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초캐다 어느새 길을 잃었지
천 봉우리 가을 잎 덮인 속에서
산 스님이 물을 길어 돌아가더니
숲 끝에서 차 달이는 연기가 일어난다.
..이 시를 그림으로 그리면 어떻게 될까? 낙엽 쌓인 산속에 망태기를 든 약초꾼 한 사람이 먼 곳을 보며 서 있겠지. 스님의 모습은 그리면 안 된다. 다만 숲 저편으로 실오리 같은 연기가 모락모락 하늘위로 피어오르면 된다. 앞서 본 휘종 황제의 그림이야기와 비슷하지않는가?
정말 소중한 것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뛰어난 화가는 그리지 않고서도 다 그린다. 훌륭한 시인은 말하지 않으면서 다 말한다. 31p
매화는 본래부터 환히 밝은데
달빛이 비치니 물결 같구나
서리 눈에 흰 살결이 더욱 어여뻐
맑고 찬 기운이 뼈에 스민다
매화꽃 마주 보며 마음 씻으니
오늘 밤엔 한 점의 찌거기 없네.
서리눈이 흰 매화꽃 위로 불어온다. 바람에 일렁이는 곷잎은 달빛을 받아 더욱 눈이 부시다. 흔들리는 꽃잎은 마치 달빛에 반짝이는 강물같은 느낌을 준다. 아직 추운 날씨인데, 달밤에 밖으로 나와 매화나무 아래 서니 맑고 오싹한 기운이 내 뼛속까지 스며들 것만 같다. 매화꽃을 보면서 마음을 씻어내니, 오늘 밤에는 내 마음속에 더러운 찌꺼기가 하나도 없이 깨끗해진듯하다.62p
소는 윗니가 없고, 범은 뿔이 없으니
ㅎㅏ늘 이치 공평하여 저마다 알맞구나
이것으로 벼슬길에 오르고 내림을 살펴보니
승진했다 기뻐할 것 없고, 쫓겨났다고 슬퍼할 것도 없다.
..
오늘 내가 높은 자리에 있다고 해서 좋아하기만 할 것이 아니다. 책임을 져야 할 일이 그만큼 많다. 오늘 자리에서 쫓겨난 것이 오히려 내게 더 잘된 일일 수도 있다. 세상일은 어떻게 변할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72p
고려 때 강일용이란 시인이 있었다. 그는 깃이 흰 백로를 유난히 사랑했다. 백로를 가지고 정말 훌륭한 시를 한 수 짓고 싶었다. 그래서 비만 오면 짧은 도롱이를 걸쳐 입고 황소를 타고 개성 시내를 벗어나 천수사라는 절 옆의 시냇가로 갔다. 황소 등에 올라 앉아 비를 쫄딱 맞으며 백로를 구경하곤 했다.
비가 올 때마다 나가서 백로를 관찰하였지만, 아름다운 시상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백 일 만에 갑자기 한 구절을 얻었다. 그 시구는 이러했다.
푸른 산허리를 날며 가르네.
그는 어느날 시내를 박차고 날아오른 백로가 유유히 산허리를 가르며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비가와서 푸른 산허리에는 흰 안개가 자옥이 깔려 있었다. 그런데 시인은 흰 안개가 흰 밸로가 훨훨 날아가면서 푸른 산허리에 흰 줄을 그어 놓은 것이라고 상상했던 것이다. ..
이 구절을 얻고서 그는 너무도 기뻐서 이렇게 소리쳤다.
“내가 오늘에야 옛 사람이 미처 말하지 못한 것을 비로소 얻었다. 훗날 이 구절을 이어 시를 완성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 한 구절이 너무도 마음에 들고, 또 이 구절을 얻은 것이 너무 기뻤던 나머지, 그는 다른 구절을 채워 한 수의 시를 완성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97p
당나라 때 시인 맹교는 좋은 시를 짓기 위해서라면 칼로 자기 눈을 찌르고 가슴을 도려내는 고통도 마다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 그는 이렇게 노래 한 적이 있다.
살아서는 한가한 날 결코 없으리
죽어야만 시를 짓지 않을 테니까.
한 글자를 꼭 맞게 읊조리려고
몇 개의 수염을 배배 꼬아 끊었던가.
..
남들이 보기에는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작품 하나에도 한 예술가의 일생이 담겨 있다. 시인은 한 편의 아름다운 시를 남기기 위해 어떤 괴로움도 다 참아 내며 견딘다. 화가는 멋진 그림을 그리기 위해, 음악가는 아름다운 곡을 작곡하려고 힘든 줄도 모르고 밤을 새우며 작업에 몰두한다.98p
시를 보면 그사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정습명과 최해의 시를 보면 이 말을 더 실감할 수가 있다.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이 있다. 한자로는 ‘농가성진(弄假成眞이라고 하는데, 뜻없이 한 말이 말한 그대로 진짜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말 속에 정령이 살아 숨쉰다고 믿어 함부로 말을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항상 말을 조심하고, 행동을 가려서 할 줄 아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내가 오늘 무심히 하는 말투와 행동 속에 내가 품은 생각이 다 드러나기 때문이다.105p
고려 때 김부식과 정지상은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한번은 정지상이 다음과 같은 시구를 지었다.
절에서 독경 소리 끝나자마자
하늘빛이 유리처럼 깨끗해졌다.
..
김부식은 평소에 정지상에 대해 강한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정지상이 지은 이시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김부식은 정시상을 만나 이 구절을 자기에게 달라고 졸랐다. 정지상은 끝까지 김부식에게 그 시를 주지 않았다.
이 일로 김부식은 정지상에 대해 원한을 품었다 . 그의 재주를 시기하는 마음도 들었다. 두 사람은 정치적 입장도 완전히 달랐다. 뒤에 정지상이 묘청과 함께 서경, 즉 평양으로 서울을 옮기자는 주장을 내세웠을 때도 김부식은 절대로 안 된다고 반대했다.나중에 묘청이 반란을 일으켰다.김부식이 토벌의 책임을 맡아 정지상은 결국 김부식에게 잡혀 죽음을 당했다. 정지상이 죽은 뒤, 김부식이 하루는 (봄날)이란 시를 지었다.
버들 빛은 천 개의 실이 푸르고
복사꽃은 만 점의 꽃이 붉다
봄날 길게 드리운 버들가지마다 초록 물이 올랐다. 복사꽃도 일제히 피었다. 새로 지은 시가 마음에 들어 김부식은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갑자기 공중에서 정지상의 죽은 귀신이 나타나 김부식의 뺨을 철썩 때렸다. 그러면서 이렇게 야단을 쳤다.
“천개실과 만 점 꽃이라니, 네가 그것을 직접 세어 보았느냐? 이렇게 고쳐라!”
귀신은 한 글자씩 고쳐 이렇게 읊었다.
버들 빛은 실마다 푸르고
복사꽃은 점점이 붉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버들가지는 천 가지만이 아니고, 복사꽃은 만 송이보다 더 많았다. 천 가지가 푸르고 만 송이가 푸르다고 말하는 것보다 가지마다 푸르고, 송이마다 붉다는 표현이 더 깊은 맛이 있었다. 한 글자씩 고쳤을 뿐인데 시의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김부식은 죽은 정지상을 더 미워하게 되었다.
물론 실제로 잇었던 이야기는 아니다. 후세 사람들이 정지상이 재주를 아껴서 만들어 낸 이야기일 뿐이다. 144p
...
“내가 너에게 집으로 찾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겠다. 도로 네 눈을 감아라. 그러면 바로 네 집을 찾을 수 있을 것이야.”
그러자 그 사람은 다시 눈을 감고 지팡이를 더듬거려 자기 집을 찾아 갈 수 있었다는 거지요.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갑자기 보이지 않던 천지 만물의 형상과 빛깔이 눈앞에 나타나자 지금가지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이 한꺼번에 뒤죽박죽이 되어 헛된 생각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지팡이를 두드리고 자기 발걸음을 믿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잃어버린 자기 집을 찾아갈 수 있는 방법입니다.
..180p
우리가 한시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은 바로 내가 나 자신의 주인이 되게 만드는 힘이란다. 옛날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 그리고 그 생각이 오늘날까지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 알아보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니겠니? 내가 나를 잘 알 때 비로소 남이 보이기 시작한단다. 남만 알고 나를 모른다면 그것은 안 것이라고 할 수가 없어. 무조건 우리 것이니까 좋다고 해서도 안 된다. 다시 눈을 질끈 감고, 내 지팡이를 믿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아 나서야 한다. 18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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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 이야기가 무척 재밌다. 언제도 이것저것 그에 대한 글을 읽어보았지만 늘 같은 마음이다. 젊을 때로 돌아간다면 다시 공부를 하게 된다면 미술 공부 와 또 인테리어 음악 외에 더불어 시조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다.
큰아이에게도 다른 아이들에게도 나는 세상의 틀에 맞추어 살아가기보다 걱정이 따르지만 하고 싶은 것을 배우게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언제 한번 운을 띄워봐야 하겠다. 말리는 이야기이기도 하겠으나 배우는 것도 다 때가 있으니 힘이 들어도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한창 때 몰입하고 배우다보면 길이 나지 않을까 .
‘저 구름 흘러가는 곳~’ 노래를 듣고 있다. 마음은 구름 되어 흐르고 있다. 노래의 가사에는 내 사랑도 구름처럼 흘러가길 바라지만 사랑 따위는 모르고 구름처럼 유유히 평화로운 마음으로 흐르고 또 흐르는 내가 될 수 있기를 ...
앞니가 빠졌다네 중강새 되었다네
우물앞에 가지마라 앞니빠진 중강새
누군가 마구놀리며 웃었지만 괜찮네.
어금니가 아니어서 다행인가 아닌가
앞니는 남보기가 무색하여 힘들고
어금니 잘못됬다면 삼키는것 어렵지
우리몸 어디하나 없어서야 쓰겠나
손톱하나 발가락도 자리마다 필요하네
귀한몸 만들어주신 부모님께 잘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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