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만권을 읽으면..

에피소드 한국사(조선편)/표학렬/앨피

다림영 2014. 1. 29.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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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은)도량이 좁고 시기가 많았으며, 또한 겁이 많아서 반드시 자기보다 나은 사람들을 해쳐서 그 묵은 감정을 보복하려 하여, , 임금에게 살마을 죽여 위엄을 세우라고 권하였으나, 임금은 모두 듣지 않았다.”-<태조실록>8826

태종이 말하였다. “지난날 자초 (무학대사)는 사람들이 모두 숭앙하였으나, 끝내 그는 득도한 경험이 없었다. 이와 같은 무리를 나는 길거리의 행인과 같이 본다.”-<태종실록>14620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던가. 이성계의 후원자로서 조선 개국 직후 왕사에 올라 조선 불교의 기틀을 잡은 무학대사와, 조선의 실질적 설계자인 정도전에 대한 <실록>의 기록은 인색하기 짝이 없다.<실록>뿐만 아니라 야사에서도 마찬가지다. 무학은 꿈 해몽이나 하고 풍수나 보는 기인으로, 정도전은 탐욕스러운 배불뚝이로 종종 그려진다.

하지만 두 사람의 실제모습은 이와 달랐다. 아마도 정도전이 태종에게 도전하다 제거되고, 조선의 억불정택으로 스님들이 폄하되는 분위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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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이 조선의 실질적인 설계자라면, 조선 건국의 정신적 지주는 무학대사다. 무학대사는 고려 말 타락한 불교를 개혁하고 새로운 불교를 일으키려 했다. 그는 새로운 개혁, 새로운 나라 건설이 필요하다며 이성계를 열렬히 설득했다.

 

무학대사가 불이 훨훨 타고 있는 집에서 서까래를 세 개를 짊어지고 나왔다는 이성계의 꿈 이야기를 듣고, 서까래 세 개를 짊어지고 나온 것은 임금왕王자의 형상이니 필시 임금이 될 꿈이라고 해몽해 준 것과, 서울로 수도를 옮기는 걸 적극 도왔다는 일화는 그가 얼마나 새나라 건설에 열성적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물론 정도전과 무학대사는 각각 유교와 불교를 신봉하였으므로 같은 길을 걷기는 어려웠다. 정도전은 불교를 미신으로 규정하고 배척하는 배불론排佛論을 앞장서서 주장했으니 , 두 사람의 관계가 순탄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양에 궁궐을 건설할 때에도 두 사람의 의견은 엇갈렸다. 무학대사가 인왕산을 주산主山으로 삼과 좌측을 바라보도록 궁을 짓자고 하자 , 정도전은 왕은 남쪽을 보아야 한다며 주산을 백악산(북한산)으로 정하고 궁을 건설하였다.

 

무학대사는 몇 년 뒤 한양이 피로 물들고 2백년뒤 나라 전체가 불길에 휩싸일 것이다.”라며 한탄했다고 한다.

과연 그의 말대로 몇 년 뒤 왕자의 난이 일어나고 2백년 뒤 임진왜란이 일어나 나라 전체가 큰 혼란에 휩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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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부름을 보냈는데 돌아올 기미가 안보이면 이녀석 , 함흥차사라고 말한다. 함흥차사? 비참하게 죽으면 횡사’, 길에서 죽으면 객사라고 하는데, ‘차사는 무슨 뜻일까?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일으킨 이방원이 마침내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 태조 이성계는 속이 몹시 쓰리고 아팠다. 자신과 함께 나라를 세운 개국공신 정도전, 사랑하는 아내 강비와 그 자식들이 아들 방원에게 살해당했다. 믿고 의지하던 이들을 모두 잃고, 자신이 꿈꾸고 만들어 가려던 나라도, 실질적인 권력도 모두 잃은 터였다.

 

크게 상심한 이성계는 서울을 떠나 고향 함흥으로 가 버렸다. 함흥은 이성계 집안이 대대로 살아온 땅이자, 그가 고려의 장군으로 활약할 때 동고동락한 부하들의 고향이었다. 이성계는 그곳에서 재기를 도모할지, 아니면 아예 은둔해 버릴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이방원은 크게 당황했다. 함흥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함흥 이북은 여진의 땅인데, 여진족들은 이성계 집안에 충성을 바쳤다. 만약 그들이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친다면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웠다. 아들 이방원을 향한 이성계의 분노는 그만큼 대단했다. 이방원으로서는 최대 위기였다.

 

이방원은 이성계를 다시 서울로 모셔 오려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다. 과거 이성계가 아끼던 부하를 차사로 임명하여 이성계를 설득해서 모셔오라며 함흥으로 보냈다. 차사差使란 왕이 특별한 임무를 맡겨 보내는 사신을 말한다. 그러나 함흥으로 간 차사들은 도착하는 족족 이성계에게 죽임을 당햇다. 그래서 함흥차사하면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는 심부름꾼, 돌아오지 않는 심부름꾼을 뜻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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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가 왕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1728(영조 4), 반란사건이 일어났다. 반란 주모자를 잡아 국문하는데 죄인 중 한 명이 큰소리로 외쳤다.

나는 갑진년 이후 게장을 먹지 않고 있소이다.”

 

죄인이 말한 갑진년은 경종이 죽은 해를 말한다. 갑진년 그해 , 경종의 병세가 악화되자 세제(왕위 계승권을 가진 동생)연잉군이 직접 의원들을 지휘하여 병구완을 도왔다. 경종의 병세가 약간 차도를 보이자 연잉군이 경종의 식욕을 돋우려고 게장과 감을 올렸는데, 경종이 이를 먹은 뒤 심한 복통과 설사를 앓다 죽었다.

연잉군, 곧 훗날의 영조는 경종의 동생으로 숙종이 무수리 출신 최씨와 동침하여 낳은 아들이다. 숙원에 봉해진 무수리 최씨는,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죽이려고 저주하였다고 고발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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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 -“주상께서 즉위하신 이래 말없이 팔짱을 끼고 신하들과 말하지 않은채 건의를 모두 수락하였다. 이에 흉악한 무리들은 왕을 업신여기고 사람들은 왕이 중병을 앓고 있나 걱정하였다. 그런데 하룻밤 사이에 결단을 내려 흉한 무리들을 물리치고 어진 선비들을 등용하시니 마치 천둥이 치고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듯하므로 비로소 모두가 주상이 높은 덕을 숨기고 계셨음을 깨달았다.”-<경종실록>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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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다. 하루는 신숙주와 세조가 술을 먹다가 팔씨름을 했는데 그만 신숙주가 이겨 버렸다. 당황한 신숙주는 술김에 실수를 했다며 사과했고, 세조는 술자리의 장난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이 소식을 들은 한명회가 신숙주에게 집으로 돌아가면 불을 끄고 무조건 자라고 충고했다. 술김의 실수라 했는데 만약 집에 가서 자지 않으면 세조가 의심하고 죽일 거라는 이야기였다. 과연 그날 밤 세조가 보낸 자객이 신숙주 집에 들었다가 불을 끄고 자는 모습을 보고 그냥 돌아갔다고 한다.

 

세조의 불안감은 계유정난을 주도한 훈구 대신들의 권력이 왕을 위협할 정도로 커져 버렷음을 뜻한다. 그 중심에 한명회가 있었다.

 

압구정

오늘날 압구정동은 강남의 화려함을 상징하는 곳이다. 고급 아파트와 부유층이 즐겨찾는 쇼핑센터가 즐비한 번화가의 대명서 압구정은 한명회가 지은 정자의 이름이다. 한명회는 말년에 경치좋은 곳에서 풍류를 즐기려고 지금의 압구정동 한강 가에 정자를 짓고, 이름을 한가로이 갈매기와 벗하겠다는 뜻에서 압구정狎鷗亭 이라 지었다. 현재 그곳의 부와 화려함과 어울리지 않는 이름 같지만, 한명회의 삶을 돌아보면 꽤 어울리는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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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류가객 소세양이 황진이의 소문을 듣고 찾아와 네가 비록 대단하다 하나 나는 너와 30일만 머물고 떠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사람이 아니다라며 호언장담했다. 둘은 함께 살며 사랑을 나누었고, 30일째 되는 날 소세양이 떠나려 하자 황진이가 덤덤한 표정으로 시 한 수를 바쳤다.

 

흐르는 물소리는 거문고 소리에 맞추어 차갑고

매화 향기는 피리 속에 스며들어 그윽하여라

내일 아침 서로 헤어진 후에는

그리는 마음 푸른물결처럼 길리라

 

이 시를 읽고 소세양은 그래 내가 사람이 아니다.”라고 한탄하고 계속 머물렀다고 한다.

황진이, 그녀가 사랑한 남자 소세양 외에도 6년을 같이 산 이사종, 금강산을 함께 유람한 이생 등이 있다. 지조보다는 사랑을 택하고 사랑 앞의 위선을 조롱하며 한생을 살았던 황진이, 그녀야말로 진정한 기생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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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김상헌의 서인은 쿠데타를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즉위시켰다. (인조반정)이후 명나라에 대한 사대를 강화하고 청에 적대정책을 취해으니 그 대가가 바로 병자호란이다.

 

묘청과 김상헌은 겉으로는 똑같이 사대를 반대하고 자주를 주장한 사람으로 보이지만, 그 속살을 들여다보면 완전히 다른 존재다. 묘청은 기존의 고려를 바꿀 개혁 정책을 추진하면서, ‘강한 고려에 걸맞는 대외정책으로서 금에 대한 사대를 반대했다. 반면 김상헌은 사대의 대상을 바꾸기를 거부했을 뿐 사대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며, 개혁을 추진한 게 아니라 기존의 조선을 지키려는 보수적 관점에서 변화에 반대했다.

 

역사는 겉보기에 같은 현상이 반복되는 듯 보일 때가 많다. 하지만 그 시대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들여다보면, 결코 같은 역사가 반복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한번 흘러간 물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리라.

 

 

 

 

..1830년 전후에 시작된 그의 방랑은 이후 30여 년간 계속되었다. 그는 공교롭게도 세도정치가 끝나는 해인 1863(철종 14)에 죽었다.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된 헌종 때부터, 2기 안동 김씨 세도정치가 절정에 달한 철종 때까지가 그의 방랑시절이었다. 바로 이 시기 부정과 위선에 대한 풍자와 비판의 대명사가 바로 김삿갓이다.

모든 위선을 통렬히 비판하다

 

사면 기둥 붉게 타

석양 행객 시장타

이 절 인심 고약타

지옥가기 꼭 좋타

 

어느날 저녁 무렵, 김삿갓이 절에 갔는데 스님이 자기가 내는 끝 글자로 운을 맞추어 시를 지어보라고 했다. 스님이 처음에 자를 내어 노을 지는 풍경을 보며 점잖게 지어 주었는데, 스님이 심술 맞게 또 자를 내자 이 시를 지어 스님을 조롱한 것이다. 김삿갓은 못된 스님을 골려 준 것이기도 하지만 당시 절이 지주로서 가난한 농민을 억압하는 현실을 비판한 것이기도 하다.

 

그는 왜 30년 동안 방랑하며 세상을 비판했을까? 자신을 찾아 전국을 헤맨 아들이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오라고 간곡히 부탁해도 화장실에 간다며 몰래 도망치기를 몇차례, 그는 끝내 길에서 죽고 말았다. 결국 불쌍한 그의 아내 황시는 이팔청춘에 생과부가 되어 수절하다가 죽었고, 자식들도 홀어미 밑에서 모진 고생속에 자라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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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는 세도정치 속에서 기존 양반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안동 김씨와, 김조순과 김삿갓처럼 그걸 개혁하려고 노력하거나 조롱하는 안동 김씨가 공존할 수 있었고, 그 속에서 조선은 변하지 않고 계속 혼란에 빠져들었다.

 

나쁜 것낡은 것은 분명 다른 개념이다. 그리고 역사는 최소한 격동기에는 나쁜 것보다 낡은 것을 더 싫어한다. 새로워야 할 때 새롭지 못한 죄, 변해야 할 때 변하지 않은 죄, 그것이 바로 세도정치가들의 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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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이 고대수라는 궁녀에 대해 쓴 기록이 있다. 김옥균은 그녀를 남자 대여섯을 당해 낼 정도로 덩치가 크고 힘이 셌다.” 라고 표현했다. 물론 그렇다고 궁녀들이 우락부락 힘만 셌던 것은 아니다. 일제시대 경복궁에서 조선왕실을 관리했던 일본인 곧도 시로스케는 궁녀들을 조선 미인의 전형으로 기품있고 우아하고 아름답다고 묘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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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극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인기가 있다고 하는데 그 여파로 역사이야기를 읽게 되었다. 지금은 세종과 관련된 이야기를 읽고 있다. 이러다가 이후 역사책으로 빠질 듯 하다. 정조시대의 이야기가 펼쳐진 영화 두 편에 대한 언급도 있었다. 찾아 보아야 하겠다. <영원한 제국>,<조선 명탐정>..역사에 대한 이야기가 이렇게 재미있을 줄은 미쳐 몰랐다.

 

 

“‘나쁜 것낡은 것은 분명 다른 개념이다. 그리고 역사는 최소한 격동기에는 나쁜 것보다 낡은 것을 더 싫어한다. 새로워야 할 때 새롭지 못한 죄, 변해야 할 때 변하지 않은 죄, 그것이 바로 세도정치가들의 죄다. ”....

 

친구에게 명절 메시지를 보냈더니 언제 전화번호를 바꾸느냐고 묻는다. 스마트폰이라는 것이  서로간에 무료로 번개처럼 볼수 있는 무엇이 있으련만 내 전화기로 날아드는 메시지는 그렇지가 못하리라. 그에 대한 답변을 쓰다가 메시지가 어디론가로 날아가 버려 그만 두었다...

 

낡은 것은 나쁜 것이 아닐 것이라 믿는데 새로워야 할 때 나는 새롭지 못하고 있는데 이것은 죄가 아닐 것.... 조용히 한가로이 살고 싶을 뿐이다. 또 언젠가는 마음이 동하여 쥐도새도 모르게 전화를 바꾸게 될지 모르겠으나 지금은 아무런 마음이 없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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