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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과 그의 인재들/박영규/들녘

다림영 2014. 2. 7.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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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중에서-

황희가 큰 소리로 자기를 시중들던 어린 종의 이름을 부르자, 그 젊은이는 깜짝 놀라서 몸을 숨겼다. 그리고 황희의 행동을 가만히 살폈는데, 뜻밖에도 황희는 종에게 그릇을 가지고 오게 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곳에 배를 가득 채워 저 뒤에 숨어 있는 젊은이에게 갖다줘라(이륙의 <청파극담>).”

이렇듯 황희는 너그러웠지만 누구에게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특히 뛰어난 관리로 명망이 높았던 김종서에겐 지나치리만치 박절하게 굴었다.

 

황희가 정승이고, 김종서가 공조판서일 때였다. 하루는 정승들이 공적인 일로 모이자 공조에서 술과 안주를 준비했다. 그러자 황희는 노기를 드러내며 김종서를 무섭게 꾸짖었다.

 

국가에서 예빈시를 정부 곁에 설치한 것은 삼공을 접대하기 위함인데, 만일 허기가 진다면 의당히 예빈시에서 음식을 장만하게 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어찌하여 판서가 사사로이 정부의 물자를 제공한단 말인가?”

 

그 뒤에도 황희는 김종서에 대해서만큼은 아무리 작은 잘못이라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엇다. 작은 실수라도 보이면 박절할 정도로 심하게 꾸짖는가 하면, 심지어 김종서 대신 그의 노비에게 매질을 가하거나 시종을 가두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고 김종서와 같은 반열에 있는 사람들이 지나치다며 불만을 터드렸고, 종서 역시 얼굴이 서지 않앗다. 그쯤 되자 정승 맹사성이 황희에게 타이르는 투로 물었다.

김종서는 당대에 뛰어난 신하인데, 대감은 어찌 그리 심하게 그의 허물을 잡는거요?”

 

그러자 황희가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종서를 아껴서 하는 짓입니다. 인물을 만들려는 게지요. 종서는 성격이 곧고 기운이 좋아 일 처리를 지나치게 빠르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종서가 뒷날 우리 자리를 잇게 될 것인데, 만사를 신중히 하지 않으면 국가 대사를 망칠 우려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미리 그의 기운을 꺾고 경계하여 스스로 뜻을 가다듬고 무게를 유지하여, 혹시 무슨 일을 당하더라도 가벼이 처신하지 않도록 하려는 겁니다. 결코 그를 곤란하게 만들려고 하는 짓은 아니외다.”

 

맹사성이 그 말을 듣고 감복했다.

훗날 황희가 영의정 자리를 내놓고 물러가기를 청할 때 김종서를 추천하여 자기 자리를 대신하게 했으니 , 김종서를 아낀다는 그의 말은 사실로 증명된 셈이다.(<지소록>)

 

 

맹사성은 청빈하여 한평생을 매우 가난하게 살았다. 거처하는 집은 늘 비바람도 제대로 가리지 못했으며 옷이 너무 남루하여 처음보는 사람은 그가 나라의 재상인 줄 짐작도 하지 못했다. 더구나 소를 타고 다니기를 좋아하고 그 위에서 피리까지 불어대니, 기껏해야 정처없이 떠도는 괴짜 악공 정도로 생각하기 십상이었다.

 

..

유관에 대한 일화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청빈함에 관한 것이다.

 

그는 청렴하고 방정하여 정승의 벼슬에 올랐을 때도 초가집 한 칸, 베옷과 짚신으로 담박하게 살았다. 집에즌 울타리도 담장도 없었는데, 그 사실을 안타깝게 여긴 태종은 선공감을 시켜 밤에 몰래 울타리를 만들어 주게 하고 비밀에 부치도록 했다. 또 그가 굶고 다닐까 염려하여 몰래 사람을 시켜 음식을 내리는 일도 많았다.

 

공무를 보고 돌아온 뒤에는 후학을 가르쳤는데 그 명성이 높아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지만 누구라도 와서 인사를 하면 고개를 끄덕일뿐, 이름을 묻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혹여 이름을 물어 사적인 관계를 이루면 사사로운 정이 생겨 공평무사함을 잃을까 염려한 까닭이다.

 

그의 집은 흥인문 밖에 있었는데, 성안으로 공무를 보러 갈 때도 그 먼길을 수레나 가마에 의존하지 않고 간편한 사모에 지팡이 하나만 들고 걸어다녔다. 가끔은 어린 시종들을 데리고 다녔는데, 그럴 땐 어김없이 그들과 함께 시를 흥얼거리며 놀면서 걸었다. 그 모습을 본 백성들이 그의 넒은 아량에 탄복하여 칭송이 자자했다.

 

언젠가는 장마가 한 달 내내 계속되어 그의 집이 온통 물이 샜다. 그물줄기는 마치 굵은 삼줄기 같았는데, 그는 손에 우산을 받쳐들고 부인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우산도 없는 집에서는 이 장마를 어떻게 견딜지 걱정이요.”

부인이 대답했다.

우산이 없는 집은 다른 준비가 있습니다.”

그는 멋쩍은 얼굴로 수염을 만지며 껄껄 웃었다(<필원잡기>).

 

그가 정승에 이르렀을 때도 제자들이 널리 가르쳐 많은 학도가 있었다. 매번 시향 때엔 제삿날 하루 전에 제자들을 모두 흩어 보내고, 제삿날에 제자들이 오면 모두 음복을 시켰는데, 안주라고 내놓은 것이 소금에 절인 콩 한 소반이 전부였다. 또 술이라곤 항아리에 담은 탁주가 유일했고, 그것도 반드시 한 사발씩만 마시도록 했다(<청파극담>).

 

이토록 술에 대해 철저했던 것은 가난 때문만은 아니었다. 술에 취하면 실수하게 마련이고, 그 실수가 화를 부를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는 성격이 소탈하여 겉모습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앗다. 정승 벼슬에 있을 때도 반가운 손님이 찾아오면 맨발에 짚신을 끌고 나와 맞이하였고, 때론 호미를 들고 몸소 채소밭을 돌아다니며 농사를 짓기도 했다.(용재총화>)

 

 

변계량卞季良은 네 살에 고시古詩를 줄줄외고, 여섯 살에 시를 지은 신동이다. 또 열 네 살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고, 열다섯 살엔 생원 시험에 합격하고, 열일곱 살에 문과에 급제한 재목이기도 했다.

그는 관직생활의 대부분을 학관직에 종사하여 세종 대의 학문적 기반을 닦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대표적인 문형이었다. 예문관과 집현전에 주로 근무하며 태종 대와 세종 초의 외교문서 작성을 거의 전담하다시피 했고, 한편으론 많은 학사들을 길러냄으로써 세종의 문치주의 정책에 획기적인 공헌을 했다.

 

 

 

소박하고 청렴한 목민관

최윤덕이 젊은 시절에 태안군 수령으로 있을 때의 이야기다. 어깨에 둘렀던 화살통 쇠 장식이 헐어 떨어졌는데, 공인이 그것을 발견하고 관가의 쇠로 기워서 고쳐 놓았다. 하지만 그는 기웠던 쇠 장식을 도로 떼어 냈으니, 그 청렴함이 이와 같았다(최윤덕 행장).

그가 평안도절제사와 안주 목사를 겸하고 있을 때였다. 공무가 끝나면 그는 공청 뒤에 있는 빈 땅을 손수 경작했는데, 하루는 소송하러 온 사람이 그가 누군지 모르고 이렇게 물었다.

대감께서는 어디 계신지요?”

윤덕은 어디 어디에 있습니다라고 속여 말했다. 그런 다음 곧장 들어가서 옷을 고쳐 입고 판결에 임했다.

또 촌락의 지어미가 찾아와 울면서 호랑이가 제 남편을 죽였습니다.”

하고 이르니, 그는 직접 활통을 메고 호랑이를 찾아나서며 말했다.

내 너를 위해서 원수를 갚아주겠다.”

그는 정말 범의 자취를 밟아 활로 쏘아 죽였다. 그리고 배를 갈라 남편의 뼈와 살을 꺼내 관을 갖춰 매장해주니, 그 지어미가 흐느껴 울었다.

한 고을 사람들익 m를 부모와 같이 사모했다.(<청파극담>)

 

그가 안주 목사로 있을 때 버드나무 수만 그루를 심었는데, 이는 터를 보호하고 수해를 막기 위함이었다. 이후로 사람들이 그의 뜻을 기려 감히 버드나무를 베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살고 있던 집 남쪽에 있던 두 연못에 연꽃을 심고 그 곁에다 꽃나무와 아름다운 풀을 심어뒀다고 하는데, 매양 공무가 끝난 뒤에는 노인들을 그곳으로 불러 상을 차려놓고 함께 웃고 즐겼다고 한다.(<연려실기술>).

 

 

세종의 글 선생, 이수

 

세종은 11살 때부터 형 이보(효령대군)과 함께 당시 생원에 불과하던 이수에게서 글을 배웠다. 그렇게 사제관계로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은 나중에 왕과 신하로 다시 만났지만 세종은 늘 그를 곁에 두고 스승으로 대접하며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수는 비록 정승의 자리에 오르진 못했지만 , 세종은 그가 죽었을 때 흰 옷을 입고 애도하는 식을 거행하였고 정승의 예에 준하는 장례를 명령했다. 이는 세종이 그를 평생의 스승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종은 그에게 내린 제문에서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오직 경은 학문이 정밀하고 넓으며, 성품과 행동이 단아하고 방정하였도다. 어렸을 때부터 내가 배움을 얻었는데, 마음을 알아줌은 은나라 무정이 감반을 만남과 같았고,지혜를 열어 교도함은 정열과 성의가 돋보였다. 슬프다. 생사의 무상함이여! 운명이라 피할 수 없으나 그 은혜와 의리는 이미 지극하니, 어찌 살고 죽음이 그 점을 다르게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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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때의 인물에 대해 읽었다. 어느때보다 인재가 많았고 나라가 안정되었던 시대다. 익히 들어 알고 있었던 사람들도 있고 처음 이름을 접한 분들도 있었다. 그들에 대한 글을 읽으며 참 좋은 시절이 우리나라에 있었구나 한다. 그들의 숨은 이야기와 많은 역사적 공헌들 이지만 잊지 못할 것은 사람됨이었다. 오늘날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은 과연 한사람이라도 이분들의 일면이라도 닮은 분들이 있을까 싶다.

오늘도 방하착放下着으로 고요히 걷게 되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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