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만권을 읽으면..

[책추천]문장의 품격/안대회/Humanist

다림영 2021. 8. 3.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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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24

 

(9)도로 눈을 감고 가라

'자신의 본분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어찌 문장에만 해당하리오?

일체의 하고많은 만사가 다 만찬가지지요. 화담(花潭,서경덕)선생이 외출했다가 집을 잃고 길에서 우는 소경을 만났더랍니다. 그에게 "너는 왜 우느냐?"라고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이 이랬습니다.

"저는 다섯살에 소경이 되어 이제 스무해가 되었습니다. 아침에 밖을 나왔다가 문득 눈을 떠서 천지 만물이 환하게 보였습니다. 기뻐서 집에 돌아가려 했더니 밭두둑에는 갈림길이 많고 대문이 다들 같아서 제집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울고 있습니다. "

화담선생이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네게 집으로 가는 길을 가르쳐주겠다. 네 눈을 도로 감아라. 그러면 네 집이 바로 나올 것이다. "

그래서 소경이 눈을 감고 지팡이를 더듬어 본래 걸음에 맡겨 걸어서 제집에 바로 도착했답니다. 소경이 길을 잃는 것은 다른 까닭이 아닙니다. 빛깔과 모양이 뒤바뀌고 기쁨과 슬픔이 작동하여 망상(妄想)을 일으킨 때문입니다. 지팡이를 더듬어 본래 걸음에 맡기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분수를 지키는 비결이자 제집으로 돌아가는 신표일 것입니다. 

 

p146

한가로움

사통팔달의 큰길 옆에도 한가로움은 있다. 마음이 한가롭기만 하다면 굳이 강호(江湖)를 찾아가고 산림에 은거할 필요가 있으랴? 내가 사는 집은 저잣거리 바로 옆이다. 해가 뜨면 마을 사람들이 장을 열어 시끌벅적하다. 해가 들어가면 마을의 개들이 떼를 지어 짖어댄다. 그러나 나만은 책을 읽으며 편안하다.

때때로 문밖을 나가보면, 달리는 자는 땀을 흘리고, 말을 탄 자는 빠르게 지나가며, 수레와 말은 사방팔방에서 부딪치며 뒤섞인다. 그러나 나만은 한 발 한 발 내디디며 천천히 걷는다.

 

저들의 소란스러움으로 내 한가로움을 놓치는 일 한 번 없다.

왜 그런가? 내 마음이 한가롭기 때문이다.

사방 세 치의 마음이 소란스럽지 않은 사람은 드물다. 그들의 마음에는 제각기  영위하는 것이 있다. 장사하는 자는 작은 금전을 놓고 다투고, 벼슬하는 자는 영욕(榮辱)을 다투며, 농사짓는 자는 밭갈이와 호미질하는 것을 다툰다. 바삐 움직이며 날마다 소망하는 것이 있다. 이러한 사람은 아무리 영릉(零陵)남쪽 소상강사이에 데려다놓는다 해도, 반드시 팔짱을 낀채 앉아서 눈을 감고 그들이 추구하던 것이나 꿈꾸고 있으리라. 그들에게 한가로움이 무슨 필요가 있으랴?

그렇기에 나는 말한다. 

"마음이 한가로우면 몸은 저절로 한가롭다."

 

p291

혜장스님의 병풍에 쓴다

바람은 원거(爰居)새처럼 피하고

비는 개미처럼 피하며

더위는 오(吳)나라 소처럼 피하여

내가 싫어하는 것과 맞닥뜨리지 않는다.

 

글을 사탕수수처럼 즐기고

거문고를 감람(橄欖)처럼 즐기며

시를 창포 김치처럼 즐겨서

모든 것을 내가 좋아하는 대로 즐긴다

 

달이 밝으면 못이 밝고

달이 어두우면 못이 어둡다

밝으면 내 그림자를 띠우고

어두우면 돌아가서 쉬노니

자연스러워 무엇과도 가투지 않는다.

 

밀물이 들어오면 물고기가 따라오고

썰물이 빠지면 물고기가 떠난다

따라오면 낚시질하고

떠나면 뒤쫒지 않노니

이 또한 이렇게 즐기는 거리가 된다.

 

피리불고 거문고 타며

시 읊고 그림 그린다.

방탕한 듯 방탕하지 않고

근엄한듯 근엄하지 않으니

어찌 담박한 생활이 아니랴

 

꽃가꾸고 채소를 심으며

대나무 씻고 찻잎 볶는다

한가하다 하나 한가하지 않고

바쁘다 하나 바쁘지 않으니

정년 이야말로 청량한 세계다.

 

볕이 드는 창가 멋진 책상위에

독루향(篤루香,명향이름)을 피우고

소룡단(小龍團,명차이름)에 불을 붙여

진미공(陳眉公)의 <복수전서(福壽全書>를 상쾌하게 읽는다.

 

눈이 살짝내린 대숲 암자에서

오각건(烏角巾)눌러쓰고

금사연(金絲烟,최상품담배)을 입에 물고

역도원(역道員)<수경신주(水經新注)>를 설렁설렁 넘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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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롭기 위해 

책을 빌려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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