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잎 되던날/김광영
친절한 지인이 나더러 충고했다. 아들을 장가보내면 사촌쯤으로 여겨야지 자식으로 생각하면 판판이 서운하다고. 씁쓰레하게 들리는 그 말을 그땐 단속 잘하라는 뜻이거니 흘려들었다.
제짝과 오순도순 살면 고맙지 서운한 생각이 왜 들가? 의문마저 들었다.
아래층 집 아들이 신사동에서 예식을 올리던 날, 나는 아들네 집에도 가볼 겸 마음이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시어머니가 하룻밤 자고 간다면 귀찮아할까봐, “너희 집에 갈 시간은 없고 당일로 내려갈 거야. 과외공부 시키는 새아기는 두고 아들 얼굴이라도 보자.”고 전화를 했다. 예식장에 나오면 설마 하룻밤 자고 가라는 말이 나올 줄 알고.
서울에 있는 아들은 유년 시절부터 고집 피우고 떼를 쓰며 울어 본 적이 없다. 튀김을 하다가 밀가루가 부족하다면 군말 없이 쪼르르 사다 주었고, 해거름만 되면 부엌방으로 와서 피리를 감미롭게 불어주곤 했다. ‘미루나무 곡대기에 조각구름 걸렸네. 실바람이 몰고와서 살짝 걸쳐 놓고 갔대요.’ 티없이 맑고 순수한 피리소리! 그 소리에 감흥해서 연탄냄새 자욱한 부엌에서 국수를 삶아도 고단한 줄 몰랐다. 동요 가사만큼 파란 부추와 샛노란 계란지단을 올려 삼삼한 멸치 장국에 말아주면 호르륵호르륵 들이켜는 소리도 귀여웠지만 엄지 손가락을 고추세워 어미의 손맛을 한껏 추켜세우던 아이였다.
대학수능시험 점수가 잘 나왔을 때도 제 자랑은 덮어두고 어미가 뒷바라지를 잘해줘서 좋은 점수를 받았다며 어미 공덕으로 돌리던 아들이었다. 군복무 시절에도 “아들아, 군대 생활이 힘들지?” 물으면 “어머니, 저는 국가에서 잘 먹여주고 잘 입혀줘서 편히 지내고 있습니다.”명쾌한 답을 해줬다. 군대 생활의 고역을 당해보지 않은 어미를 감쪽같이 안심시켜주던 효성스런 아들이었다.
그러던 아들이 서울에서 십여 년 넘게 홀로 지내는 게 뼛속 깊이 외로워 보였다. 서둘러 주선해준 아가씨와 결혼하겠다고 했을 땐 일만 근심이 날아가는 듯했다. 퇴근해서 집에 오면 밥해놓고 기다리는 가족을 만들겠다는 게 얼마나 고맙고 마음이 놓이던지.
그날 날 보러 예식장에 나온 아들에게 잘 지내느냐고 했더니 눈에 광채가 날 만큼 힘을 주어 말했다. 잘 지낸다고. 호텔 로비에서 한 시간즘 얘기를 나누었을가. 대화중에 아들이 내 눈치를 슬슬 보며 시계를 들여다보는게 아닌가. 나는 쇠를 깎듯 마디에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아들은 그렇지 않은 듯했다. 눈치 구단인 내가 그 뜻을 모를 리 없다. 날시도 차가운데 어둡개 전에 어서 가라고 했더니 괜찮다고 사양하는 척하더니 어렵게 그럼 가도 돼겠느냐고 했다. “그래, 엄마가 떠나는 걸 보면 서운하다. 어서가거라”며 등을 떠밀어 제짝에게로 돌려 보냈다.
말과 뜻은 다를 때가 많다. 이내가 깔린 서울의 거리에서 무심하게 돌아가는 아들을 보고 있자니 졸지에 아쉬움이 밀려들었다. 시계를 보니 대절버스 출발시간 15분 전이다. 5분이라도 더 보고 싶은 마음에 아들의 뒤를 종종 걸음으로 따라붙었다. 하나 보폭이 큰 아들과의 간격은 쉬이 좁혀지지 않았다. 어미에게 미련이 남으면 한 번 쯤 돌아볼 터인데 심중에도 없는 듯 7호선 역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어미는 너를 5분이라도 더 보려고 이렇게 안달인데 너는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건너편 신호등만 주시하고 섰다니..’
무심히 서 있는 아들 곁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빈말이라도 “엄마, 여기까지 왔는데 하룻밤 자고 가세요.”한마디만 했더라면 그렇게 구차한 짓은 안 했을 터였다. 어미는 그 한마디가 듣고 싶어 뒤를 따르는데 아들은 그새 파란 신호등의 지시에 따라 급히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다. 순간 체면을 던져버리고 손을 모아 이름을 크게 불렀다.
“종~건~아.”
웅성거리는 군중 속에서도 제 이름은 들리는지 발길을 멈추고 힐끔 돌아보더니 애면글면 서 있는 나를 목격했다. 아주 황당한 듯했다. 왕방울만큼 눈을 크게 뜨고는 내 곁으로 달려와서,
“엄마! 이러면 어짜노, 먼저 가라 해놓고는.”
자식이 어찌 어미 속을 알랴. 목에 걸린 할 말은 차마 못하고 주책없는 눈물만 줄줄 흘렸다.
고작 5분 더 보고 돌아서면서 그제야 나는 깨우쳤다.d lwp 아들은 나 없어도 전혀 불편함이 없는 젊은 여인의 남편이란 걸.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고 새아기를 찾아 바븐 걸음 치는 뒤태를 보니 내가 영락없는 떡잎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 , 나는 이제 영양가 없어 떨어진 떡잎이야. 너희들에게 내 모든 걸 다 빼앗긴 쪼그라진 떡잎! 철없고 무심한 자식들아.’
혹한에 겪은 떡잎의 서러움은 쉬이 삭지 않았다. 내려오는 버스 안 유리창에 성에가 뽀얗게 끼었다. 창가에 앉아 ‘떡잎은 잘 내려가고 있다’고 휘적휘적 낙서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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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말미를 보며 웃음이 났다. 영락없이 마음 삐친 초등학교 일학년 소녀 같은 모습이다. 나이가 들면 나도 이렇게 변하게 될지 의문이다. 애물단지 다 큰 자식 젊은 여인에게 시원하게 넘겨버린 마음은 간데없고 어미의 마음은 짐작도 못하고 뒷모습을 보인 아들을 보내며 섭섭해 하는 마음이라니 ..
아들을 셋이나 둔 어미가 되어 나이가 조금 더 들면 그럴 수도 있을지, 난들 나를 어찌 알까 싶기도 하지만....
언젠가 친정어머니께서 첫 동생을 장가보내면서 시름하던 때가 떠오른다. 혼자서 긴 시간을 살아오셨기에 큰 아들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그때는 어머니의 행동들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조금 더 너그럽게 그런 듯이 봐주고 그런가보다 하면 그뿐일 것을 어쩌자고 긁어 부스럼을 내고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이제 세월이 지나고 여러 며느리를 보며 많이 달라지셨다. 자신의 일만으로도 자식들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기 때문이 그 이유일 것이다. 이것저것 배우고 봉사하느라 누가 집에 온다면 좋아라 하지 않으신다. 대부분의 할머니들이 손주들을 보고 싶어 한다거나 자식들을 위해 뭔가를 해서 보내고 어쩌고 하는 이야기도 친정어머니는 이해를 하지 못하신다.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게 사시기 때문이다. 그런 어머니를 곁에서 보노라니 나 또한 이런 이야기를 논하시는 어머니들을 보면 얼른 마음에 와 닿지 않기도 한 것이리라.
가까이 지내는 손님께서 며느리 둘을 대동하고 걸음 하셨다. 모습은 마치 친정 모녀들 같았다. 이젠 가족이 되었으니 가까이 지내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너무 가까이 두고 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직은 시어머니 젊으니 아이들의 모든 것을 간섭하고 자신의 눈으로 보려하니 밖에서 그들을 보는 나는 걱정이 앞서는 것이다.
세상 삶이 흐름대로 흘러가면 되는 것이겠지만 나또한 친정어머니를 닮은 기운이 많으니 자식에 연연해하지 않을 것 같다. 얼른 독립을 시키고 싶은 마음 굴뚝인데 마음대로 되는 일은 없고 며느리를 보게 될지도 알 길이 없지만 어떤 마음도 품지 않으며 그저 유유히 살게 되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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