분한 자유다. 하지만 완전한 자유가 내 인생이 아니라는 판단이 섰을 땐 51%의 자유라도 붙잡아야 한다.
전부가 아니면 전무라는 생각은 정말 자유롭지 못한 생각이다. 그래도 타협은 싫어, 라고 멋진게 말하는 살마은 결국 현실에 굴복하고 만다. 한두번은 현실을 보기 좋게 쓰러뜨릴 수도 있지만 현실을 쓰러뜨린 경력은 생활인의 인생에 그다지 도움이 안 된다. 부담으로 남는다. 결국 타협도다 못한 굴복을 하게 만든다.
타협이 만들어 준 51%의 자유, 그것은 생활인이 욕심 낼 수 있는 자유의 최대치다.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자유인의 눈엔 그것이 보잘것없는 수치일지 모르지만, 우리같은 생활인에겐 51%가 곧 100%인 셈이다. 타협이라는 말은 자유를 앞에 두고 우리가 쓸 수 있는 말 중 가장 멋진 말일지도 모른다.
세상 사람의 99%는 자유인이 아니라 생활인이니까.
51%의 자유만으로도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하다. 내일모레는 아닐지라도 내년 휴가 땐 당신도 인도를 욕심낼 수 잇다. 지금 당장 부다페스트에서 하모니카 연주회를 할 수는 없지만 동네 음악학원 주말반은 등록할 수 있다.
쌀독을 채우고 남은 돈으로 아프리카에 사는 한 소녀의 저녁밥을 책임질 수 있다. 당신의 이런 불완전한 자유,불충분한 자유, 51%의 자유를 지켜본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부럽다.
인생의 목적어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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