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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어느 목요일 밤의 일기

다림영 2014. 2. 21.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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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즈음 이었을 것이다 . 고개 너머 사는 친구 집에서 몇 명이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기로 했다. 우리는 읍내에서 먹을 것을 사들고 시리고 찬 밤을 논과 밭을 지나고 낮은 고개와 가파르고 높은 고개를 아무렇지 않게 걸어 올랐다. 고개마루에서 소리를 지르기도 했었던가. 까르르 거리던 소녀들의 웃음소리는 하얗고 텅 빈 그 밤을 가로질러 메아리 졌을 것이다.

어떤 식으로 허락을 받았는지 기억에 없지만 하나밖에 없는 딸의 늦은 외출로 돌아올 때까지 어머니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걱정하셨을 것이다.

 

세상은 온통 흰 눈으로 뒤 덮였고 달빛은 말할 수 없이 명징했다. 차가운 한 겨울의 공기를 가르며 도착한 친구의 방에 들어서니 좁은 방이 우리들로 꽉 찼다. 두 명이 팔을 벌리기에도 턱없이 모자란 작은 방, 뜨끈한 아랫목엔 이불이 덮여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발을 쭉 뻗어 넣으며 얼었던 손과 발을 녹였다. 들뜬 우리는 어떤 이야기로 그날의 밤을 시작했을까. 잠시 안개 같은 기억의 오솔길로 걸어들어가 본다.

 

 

 

너나없이 목에는 머풀러를 두르고 길 청소도 가능한 나팔바지를 입어대고 고고춤이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어떤 음악이었을까. 아주 오래된 녹음기에 팝송을 틀어놓고 불을 끄고 손가락을 세우며 낮은 천정을 찔러댔다. 크리스마스가 우리에게 그렇게 놀아라 하던 날은 아니었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새어나오는 것을 막을 길이 없다. 어쩌자고 한 겨울 깊은 밤에 겁도 없이 먼 길을 걸어 그렇게 놀아야 했던 것일까.

 

덧없기만 한 세월 속에서 문득 거울을 보니 어제 없던 주름이 또 몇 개 늘었다. 어쩌다가 남자 아이를 셋이나 두고 나는 시름에 겨워하고 있는지....

이제 고등학교 이학년에 올라가는 막내가 봄방학을 맞아 친구 몇 명과 놀러갔다. 언제부터 벼르던 일이었다. 저희끼리 펜션을 잡고 먹을 것을 다 준비했는데 문득 내게 술을 사달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서 큰아이에게 어떻게 해야 하느냐 물으니 조금씩 먹겠다는데 눈감고 사주란다. 이젠 정말 공부 속에서 헤어날 수도 없는데 하며...

아이는 혹여 라도 부정적인 면만 얘기할지 모를 엄마의 얼굴을 주시하고 간절한 마음이 묻은 자세로 내 허락을 구했고 나는 아이에게 당부를 하고 걱정을 삼키며 아이를 보냈다.

어느덧 하루의 커튼을 내릴 시간이 되었다. 전화가 왔다. 잘 도착했고, 친구들과 얘기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며 들뜬 목소리를 실어 소식을 전했다.

 

둘이서도 남자 아이 셋을 두고 힘들어 하고 있다. 아득하고 어려운 시절, 젊은 나이에 혼자되어 아들 넷, 딸 하나를 키워낸 친정어머니의 고뇌가 그려진다. 수많은 세월 속에 타버린 마음들이 얼굴 가득히 주름으로 내려앉았다. 시린 세월은 삶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지만 아직도 나이든 자식들 걱정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 부모란 무덤 속에 들어갈 때까지 자식걱정에서 진정 헤어 나올 수가 없는 것인지....

나 또한 어머이의 뒤를 쫒아 아이들이 다 컸음에도 노심초사다. 옆집아이를 보듯 내 아이를 키우라는 스님의 말씀을 아로새기는 날들이다. 남은 인생은 또 어떤 시름으로 늙어갈 것인가. 그저 마음 내려놓기를 하루에도 수십 번, 우러나지 않는 마음이 간혹 들 때도 있지만 지워내기를 거듭하며 일기를 쓴다. ‘ 그저 건강하게 함께 있어주어 감사합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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