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만권을 읽으면..

짧은이야기, 긴 생각/이어령/

다림영 2023. 7. 8.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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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창이라고 부르는 이유

창을 가리키는 영어의 Window는 '바람의 눈(Wind+Eye)'라는 뜻에서 나온 말이라고 합니다.

집에 창이 있다는 것은 영혼에 눈이 있는 것처럼 아름다운 일입니다. 

우리는 똑같은 바람의 눈, 영혼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배웁니다. 왜 학교를 배움의 창(學窓)이라하고 왜 엣친구를 동창(同窓)이라 불렀는지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창앞에 서면 풀잎을 흔들던 작은 바람들이 마음을 흔드는 아주 작은 바람들이 맑은 시선으로 다가옵니다. 

창문을 굳게 닫은 아이들을 우리는 자페아라고 부릅니다. 지금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블라인드(Blind)를 내린 어두운 방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창문을 여세요. 마음의 문을 여세요. 거기에 새로운 빛과 바람이 있습니다. 

 

모든 것에는 결이 있어요

한국말에는 참으로 많은 결이 있습니다.

나무에는 나뭇결, 물에는 물결, 사람의 살에는 살결이 있지요.

머리에도 머릿결이 있고 눈에도 눈결이 있고, 마음에도 마음결이 있지요.

 

종이를 찢어 보세요. 결을 따르지 않으면 마음대로 찢기지 않습니다. 

옥을 갈 때에도 결을 거스르면 다른 돌과 다름없이 빛이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치理致를 밝히고 순리順理를 따르고 사리事理를 따지고

분별하는 말에는 모두 '理'자가 붙어 있지요.

 

생각하고 행동할 때마다 결부터 찾아가세요. 꿈결을 따라 마음의 결, 삶의 결을 따라가면

땅이 보이고 하늘이 보이고 세상이 한결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비행기

사이먼 뉴컴교수는 인간은 절대로 공기보다 무거운 엔진을 달고 하늘을 날 수 없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했습니다. 1901년의 일입니다. 그러나 1903년 12월 17일, 그 글의 인쇄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자전거포를 운영하던 라이트형제가 하늘을 날았습니다.

 

키티호크의 풀밭에서 열기구나 글라이더처럼 바람에 떠다닌 것이 아니라 1마력의 무거운 엔진을 달고 12초동안 36미터를 날았습니다.  활공이 아니라 비행을 한 것이지요.

신은 인간에게 날개를 달아주진 않으셨지만 하늘을 날 수 있는 꿈을 주셨습니다. 지금의 현실이 옛날에는 모두 다 꿈이었지요.

 

닐 암스트롱이 최초로 달에 갔을 때 그의 손에는 작은 천 조각이 쥐어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키티호크 상공을 날았던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 플라이어 1호와 같은 천 조각이었습니다. 

 

달 위에 새겨진 인류의 첫발자국 뒤에는 하늘을 향한 라이트 형제의 꿈이 있었던 것이지요. 

라이트 형제의 꿈은 뉴컴 교수의 이론을 이겼습니다. 

 

꿈을 꾸는 사람, 꿈을 현실로 만드는 사람의 무게는 공기보다 더 가볍기 때문에 하늘을 날 수가 있는 것이지요. 

 

아르키펠라고의 달걀

달걀을 삶으면 애초의 원형 그대로입니다. 세걔의 달걀은 세개의 달걀로 제각기 따로 있습니다. 달걀을 깨어 함께 찌면 모든 것이 하나로 섞입니다. 세개의 달걀은 개체의 모양을 살실하고 그냥 하나가 됩니다. 

 

그런데 달걀 프라이는 어떻게 될까요? 보십시오. 노른자위들은 따로 따로지만 흰자위는 서로 구별 없이 하나로 붙어 있습니다. 세걔의 달걀은 세개의 달걀인 채로 있으면서도 하나의 결합된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나를 잃지 않고서도 남들과 어울리려면 개성을 가진채로 조직안에서 활동하려면, 삶은 달걀이나 달꺌찜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달걀프라이를 하듯이 하나는 이어진 하얀 바다위에 노랗게 떠잇는 아르키펠라고처럼 살아야 합니다. 

 

작은 생각

등자鐙子는 사람이 말에 오를 때 필요한 발판입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말 왼쪽에만 달았다고 해요.

그런데 누군가 말 오른쪽에도 똑같은 등자 하나를 더 달 생각을 했지요. 그 순간 등자의 의미가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누구나 두 다리로 등자를 딛고 일어설 수 있게 된 겁니다. 

달리는 말 위에서도 마치 땅에 딛고 있는 것처럼 칼을 휘두르고 활을 쏘고 깃발을 들고 다릴수 있게 된 것이지요.

 

단지 등자 하나를 더 단 것인데 말이 무서운 신무기로 변하여 일기당천一騎當千, 말을 탄 기사 하나가 천 명의 보병을 이기는 세상이 온 것입니다. 그래서 왕과 기사 계급과 기사도의 새로운 세력이 일어나 왕국의 크기가 달라지고 성곽의 높이가 달라졌지요. 기사들의 이야기가 로망스가 되고 [돈기호테]같은 소설이 나오는 문화가 탄생했지요.

 

세상을 바꾼 것은 말이 아니라 등자입니다. 아닙니다. 등자가 아니라 생각입니다. 아닙니다. 그냥 생각이 아니라 작은 생각입니다. 

당신의 작은 생각이 세상을 바꿉니다. 

 

지우개가 달린 연필

연필은 쓰기 위해 있는 것이고 지우개는 지우기 위해 있는것, 그런데 지우개 달린 연필이 있어요. 가난한 화가 지망생 리프만이 생객해낸 것이지요. 

 

두개의 다른 기능을 한 몸에 지니고 있는 지우개 달린 연필 모순의 연필 , 삶의 노동은 쓰고 지우고 , 지우고 쓰는것,  볼펜의 시대에도 지우개 달린 연필이 필요한 까닭, 컴퓨터로 글을 쓰는 시대에도 옛날 지우개 달린 연필이 그리운 까닭. 우리에게 삶이 있는 한 지우개 달린 연필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개미들처럼 돌아오라

개미들은 먹이를 찾을 때 우왕좌왕 동서남북으로 헤매고 다니지요. 일정한 목표도 뚜렷한 규칙도 없이 그냥 방황합니다. 하지만 일단 먹이를 찾으면 곧바로 자기 집으로 돌아옵니다. 일직선으로 먹이를 물고. 방황을 두려워하지 말아요 . 방황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찾고 있다는 것.  

 

그 어지러운 곡선들은 먹이를 찾는 상상력의 흔적, 어디엔가 숨어 있을 보물을 발견하려는 탐색의 열정이지요. 그렇지만 그 곡선은 언제든지 집으로 돌아오는 직선이 있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그리스 말로 떠돌아다니는 것을 '알레테이아(Aleteia)'라고 하고 진리를 뜻하는 말 역시 그 음이 같은 '알레테이아(Aletheia)'라고 합니다. 'h' 자 하나로 방황이 진리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수 있습니다. 

 

방황을 두려워하지 말아요 돌아갈 집이 없음을 걱정하세요. 

 

우물에 빠진 당나귀

어느 마을에 당나귀 한 마리가 우물에 빠졌습니다. 당나귀의 주인인 농부는 슬프게 울부짖는 당나귀를 구할 도리가 없었지요. 마침 당나귀도 늙었고 우물도 쓸모없던 터라 농부는 당나귀를 단념하고 동네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습니다. 

 

동네사람들은 당나귀와 우물을 파묻기 위해 제각기 삽을 가져와서는 흙을 파 우물을 메워갔어요. 당나귀는 더욱더 울부짖었지요.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나자 웬일인지 당나귀의 울음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거예요. 

 

동네 사람들이 궁금해서 우물속을 들여다보니, 놀라운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당나귀는 자기를 파묻기 위해 던져진 흙을 털어 바닥에 떨어뜨리며 그렇게 발밑에 쌓인 흙더미를 타고 점점 높이 올라오고 있었던 거예요.

 

마침내 당나귀는 자기를 묻으려는 흙을 이용해 무사히 그 우물에서 빠져 나올수가 있었습니다. 모든 삶에는 거꾸로 된 거울 뒤같은 세상이 있습니다. 불행이 행이되고, 행이 불행이 되는 새옹지마의 변화 같은 것이지요.

 

뒤집어 생각해 보세요. 우물 속 같은 절망의 극한 속에서도 불행을 이용하여 행운으로 바꾸는 놀라운 역전의 기회가 있습니다. 

 

어미곰처럼

곰의 모성애는 인간보다 더 깊고 따뜻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린 것이 두 살쯤 되면 어미 곰은 새끼 곰을 데리고 산딸기가 있는 먼 숲으로 간다고 합니다. 평소에 눈여겨보았던 산딸기 밭이지요.

 

어린 새끼는 산딸기를 따 먹느라고 잠시 어미 곰을 잊어버립니다. 그 틈을 타서 어미곰은 몰래, 아주 몰래 새끼 곰의 곁을 떠납니다. 그렇게 애지중지 침을 발라 기르던 새끼를 왜 혼자 버려두고 떠나는 걸까요?

왜 그렇게 매정하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걸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건 새끼가 혼자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지요.

 

언제까지나 어미 품만 의지하다가는 험한 숲 속에서 생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발톱이 자라고 이빨이 자라 이제 혼자서 살만한 힘이 붙었다 싶으면 어미 곰은 새끼가 혼자 살수 있도록 먼 숲에 버리고 오는 겁니다. 

새끼 곰을 껴안는 것이 어미 곰의 사랑이듯이 새끼곰을 버리는 것 또한 어미 곰의 사랑인 거지요.

 

그래요 . 우리에게도 그런 사랑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산딸기밭을 눈여겨봐 두 어야 해요. 아이들이 정신을 팔고 있는 동안 몰래 떠나는 슬픈 사랑의 연습도 해둬야 합니다. 눈물이 나도, 뒤돌아보지 않는 차가운 사랑을 말이지요. 

 

그게 언제냐고요?

벌써 시작되었습니다. 

처음 걸음마를 배울 대 잡았던 두 손을 놓아주었던 때가 있었잖아요. 그때부터 시작된 일이지요. 

매일매일 무릎을 깨뜨리는 아픔이 있더라도 어머니와 따로 살아갈 수 있는 그 걸음마를 위해 손을 놓아주세요. 탯줄을 끊는 순간부터 그 연습은 시작된 것입니다. 

 

어머니에게는 도 하나의 사랑, 얼음장 같은 차가운 사랑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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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이 넘어도 스물다섯이 넘어도 모두를 껴안고 살고 있습니다. 

나이듦에 따라 천지의 일들이 모두 버겁기만 합니다. 

그 오래전부터 그렇게 연습을 해놓고 버리지 못하고  힘들어합니다. 

왜 나는 버리지를 못하고 오늘도 여전히 걱정을 하며 살고 있는 것인지요....

 

무언가 생각할 주제들이 참 많습니다. 모든 책들이 그렇지만

이어령선생님의 각별한 글을 읽고 많은 생각에 잠깁니다. 

 

냉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한 이유로  마음부대끼며 몇시간을 보냈다.

이미 지나간 일이 되었으므로  생각지 않기로 한다.

부정적 사고를 털어내며 

살아있고 일을 하고 무언가 끄적이고 있음에 

더없는 감사를 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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