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만권을 읽으면..

비슷한 것은 가짜다/정민/태학사

다림영 2023. 1. 8. 0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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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고기古器를 팔려했으나 3년이 지나도록 팔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 그 바탕은 딱딱한 것이 돌이었는데, 술잔으로나마 쓰려해도 밖은 낮고 안이 말려 있는데다, 기름때가 그 빛을 가리고 있었다. 나라안을 두루 다녀 보아도 거들떠보는 자가 있지 않자, 다시금 부귀한 집을 돌았지만 값은 갈수록 더 떨어져 수백 전에 이르게 되었다. 하루는 그것을 가지고 서여오에게 보여준 사람이 있었다. 여오가 ,"이것은 붓씻개이다. 돌은 복주 수산의 오화석갱에서 나온 것으로 옥 다음으로 쳐주니 민옥과 같은 것이다."하고는 값의 고하를 묻지 않고 그 자리에서 8천을 주었다. 

 

그 때를 벗겨내자 앞서 딱딱하던 것은 바로 돌의 무늿결이었고, 쑥색을 띤 초록빛이었다. 형상이 낮고 또 말려 있던 것은 마치 가을 연잎이 시들어 그 잎새가 말린 것과 같았다. 마침내 나라 안의 명기名器가 되었다.

 

여오는 "천하의 물건이 그릇으로 하지 못할 것이 어디 있겠는가? 생각건대 그 마땅함을 얻어야 쓰이는 것일 뿐이다. 대처 붓털이 먹을 머금어 아교가 굳어지면 끝이 쉬 무지러지므로 늘 그 먹을 씻어 내어 부드럽게 해 주는데, 이것은 붓을 씻기위해 만든 그릇이다."라고 한다. 대저 서화와 골동은 수장하는 자와 감상하는 자 두 종류가 있다. 감상하는 안목은 없으면서 한갓 수장하는자는 돈만 많아 단지 그 듣는대로 믿는 자이고, 감상하는 안목은 뛰어나지만 능히 수장하지 못하는 자는 가난해도 그 눈을 져버리지는 않는 자이다. 

 

우리나라에 비록 간혹 수장가가 있긴 하지만, 책이란 것은 중국ㄹ 복건성 건양에서 찍어 낸 방각본이요, 서화는 강소성 금창에서 만든 가짜일 뿐이다.밤 껍질 빛깔의 청동화로에 곰팡이가 피었다고 갈아버리려고 하고, 장경의 종이가 더럽다고 씻어 내려한다. 

 

엉터리 나쁜 물건을 만나서는 그 값을 높게주고, 보배로운 물건은 버려두어 수장할 줄 모르니 그 또한 슬프할 만한 따름이다. 

 

신라의 선비는 당나라로 가서 국학에 입학하였고, 고려사람은 원나라에 유학하여 천자가 직접 베푼 과거인 제과에 급제 하였으니, 안목을 열고 흉금을 틔울수가 있었다. 그 감상의 배움에 있어서도 대개 또한 당시 세상에서 환하게 빛났었다. 조선시대 이래로 3,4백년 동안 풍속이 날로 비루해져서 비록 해마다 연경과 교통한다고는 해도 썩어 버린 한약재나 거칠고 성근 비단 따위 뿐이다.

 

하우夏虞.은주 殷周적의 고기古器나 종요鍾繇. 왕희지.고개지.오도자의 진품이  진품이 어찌 일찍이 단 한 번이라도 압록강을 건너왔겠는가?

근세의 감상가로는 상고당의 김씨를 일컫곤 한다. 그러나 재사才思가 없고 보면 아름다움을 다하지는 못하는 법이다. 대게 김씨가 개창한 공은 있지만 여오는 꿰뚫어보는 오묘한 식견이 있어 무슨 물건이든지 눈을 거치기만 하면 진짜와 가짜를 구별해 낸다. 여기에 재사까지 아울렀으니 감상을 잘 하는 자라 하겠다.

 

여오는 성품이 총명하고 지혜로운 데다 문장에 능하고 소해小楷를 잘 쓴다. 아울러 미불米.의 발묵법에 뛰어나고 한편으로 음악도 정통하였다.

봄가을 한가한 날에는 마당에 물을 뿌려 쓸고는 향을 살라 놓고 차를 끓여 감상하였으나, 늘 집이 가난하여 수장할 수 없음을 한탄하였다. 또 세속에서 이를 가지고 시끄럽게 떠들어댈까 염려하여 답답해하며 내게 말하였다.

 

"나를 완물상자玩物喪志로 비웃는 자들이야 어찌 참으로 나를 아는 것이겠는가? 대저 감상이란 것은 [시경]의 가르침일세. 곡부曲阜의 신발을 보고서 어찌 느낌이 일어나지 않는 자가 있겠으며, 점대漸臺의 북두성을 보고서 어찌 경계하지 않는자가 있겠는가?"

 

내가 이에 그를 위로하여 말했다. 

"감상이라는 것은 구품중정, 즉 품계매김을 바르고 공정하게 하는 학문일세. 옛날에 허소가 착하고 간특ㄷ함을 판별함이 몹시 분명하였다고 하나, 당시 세상에서 능히 허소를 알아준 자가 있단 말은 듣지 못하였네. 이제 여오가 감상에 뜨ㅟ어나 뭇사람이 버린 가운데서 이 그릇을 능히 알아보고 찾아내었으니, 아아, 여오를 알아줄 사람은 그 누구란 말인가?[붓 씻는 그릇이야기筆洗說]

 

"여보게, 연암! 자네 한번 생각해보게. 무엇을 감상한다는 것은 그 마음을 읽는 것이 아니던가?[시경]에 실려 있는 필부필부必夫必婦들의 이야기야 무에 대수로울 게 있겠나? 그러나 그 한편 한 편의 행간에 담긴 마음을 읽을 때. 내 마음에 문득 느껴 감발減發되는 것이 있고, 저래서는 안 되지 하며 징懲創되는 바가 있지 않겠는가? 그저 [시경]을 제대로 읽은 것은 결코 아니라고 보네. 그마음을 읽어야지. 그것을 내 삶과 관련지을 수 있어야지. 그저 지식으로만 읽는 [시경]에서 어찌 '사무사思無邪'의 보람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단지 이 물건이 얼마나 오래 되었고, 그래서 값이 얼마인 줄만 잘 안다고 진정한 감상가라 할 수 있겠는가? 

 

그는 골동품을 사고팔아 그것으로 밥 먹고 사는 거간꾼에 지나지 않을 거란 말일세 곡부에서 공자께서 예전 신으셨다는 다 썩은 신발을 보면 그때 당시 천하를 주유하시던 그 안타까운 마음이 떠올라 눈물이 날 터이고 , 후한 때 점대의 쇠로 만든 북두성을 보면 왕망이 신나라를 세운 후 온갖 참람한 짓을 하다가 그곳에서 군사들의 칼에 찔려 비참한 최후를 맞은 일이 떠올라 외람됨을 경계하는 마음이 들 것이 아닌가.

 

우리가 골동품을 애완하면서 갖는 마음이 이러할진대 그것을 어찌 완물상자라 할 것인가? 나는 사람들이 실속도 없이 헛된 명성이나 좇고, 그저 물건값으 높고 낮음으로 가치를 평가하며, 벼슬이 높으면 우러러 존경하고 지위가 낮으면 업수이여겨 깔보는 그런 부박한 풍조를 슬퍼한다네."

 

"여보게,여오! 그건 그리 낙심할 일이 아니라고 보네 . 내가 옛사람의 그 풍도를 그리워하고, 내 삶의 자세를 가다듬을 수 있다면 남이 알아주고 알아주지 않고가 무슨 대수란 말인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이 붓씻개가 자네의 눈을 거치자 갑자기 보배로운 물건이 되었듯이,

남들이 매일 보면서도 그저 지나쳐 버리는 사물들 속에서 이전에 그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던 감춰진 의미를 읽을 줄 아는 따뜻한 시선을 지녔다면 그것으로 내 삶이 그만큼 더 넉넉해질 터이니, 남이 알아주고 알아주지 않고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저 그 붓씻개로 붓을 씻고 내 마음을 씻고, 그때마다 내 삶의 자리를 한 번 씩 되돌아보면 오히려 넉넉지 않겠는가? 가짜들이 더 진짜처럼 행세하는 세상에서 가끔씩 그것이 기실은 가짜이고 진짜는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때에 절어 묻혀 있음을 밝혀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족하지 않은가? 세상은 언제나 가짜들이 득세하게 마련이 아니던가? 

 

그렇지만 정말 지혜로운 안목앞에서 가짜들은 결코 제 몸을 숨길수가 없네 가짜로는 단지 가짜들을 속여먹을 수 있을 뿐이지. 진짜는 언제까지 진짜일 뿐일세. 진짜가 가짜되는 법이 있던가? 

단지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할 뿐이지 너무 마음쓰지 마시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버린 물건

 

하루는 비가 오는 데 마루를 배회하시다가 갑자기 쌍륙을 끌어당겨 왼손 오른손으로 주사위를 던져 갑.을 양편으로 삼아 대국을 하셨다. 그때 손님이 곁에 없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혼자 놀이를 하셨다. 이윽고 웃으며 일어나셔서 붓을 당겨 남의 편지에 답장을 쓰시기를,

 

" 사흘 주야로 비가 내려 사랑스러운 한창 핀 살구꽃이 녹어서 붉은 진흙으로 되었습니다. 긴긴 날 애를 태우며 앉아서 혼자 쌍륙을 가지고 논답니다. 오른손은 갑이 되고 왼손은 을이 되지요. '다섯이야!, 여섯이야!" 부르짖다 보니 오히려 상대편과 나라는 사이가 생겨나서, 승부에 마음이 쓰여 적수가 뒤집어지더군요. 나는 저를 모르겠답니다. 꼭 같은 내 양손에 대해서도 사사롭게 여기는 바가 있는 것일까요?

 

저 나의 양손이 이미 이쪽저쪽으로 편이 갈리고 보면 상대편이라 이를 수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나는 저 양손에 대해서는 역시 조물주와 같은 존재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사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한쪽은 부추기고 한쪽은 억누르기를 이같이 하다니요. 이제 비에 살구꽃이야 비록 쇠락해 떨어졌겠으나 복사꽃은 선명하게 곱겠지요. 나는 여기서 또 모르겠습니다. 저 조물주가 복사꽃을 부추기고 살구꽃을 억누르는 것 역시 사사로운 바가 있어서일까요?" 하셨다. 손님은 웃으면서, "나는 본디부터, 선생께서 쌍륙에 뜻이 있으신 것이 아니라 일단의 글을 구상해 내시려는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였다.

 

아들 박종채가 아버지를 회억하며 쓴  글의 한 대목이다 편지글에 답장을 쓰다가도 막힌 생각을 뚫기 위해 연암은 혼자 쌍륙을 놀았다. 그의 글은 한 편 한 편이 모두 이러한 고심참담 끝에 나왔다. 읽다보면 늘 행간을 가늠키 어려워 허우적거리기 일쑤지만, 그래서 오늘날 그것은 켜켜이 때가 앉은 붓씻개 같은 것이 되어 버렸지만, 그의 글은 진짜다. 지금까지도 시퍼렇게 날이 선 진짜다. 

 

서구의 담론만이 진짜인 양 행세하는 동안, 정작 우리것은 기름때에 절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버린 물건이 되고 말았다. 이제 서여오가 그랬듯이 뭇사람이 버린 가운데서 그 그릇의 값어치를 알아보고 묵은 때를 벗겨 낼 그 사람은 어디에 있겠는가?p440

 

백규가 그 어진 아내를 잃고 나서 가난하여 살길이 막막하여, 어린 것들과 계집종하나, 솥과 그릇, 옷상자와 짐 궤짝을 이끌고 강물에 띄워 산골로 들어가려고 상여와 더불어 함께 떠나가니, 내가 새벽에 두포의 배 가운데서 이를 전송하고 통곡하며 돌아왔다.

 

 

아아!누님이 시집가던 날 새벽 화장하던 것이 어제 일만 같구나. 나는 그때 갓 여덟살이었다. 장난치며 누워 발을 동동구르며 새신랑의 말투를 흉내 내어 말을 더듬거리며 점잔을 빼니 , 누님은 그만 부끄러워 빗을 떨구어 내 이마를 맞히었다. 나는 성나 울면서 먹으로 분에 뒤섞고, 침으로 거울을 더럽혔다. 그러자 누님은 옥오리 금벌 따위의 패물을 꺼내 내게 뇌물로 주면서 울음을 그치게 했었다. 지금에 스물여덟해전의 일이다. 

 

말을 세워 강 위를 멀리 바라보니, 붉은 명정은 바람에 펄럭거리고 돛대 그림자는 물 위에 꿈틀 거렸다. 언덕에 이르러 나무를 돌아가더니 가려저 다시는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강위에 먼 산은 검푸른 것이 마치 누님의 쪽찐 머리 같고, 강물빛은 누님의 화장 거울 같고, 새벽달은 누님의 눈썹 같았다. 그래서 울면서 빗을 떨구던 일을 생각하엿다. 유독 어릴 적 일은 또렷하고 또 즐거운 기억이 많은데, 세월은 길어 그 사이에는 언제나 이별의 근심을 괴로워하고 가난과 곤궁을 근심하였으니, 덧없기 마치 꿈속과도 같구나. 형제로 지낸 날들은 또 어찌 이다지 짧았더란 말인가. 

 

떠나는 이 정녕코 뒷기약을 남기지만

보내는 사람 눈물로 옷깃 적시게 하네

조각배 이제 가면 언제나 돌아올꼬

보내는 이 하릴없이 언덕 위로 돌아가네

[맏누이 정부인 박씨의 묘지명]

 

덧없기 마치 꿈 속과 같다

죽은 누님을 그리며 지은 묘지명이다. 번역만으로는 원문의 곡진한 느낌을 십분 전할 수 없는 아쉬움이 있지만, 이것만으로도 애잔하고 가슴 뭉클한 한편의 명문이다. 

 

연암과 죽은 누님은 여덟살의 터울이 있었다. 어려서 그는 누님에게 업혀 자랐을 터이다 . 열여섯에 시집간 누이가 고생만 하다가 마흔셋의 젊은 나이에 병을 얻어 세상을 떴다. 아내를 잃자 살 도리가 막막해졌다고 했으니, 그나마 그간의 생계도 누님이 삯바느질 등으로 꾸려왔음이 분명하다.

 

자형 백규는 선산 아래 땅뙈기라도 부치고 살아 볼 요량으로 상여가 나가는 길에 아예 이삿짐을 꾸려 길을 떠나고 있다. 그런데 그 세간이라는 것이 겨우 솥하나, 그릇 몇개, 옷상자와 짐 궤짝 두어개가 전부라니, 그 궁상이야 꼭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런데도 연암은 그 비통함을 말하는 대신, 전혀 엉뚱하게도 누님이 시집가던 날 새벽에 자신과의 사이에 있었던 절로 미소를 자아내는 한 에피소드를 떠올리고 있다. 신부화장을 하고 있던 누님곁에서 , 허공에 대고 발을 동동거리며 새신랑 흉내로 누이를 놀리던 여덟살 짜리 철없던 동생, 누이는 부끄러움을 못 이겨 "아이! 몰라 ." 하며 머리빗던 빗을 던졌고, 그 빗에 이마를 맞은 동생은 "때렸어!" 하며 악을 쓰고 울었다. 그래도 누이는 "흥!" 하며 야단하는 대신, 패물 노리개를 꺼내주며 동생을 달래었다. 

아! 착하고 유순하기만 한 누이여. 

이제 누님의 상여를 실은 배가 떠나가고 있다. 자형, 그리고 조카아이들과 하직의 인사를 나누고, 배는 새벽 강물위로 미끄러져 간다. 바람에 펄럭 거리는  붉은 명정, 돛대의 그림자를 흔드는 푸른 물결, 그나마도 언덕을 돌아가서는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p445

 

연암의 처남이자 벗이었던 이재성은 이 묘지명을 읽고 다음과 같은 평문을 남겼다. 

 

마음의 정리에 따르는 것이야말로 지극한 예라 할 것이요. 의경을 묘사함이 참 문장이 된다. 글에 어찌 정해진 법식이 있으랴!  이 작품은 옛사람의 글로 읽으면 마땅히 다른 말이 없을 것이나, 지금 사람의 글로 읽는 다면 의심이 없을 수 없으리라. 원컨대 보자기에 싸서 비밀로 간직할진저. 

 

장의절차를 성대히 함이 지극한 예가 아니다. 망자를 떠나보내는 곡진한 마음이 담길 때 그것이 지극한 예가 된다. 있지도 않았던 일을 만들어 적고, 상투적 치레로 가득한 글이 참문장이 아니다. 가슴아픈 사랑의 마음이 실릴 때라야 읽는 이의 마음을 울리는 참 문장이 된다.

 

그렇다. 묘지명에 무슨 정해진 법식이 있으랴!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꾸만 정해진 법식만을 가지고, 무슨 묘지명을 이따위로 쓰느냐고 욕을 해 댈 터이니 혼자만 읽고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말라고 했다. 이 말이 또 한 번 읽는 이를 슬프게 한다.

다음은 연암이 지은 [언암에게 돌아가신 형님을 생각하며 ]란 시다.

 

형님의 모습이 누구와 닮았던고

아버님 생각 날 젠 우리 형님 보았었네

오늘 형님 그립지만 어데서 본단 말가

의관을 갖춰 입고 시냇가로 가는도다.

 

돌아가신 아버님을 꼭 닮아, 마치 아버님을 보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하던 형님, 그 형님조차 이제는 세상에 안계시다. 그리운 형님의 모습을 이제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슬쓸한 마음에 시냇가로 가서 그 물에  내 얼굴을 비춰 볼 밖에. 연암은 이렇듯 덤덤한 듯 감정의 미묘한 구석을 꼭 꼬집어 내는 마술사다.p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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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아침 일어나 연암과의 만남 속에서 시간가는줄 모르고 오래 앉아 글을 옮겨 적다보니 허리가 시원치 않다.  그의 글 속에서 몇며칠 물들었다. 그 힘이 지속되어 오랜동안 물빛마음으로 살게되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어리석은 마음이 가득하니 먼지가 끼고 탁해질것이 우려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도서관에 달려가 벗들을 만나야 할 것이다. 

 

그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어쩌면 나도 가난한 연암이나 이덕무의 근처에 살아 좋은 벗 덕분에 가난함을 풍류삼아 시를 쓰고 어깨동무를 하고 그들이 지나다녔던  다리를 함께 건넜을 것이다.  거리를 세상을 풍자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시대의 그들이 너무 좋다.  그들의 글앞에 자주 서성이는 것을 보면 분명 나는 그들의 친구가 아니었을까... 

 

정민선생님 덕분으로 글을 만나게 되니 감사하다.  이렇게 옛사람을 만나 배우고 사귀게 되니 책이란 그야말로 최고의 벗으로 더없는것이다. 

어떤 잇속으로 책을 가까이 하다가 제 자리로 돌아오니 어찌 살아야 함을 깨닫는다. 

누님에 대한글을 오래전 읽던 기억이 다시금 올라오고 그 풍경들이 그려지니 눈시울이 촉촉해졌다. 

연암의 착한 누님의 모습이 마주한듯 보이고 나는 그 몇분의 일이라도 닮은 누나가 되고 있는지 생각해본다. 

 

어느새 밖이 훤해졌다. 방밖에선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난다. 아침을 해야 하나  허리펴고 운동이 먼저인가..  시간은 어쩌면 이리 화살처럼 나를 떠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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