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빠져나간 베드타운의 중앙로에 큰 버스가 달려간다. 달랑 서너 명을 싣고 종착역으로 향한다. 3월의 햇살은 버스 뒤로 부서져 내리고 나는 유리문에 기대어 버스가 지나간 빈 거리를 바라본다. 아기를 업은 젊은 엄마 둘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박꽃처럼 하얗게 웃으며 지나간다.
오래전에 아기와 함께 있던 젊은 내게 나이든 여자들이 웃으며 말했다.
‘참 좋을 때다!’.... 그 말을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훌쩍 세월이 지나 나의 손이 덜 가기만을 바랐던 것이다.
그녀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나 또한 ‘참 좋을 때다!’ 라는 말이 그냥 나오는 것을....
꽃 같은 웃음소리가 멀어진다, 한 폭의 수채화다. 엄마 품에서 곤히 자고 있을 달큰 한 아기의 냄새, 여릿한 숨결, 보들보들한 살갗....
아득한 세월 속에 사라져 버린 그리운 것 들...
휴학계를 낸 큰아이가 3월이 되었는데도 학교 얘길 하지 않더니 짐을 챙겨 길을 떠났다. 한 달 열흘 그렇게 떠다니다 오겠단다. 핸드폰을 꺼둘 것이라고 간간이 소식을 전하겠다고 했다.
주야가 바뀐 아이는 제 맘대로 살았다. 눈에 가시처럼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을 보지 않으니 한편으론 후련했는데 빠져나간 자리가 생각보다 컸다. 집이 텅 빈 것 같은 것이다.
갑자기 꽃샘추위가 몰아닥쳤다. 찬바람의 기세가 추운 겨울 버금간다. 아이는 가급적 짐을 줄이려 했다. 느닷없는 추위에 감기나 든 것은 아닌지, 두툼한 옷은 챙겼는지,
잠은 또 어디서 자는지, 돈을 아낀다고 빵이나 사들고 다니는 것은 아닌지 ....
속이 시끄러우니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며칠째 숲 속의 새소리와 물소리(명상음악)에 귀를 적시고 있다. 눈을 감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오롯이 자연의 세계로 들어가기도 하는데, 숲에 있는 듯 평온한 온기가 퍼진다.
무소식이 희소식일 것이다. 오늘은 어제보다 바람이 잦아들었다. 햇살도 따스하니 한결 마음이 놓인다.
아이는 아빠의 고향에 들렸다가 엄마가 태어난 곳을 거쳐 섬으로 갈 것이라 했다. 친지들이 떠나버린 횡 한 시골마을, 엄마가 들려주었던 부모의 옛날얘기들이 떠오르기도 할까? 그저 걷고 걷기를. 모르는 사이 마음은 비워지고 몸은 가벼워질 것이다.
훌쩍 떠나버린 아이가 갑자기 부러워진다. 떠나고 싶은 마음이 바람처럼 인다. 다 두고 봄이 물든 남녘의 길을 하염없이 걷는 것이 나의 꿈이기도 하다. 누구든 혼자만의 여행은 쉽지 않을 것이다. 앞날에 대한 고뇌로 무거운 마음이 어찌 없으랴만 무작정 떠날 수 있다는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세상의 잣대에 묶여 서로가 뒤질세라 바쁘게 달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도처에 가득하다. 공부가, 졸업장이, 좋은 직장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지니고 살고 있다. 어느 자리에서든 잘 어울리며 낮은 마음과 성실한 모습으로 땀을 흘리며 때로 함빡 웃으며 살면 되는 것 아닌가.
짐에 넣어둔 내 편지는 읽었으리라. 몇 줄만 쓴다는 것이 또 구구절절 적어버린 것은 아닌지 . 얼마 전 ‘엄마가 잔소리를 너무 하나?’ 했더니 문득 엄마의 얘기는 잔소리가 아니라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동안의 걱정은 기우였다.
명상음악 속 계곡의 물소리가 지속적으로 흐른다. 남들보다 조금 뒤쳐져도 마음만은 맑은 물로 흐르기를. 창가로 쏟아지는 봄 햇살이 눈이 부시도록 반짝인다. 마음이 이는 곳으로 길을 걷고 있을 아이의 머리위에도 햇살은 쏟아지고 있으리라. 이 모든 순간들이 보석처럼 반짝이며 인생의 참다운 길로 인도하게 될 것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