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닦는 공부를 하려면
공부하는 수행자의 자세를 바로잡고자 큰스님게서는 최잔고목 즉 '썩고 부러지고 마른 나무 막대기'비유를 드십니다.
"부러지고 썩어 쓸데없는 나무 막대기는 천지간에 어디 한 곳 쓸데가 없는 , 아주 못 쓰는 물건이다. 이런 물건이 되지 않으면 공부인이 되지 못한다. 공부인은 세상에서 아무 쓸 곳이 없는 대낙오자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오직 영원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희생하고, 세상을 아주 등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세상에서뿐만아니라 불법 가운데서도 버림받은 사람, 쓸데없는 사람이 되지 않고는 영원한 자유를 성취할 수 없는 것이다."
큰스님은 수행자들의 깨달음을 돕기 위해 스스로 최잔고목이 되신 분입니다.
오직 영원한 대자유를 위해 참고 이겨내야 한대이
"병 가운데 제일 큰 병은 게으름병이다. 모든 죄악과 타락과 싶래가 게으름에서 온다. 게으름은 편하려는 것을 의미하니, 그것은 최악의 근본이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 오직 영원한 대자유를 위해 모든 힘든일을 이겨내야 한다."
책을 보지말라. 지식에 안주하지 말라
큰스님의 수행승 5계중 네 번째가 "책 보지말라"입니다. 법정스님은 이 계율을 "지식에 안주하지 말라"로 바꾸어 말합니다.
성철스님은 대단한 독서가이자 장서가로도 유명하십니다. 그런데 책을 보지말라니요? 법정스님의 말씀에 다시 귀 기울여 봅니다.
"그 연배의 스님들 중에서 성철 스님처럼 책을 많이 , 그리고 널리 읽은 분은 없을 듯 싶은데, 책을 보지 말라고 한 것이다. 참선 수행자에게는 그것이 설사 부처나 조사의 가르침이라 할지라도 눈엣가시와 같다는 것. 스스로 탐구해서 몸소 체험하는 일만이 참으로 자기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3천배 시키는 사연
"남을 위해 3천 배 하고 나면 그 사람에게 무언가 큰 심중의 변화가 옵니다. 그렇게 되면 그 뒤부터는 절하지 말라고 해도 절을 하게 되며 남을 돕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무언가 큰 심중의 변화', 그 경지로 오르는 사다리가 바로 3천배임을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그 큰 변화가 남을 위한 나의 변화임을 일러주시니, 큰스님의 뜻은 되새기면 되새길수록 깊어지고 넓어집니다.
문자의 가르침
"불립문자不立文字는 가장 마지막 순간에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것을 문자도 필요없고, 부처님 법문도 필요없고, 조사의 법문도 필요없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큰일입니다. .. 필요없다는 것은 병이 없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병자에게는 약이 꼭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본래의 건강을 회복할 때까지는 약을 곁에 두고 먹어야 합니다.
부처님이나 조사의 말씀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그럼 무엇에 의지하겠습니까? 제멋대로 생각하고 산다면 그건 외도요, 그런 사람은 악인이 되기 십상입니다. 부처님이나 조사의 말씀이 필요없을 수준에 이를 때까지는 반드시 그 가르침에 의지해야만 바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 기막힙니다
"참 불공이란 남을 아무리 많이 도와주었다고 해도 절대로 자랑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도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왼손이 하는 일을 바른손이 모르게 하라.'참 기막힌 말씀 아닙니까!
자기 왼손으로 남을 도무면서 자기 오른손도 모르게 하라고 했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이 알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즘 학생들에게 이 말이 좋게 들리는가 봅니다. 편지가 자주 옵니다. '스님 말씀하신 남모르게 남 돕자는 그 말씀을 평생 지키고 노력하겠습니다.' 고"
오늘도 많은 분들이 남모르게 남 돕는 일을 하며 환히 웃고 있을 걸 생각하면, 큰스님께서는 이 세상을 뜨시고서도 그 가르침으로 더 넓은 세상을 환히 비추고 계시두나. 합장케 됩니다.
니는 우째서 삥삥 돌기만 하노?
3천배를 하고 백련암으로 올라온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앞에 앉은 여학생에게 큰스님이 물었습니다. "니는 무슨 생각으로 절을 했노?"
"스님 저는 저를 위해 절하지 않았습니다. 남을 돕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절합니다."
"그래? 니는 어째서 삥삥 돌기만 하지? 바로는 못하나? 남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하지말고 '일체중생이 행복하게 해주십시오'라고 직접 기도하면 어때? 그렇게 하면 절하는 이 자체가 바로 남을 돕는 거 아이가. 모든 중생이 행복하게 해달라고 비는 살마이 되게 해달라는 거와는 다르지."
이렇게 절은 한 번 해도 남을 위해서 '일체 중생이 행복하게 해주십시오'라고 원을 세우고 절을 해라, 아무 생각없이 절하지 말고 절하는 것부터가 남을 위해 하는 게 되도록 하라고 가르치신 겁니다.
법전 스님과의 인터뷰
법정;선禪의 요체를 한 마디로 표현해 주시겠습니까?
성철: 요즘 추우니까 핫옷 입었제?
추우면 핫옷(누비솜옷)입듯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현상의 정체를 자각할 수 있는 개안開眼이 곧 선이라는 뜻이라고 법정스님은 풀이했습니다.
발아래를 보고 발 아래를 보라
"만길 봉우리 앞에 들말 달리고 천길 바다밑에 진흙소 소리치니
산호가지 위에 햇빛이 밝고 밝으며 흰학이 허공에 높이 나는도다.
발아래를 보고 발 아래를 보라. 달마의 한 종파가 땅을 쓸어 다하고 기이하고 기이하니
공자의 삼천 제자가 다 염불하는도다
이가 낭군과 박가 아씨는 서울 거리에서 춤추고
개미와 모기는 연화대 위에 있는도다.
가을바람이 불어 단풍잎을 흩으니 울타리가 누런 국화는 맑은 향기를 토하는도다.
훔훔 입제가 놀라서 입을 크게 벌리니
늙은 호랑이 사슴왕의 머리를 깨물어 부수는도다."
(1988년11월 해인사 겨울 수련회에)
'성철'에 담긴 뜻
입산하여 절에 들어와 산다고 다 스님이 되는 건 아닙니다. 오랜 기간 행자 생활을 거치는 게 예사고, 두 번의 계를 받아야진짜 스님이 됩니다.
성철스님이 권해서 제가 스님이 된 것처럼, 해인사에서 불교 공부에 전념하던 속인 이영주에게 스님이 되길 권한 스님은 당시 백련암에 머물던 동산 스님이셨습니다. 되바라지게 단도직입적으로 "내가 이리저리 공부했는데, 스님 생각은 어떻소?"라고 캐묻던 , 스님 될 마음도 없던 청년에게, 자신의 서원을 담은 법명 '성철性徹'을 내밀며 출가를 권유한 동산스님.
성철이란 법명은 "자성自性'을 확철確徹하게 깨쳐 불佛을 이루라"는 뜻입니다. 호연한 기개로 교학과 참선에 막 눈뜨고 있던 청년 이영주에게 스승인 동산 스님은 "부처가 되라"는 간곡한 바람을 담아 이 법명을 지어주신 것입니다. 제자 성철은 "만고의 진리를 향하여 초연히 나 홀로 걸어가노라"는 출가시로 그 뜻에 화답하였습니다.
원수가 턴당 가길 빌어야 진짜 종교인이제
"참선하는 것은 자기 마음을 밝히는 것이기 때문에 불교 신도나 스님네들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부나 수녀도 백련암에 와서 3천배 절하고 화두 배워 갑니다.
며칠 전에도 예수교 믿는 사람들 셋이 와서 3천배절하고 갔습니다. 이 사람들한테 내가 항상 말합니다.
'절을 하는데 무슨 조건으로 하느냐 하면, 하나님 반대하고 예수님 욕을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이 제일 먼저 천당에 가라고 축원하고 절하십시오' 이렇게 말하면 그들도 좋아합니다.
이런것이 종교인의 자세 아닙니까. 우리 종교 믿는 사람은 전부 다 좋은 곳으로 가고 , 우리 종교 안 믿는 사람은 모두 다 나쁜 곳으로 가라고 말한다면 그는 점잖은 사람이 아닙니다."
용서란 말은 없다
"사실 불교엔 용서라는 말 자체가 없습니다. 용서라는 말이 없다고 잘못한 사람과 싸우라는 말은 물론 아닙니다. 상대를 용서한다는 것은 나는 잘햇고 너는 잘못했다. 그러니 잘한 내가 잘못한 너를 용서한다는 이야기인데, 그것은 상대를 근본적으로 무시하고 하는 말입니다. 상대의 인격에 대한 큰 모욕입니다.
불교에서는 일체 중생의 불성이 꼭 같다고 봅니다. 성불해서 연화대 위에 앉아 계시는 부처님이나 죄를 지어 무간 지옥에 있는 중생이나 , 자성自性의 자리, 실상實相은 똑 같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죄를 많이 짓고 아무리 나븐 사람일도 겉을 보고 미워하거나 비방하거나 나아가 세속에서 말하는 용서를 할 수는 없는 겁니다. "
재벌부부에게 부탁하시기를
큰스님 신도 중에 모 재벌 부부가 있었는데, 추운 겨울의 백련암에서 누더기 차림으로 지내시는 스님 모습에 가슴이 아팠던 모양입니다. 따뜻한 털내의라도 사오겠다고 하자, 그들 부부의 마음을 꿰뚫어본듯 자비롭게 웃으시던 큰스님.
"나는 아무것도 필요없는 사람인기라. 하루 두끼의 무염식으로 좌선하면..., 처사가 경영하는 회사원들, 특히 공장의 근로자들에게 환희심을 가지고 털내의를 선물해주그래이. 그길이 보살의 길이요, 참 불공인기라. 자신의 욕망으로 죄업이 운무같이 쌓인 사람이 부처님 전에 불공 몇 번하고, 스님들에게 공양한다 해서 지옥고를 어찌 면하겠노?
중생을 위해 대자대비심을 일으켜 실천하는 사람이 바로 참 불자요, 먼 미래에 부처를 이루는 기초가 되는 것인기라. 알겠노? 내 청은 그것인기라."
그대가 서 있는 바로 그 자리
성불을 흔히 '부처가되는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이는 '부처되기'가 아니라 '본디 부처임'을 깨닫는 겁니다. 홀연 마음의 눈을 열어, 벼락 같이 깨닫는 것입니다.
큰 스님께서는 그 개달음의 성지로 해인 총림을 구상하셨습니다. 퇴색된 선종의 승풍을 되살리고자 한 봉암사 결사의 정신을 해인총림에 온전히 구현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해인사 장경각 법보전의 주련에 드리운 글귀도 가르칩니다. "부처님 계신곳은 바로 지금 그대 가 서 있는 그 자리"라고. 그걸 처절히 깨달으라고!
해인사 경내의 성철스님 사리탑 또한 큰스님 생전의 "자기를 바로보라"는 가르침을 좇아 나를 찾아가는 선禪의 공간으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집은 썩더라도 정신은 살아야지
"백련암에 와 보고 신도들이 왜 단청을 안 하느냐고 묻지요. 나는 단청한 집에는 안 살기로 했다고 말합니다. 노스님 한분이 단청하면 집이 오래 간다고 하더만요. 좋은말씀이지만, 20년 갈 집이 한 10년밖에 안 간다 해도 난 단청 안하고 10년 가는 집에서 살라 캅니다.
단청해서 호사스럽게 산다면 중의 근본정신은 썩어 버리지 않느냐 말이여. 정신은 썩고 집만 살면 뭐하겠습니까? 집은 썩더라도 정신이 살아야지. '최저의 생활에서 최고의 노력을 하자'는 선을 그어놓고, 그렇게 한번 마음에 정한 것은 잘 변경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드시고 됩니까?
사람들이 스님 드시는 걸 보고 "그렇게 드시고 됩니까?"라고 물으면 큰스님은 늘 자기 결심이 그렇다는 걸, 어긴 적 없는 원칙이라는 걸 얘기하셨습니다. "도를 하려면 먼저 가난부터 배워야 한다"는 원칙 말입니다.
"사람이 안먹으면 못살지요. 그래도 음식에 먹히면 안되겠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첫째 적게 먹고, 둘째 맛있는 것은 안 먹고, 간 없애버리고, 깨소금, 고춧가루 그런 거 다 없이 맨 음식 그대로 먹은 지 수십년 됐습니다.
전에는 또 생식을 했지요. 그때는 쌀가루하고 채소 한 가지로 한 10년 동안 했더니 나중에는 영양실조가 되고 이가 솟아올라 건강에 지장이 있었어요. 그래도 좋은 옷 안 입고, 좋은 음식 안 먹는다.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참으로 수도를 하려면 최저의 생활로 최고의 노력을 해야 한다는 그런 생활방침입니다.
나는 사람이다
가치관의 혼돈 속에서 갈피를 못잡고 헤매는 현대인들에게, 참된 삶을 위한 법문하나를 들려달라는 기자의 청에 큰스님이 일러주신 말씀입니다. '사람답게 산다'는게 얼마나 귀한 일일지 일깨워주는 가르침입니다.
"그거 벌거 아닙니다. '내가 사람이다'하고 생각하면 모든 고통이 없어질 겁니다. 사람이라고 하면 사람의 본분을 지켜야 하거든요. 개, 돼지 같은 짐승처럼 날뛸 수 없다는 말입니다. 개는 똥만 보면 뛰어가지요. 사람도 물질만 보면 쫓아가는 이들이 있어요. 뭐 다를게 있습니까. 욕심의 노예가 되면 동물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그럴 수 없지요.
사람이면 '사람'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런데 도대체 천지간에 '사람'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나는 사람이다'하고 살아야지요.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산다면 뭐 걱정할 게 있겠습니까. 그러려면 자기 자신을 보는 눈이 날카로워야지요.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
바른길-성철스님
한 중생도 부처의 지혜를 구비하지 않음이 없지만, 다만 망상 집착 때문에 증득하지 못한다. 만약 망상을 버리면 모든 자연스런 지혜와 걸림없는 지혜가 나타난다.
모든 중생들이 다 불성이 있으나, 번뇌가 덮여서 이를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다.
이와 같은 불성은 오직 부처만이 능히 안다.
불성을 봄으로써 위없이 바른 깨달음을 이룬다.
모든 아라한은 불성을 보지 못한다.
보살의 지위가 십지 에 이르러도 오히려 불성을 밝게 보지는 못하느니라.
중생은 같은 하나의 참 성품임을 깊이 믿으나, 다만 바깥 6진으로부터 생기는 허망한 마음이 덮고 있어서 나타나지 못한다. 만약 망상을 버리고 참 성품으로 돌아오면 적연히 함이 없음을 이치에 듦이라고 한다.
만법이 모두 자성 속에 있지만 망념의 뜬 구름이 덮여서 자성이 밝지 못하다. 어리석고 미망함을 불어 없애버리면 안팎이 사무쳐 밝아서 자성 가운데 만법이 다 나타난다.
잠깐 사이에 망념이 다 없어져서 안팎이 사무쳐 밝으면 자기의 본 마음을 아나니, 곧 해탈이며 무념이다.
보살의 지위가 다하여서 미세한 망념을 영원히 버리면 심성을 보나니, 구경각이라고 이름한다.
허망한 마음이 다 없어지면 법신이 나타난다.
무명을 다 없애버리면 본래의 법신을 본다.
모든 부처와 여래는 오직 법신일 뿐이다.
십지의 마지막 마음인 금강유정의 무구지 가운데서 미세한 습기의 심념이 모두 없어진 까닭에 심성을 본다고 한다.
습지의 성인이 법문을 구름 일듯 비오듯 하여도, 견성이 있어서는 엷은 비단으로 눈을 가린 것과 같다.
눈밝은 사람이 엷은 비단으로 눈을 가리고 모든 색상을 보는 것과 같이 구경지 보살이 모든 경계를 보는 것도 이와 같다. 눈밝은 사람이 가린 것 없이 모든 색상을 보는 것과 같이, 여래도 또한 이러하다.
깨친사람은 단박에 닦는다. 자성을 단박에 닦는다.
단박 깨닫고 단박 닦음은 한 생각도 나지 않아서 앞과 뒤가 끊어졌다.
만약 누구든지 한 생각도 나지 않아서 앞과 뒤가 끊어지면 , 단박 깨닫고 단박 닦으며, 단박끊고 단박 증득하여 지위가 없다.
'돈'이라 함은 허망한 생각을 단박없앰이요, '오'라 함은 깨침에 얻은 바 없음이다.
법달이 말 끝에 크게 깨치고 스스로 말하기를, "이후로는 부처님 행을 수행하겠습니다"고 하자, 대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부처님 행이 곧 부처니라"고 하였다.
우리 육대조사들은 낱낱이 단도직입으로 곧바로 견성할 것을 말하였고 계단과 점차를 말하지 않았으나, 대저 도를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단박 깨쳐서 점차로 닦을 지니라.
-----
오늘을 이끌어 갈 수 있는 건강을 주시고
하루를 반성하는 마음을 주신 신께 감사드리며
즐거이 글을 읽고 적음에 작은 깨우침을 얻습니다. .. -()-
감사합니다.
'책 만권을 읽으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말의 품격/이기주/황소북스 (0) | 2023.07.11 |
---|---|
짧은이야기, 긴 생각/이어령/ (0) | 2023.07.08 |
절제의 성공학/미즈노 남보쿠/바람 (0) | 2023.06.28 |
너는 이미 기적이다/탁닛한/불광출판사 (0) | 2023.06.20 |
화내지 않는 43가지 습관/마스노슌묘/담앤북스 (2) | 2023.06.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