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만권을 읽으면..

가을여자/오정희소설/랜덤하우스

다림영 2013. 7. 17.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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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날의 펜팔

 

바람이 분다, 살아야겟다라고 읊은 시인이 있고 지나간 어느 한때 나 역시 열심히 그 시를 외우며 초등학교 3학년 학생같은 용기와 비장감을 북돋우기도 했었다.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에서 읽은 나다니엘이여, 비를 받아들여라라는 구절에 심취되어 천둥과 번개와 폭우 속을 일부러 우산을 접고 맨몸으로 걸을라치면 온 세상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느낌이 아니었던가. 우주보다 더 무한히 열려 있는 미래를 담보한 젊음의 시절이었다. 퇴근길에 만나 폭우에 당황하여 허겁지겁 길가 노점상에서 우산을 사며 나는 잠깐 쓴웃음을 지었다.

 

일금 사천 원을 주고 산 우산은 내가 타야 할 좌석버스 정류장에 미처 닿기도 전, 사나운 바람과 빗줄기를 견디지 못해 뒤집히고 살대가 부러졌다. 형편없는 엉터리 물건을 만들어 파는 상혼과 그것이 통용되고 횡행하게끔 된 사회구조, 나아가 빗속에 고스란히 드러난 남루하고 초라한 내 삶에 이르기까지 짜증은 울화로, 다시 분노로 걷잡을 수 없이 끓어올랐다.

 

우산살이 거의 다 부러진 우산을 어쨌든 다시 펴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이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버렸다. 나는 우선 비르 그을 요량으로 바로 길 옆의 빌딩으로 들어섰다.

 

1층에 제법 넓고 깨끗한 찻집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화나는 푼수로는 우산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어야 했지만 그래도 잘 손보면 다시 쓸수 있지 않을까 하는 오랜 절약생활의 습관으로 챙겨 들었다.

 

찻집 문을 밀고 들어서다가 나는 되돌아 나왔다. 물이 뚝뚝 흐르는 몸으로 흰 시트가 정갈한 의자에 앉을 염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뜻한 커피 한잔이 아쉬웠기에 나는 쉬이 문 앞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데 찻집 문이 열리고 서너 명의 여자들이 나왔다. 흘깃 스친 인상으로, 그중 엷은 보랏빛 투피스 차림인 여자의 얼굴이 어딘가 낯익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디서 보았더라? 나는 먼 기억의 갈피짬을 헤집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여자쪽도 마찬가지였던가, 빌딩 입구까지 갔던 걸음을 되돌려 다가오며 애매하게 웃음 띤 얼굴로 물엇다.

 

 

혹시 예전 통영에 살던.....허영구 씨 아니신가요?”

그렇습니다만....”

, 그녀가 낮게 탄성을 질럿다.

저를 모르겠어예? 하기사 이십 년이 지났으니....포항 N여고 다니던 강선희라꼬 기억 못 하시겠습니꺼? ....펜팔루다....”

 

그녀의 깍듯한 서울 말씨가 대번에 낭창낭창하고 울림이 높은 남녘 사투리로 바뀌었다. 나는 비로소 떠올릴 수 있었다. 둥근 얼굴에서 살점을 깎아내고 이십 년의 세월을 걷어낸다면 첫눈에 반해버렸던 수줍고 곱던 소녀의 얼굴이 그대로 드러날 듯도 싶었다. 산 사람은 어디서건 만나기 마련이라더니 이런 우연도 있나 싶었다. 옛사람을 만나니 환멸 뿐 이더라는 말도 맞는 말은 아닌가 보다. 이십 년 세월 저편 까까머리 소년의 연정과 설렘이 향수처럼 살아나는 것을 느끼며 나는 어느 결에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섭리다. 라고 자신에게 이르고 있었다.

 

가벼운 목례와 의례적인 인사말로 헤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멈칫대는 내게 그녀는 먼저 차나 한잔 함께하자고 말했다 . 차를 시키고 나서 비로소 나는 그녀를 찬찬히 보며 그녀의 상황이나 환경을 추리해보았다.

 

안정된 중산층 가정의 주부인 듯도 했으나 그러기엔 옷매무새나 화장이 지나치게 세련되었다. 스스럼없이 찻집으로 이끄는 태도나 젖은 머리 닦으라고 손수건을 건네주는 선선한 태도에는 직장여성의 당당함과 세파에 닳은 구석이 엿보였다. 그녀의 눈에 비친 나는 어떠할까. 세거든 빠지거나 말든가 빠지려거든 세지나 말든가 하지. 희끗희끗 세어가며 소갈머리 보이는 중년의 사내. 상사와 마누라의 억업에 찌든 익명의 사회인.

 

언제든 만나면 꼭 한번 물어보려 했어예. 그날 왜 그렇게 가버렸는지. 저물 때까지 산에서 기다리다가 막차 타고 포항 오는데 그렇게 비참할 수 없었던 기라예. 일생 남자한테 그런 대접을 받은 기 그때 뿐이라예

 

그녀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빤히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의 말에 마음속 깊이 감춘 부끄러움을 찔린 듯 목덜미부터 확 달아올랐다. 아무리 옛날이야기라지만 그때의 배반감과 수치심을 어찌 말할 수 있으랴.

 

우리는 이른바 펜팔 친구였다. 학원잡지 펜팔 란의 주소를 보고 편지를 쓰기 시작해서 사흘들이로 미지의 벗에게 밤새워 편지를 쓰고 답장을 애타게 기다리는 게 일이었다. 석달만에 사진 교환을 하고 일년 만에야 만날 용기를 얻어 나는 포항에 사는 그녀에게 내가 사는 작은 항구의, 여수와 권태와 먼 바다로 나가고자 방랑하는 마음을 만나러 오라는 편지를 띄웠다.

 

여름이 시작되던 어느 일요일. 그녀는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며 나를 만나러 왔다. 그녀에게 들려줄 인생과 사랑과 예술의 이야기. 행여 불량배를 만나거나 풀숲의 뱀을 만났을 경우 내가 취할 태도까지 든 각본을 짜고 나는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사진보다 더 예쁘고 ,체격도 나무랄 데가 없었다. 나는 내 행운을 믿을 수가 없었다.

 

편지에 썼던 대로 바다가 보이는 야산 언덕으로 앞서 걸었다. 그러나 뜻밖의 복병의 불량배나 뱀 따위가 아니었다.

 

그녀와 나는 그늘이 무성하고 풀숲이 소담스런 소나무 아래 나란히 앉았다. 조금이나마 서먹함과 어색함을 감추고 의젓함과 여유 있는 자세를 보이고자 어깨를 한껏 젖혀 손바닥으로 풀숲을 짚던 나는 물큰 잡히는 느낌에 진저리를 쳤다.

 

똥이라는 외마디 단어가 입에서 튀어나오는 대신 세차게 뇌리를 강타했다. 냄새라거나 더러움이라는 생각이 미처 듣기 전 나를 엄습한 것은 지독한 수치심과 배반감이었다. 그녀에게 들려주기 위해 준비했던 고독과 절망과 방황, 사랑에 대한 잠언과 경구,시구, 설익고 거짓말투성인 감상 따위가 다 똥 같은 소리들이라고 그것은 조소하고 있었다.

 

더러운 손을 주먹 쥔 채 나도 뒤도 안 돌아보고 언덕을 내려왔다. 선창의 기름 뜬 물에 손을 씻으며 낯선 언덕에 남겨진 그녀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펜팔도 물론 끊어졌다. 그때 그 일이 없었더라면 우리 사이는 어떻게 발전했을까? 아니 지금부터 우리에겐 새로운 운명이 시작되는 건 아닐까. 부질없고 아련한 감상과 공상에 빠져드는 내 귓전에 어느결에 깎듯한 서울 말시로 바뀐 그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허 선생님 보험 든 거 있으세요? 지금 사회는 세대교체가 빠르니 노후대책이 절실해요.자녀들이 어리다면 교육문제도 생각해야 하구요. 사람 살아가는 데 뜻밖의 재난이란 남의 일이 아녜요. 그저 미리미리 대비를 해야...종류는 많아요.“

 

그녀의 히고 날렵한 손이 어느새 커다란 손가방의 지퍼를 열고 있었다. 그 손놀림은 무위한 공상과 감상에 찬물을 끼얹어 나를 현실로 돌려놓고 그 옛날 똥을 만졌을 대의 그 부끄러움과 배반감을 불러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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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단편 소설읽기...

 

오정희 선생님의 단편집을 빌렸다. 위의 글을 읽고 혼자 마구 웃었다.

언젠가 남자 동창 몇에게 전화가 왔다. 어떤 여자 친구의 이름을 대며 아느냐 물어보는데 고개를 갸웃했던 기억이 있다. 아마도 옛 동창의 이름을 빌려 낯선 미모를 무기로 몇 명의 남자친구에게 접근 했고 처음엔 차 한 잔 얘기하다가 나중엔 이런 모양새가 된 듯 했다. 어떤 친구는 읽지도 않는 무슨 책을 샀다고 들었다. 시간이 꽤 흐른 이야기여서 어찌 된 상황인지 가물하기도 하지만 남자들이란 많지도 않은 동창을.... 어쩌면 기억에도 없는 동창에게 그 가물한 기억 속에 있거니 하며 믿어 버린것인지 ....그러나 어쩌면 내게도 그런 일이 생기면 모를 일이다. 알싸한 옛 감정에 휩싸여서...

 

옛 시절은 늘 그립고 그 곳에 머물던 모든 친구들 또한 그리움으로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얼마동안 씁쓸한 웃음을 날려야 했다.

어려움에 처하게 되면 추억이고 그리움을 떠나 실낱같은 인연 줄을 따라 그렇게 찾아 다니게 되는 삶은 얼마나 막막해서 그러했을까 하지만 나라면 노동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했을 것 같다. 아름다운 추억속의 묻혀 있는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싶진 않을 것 같은 마음이다.

 

실제 있을법한 얘기여서 웃었다. 소설은 단지 허구만이 아니라 하나의 작은 그림이나 사연 사람이 모티브가 되어 멋진 글을 만들어 내는 것이리라. 단편을 읽다보니 문득 글을 짓고 싶어져서 이야기를 꾸리고 대충 줄거리를 써놓았는데 살붙이기가 너무 어렵다. 하여 요즘은 소설읽기에 돌입했다.

 

소설작법에 대한 책을 언제부터 찾아 읽어보고 있으나 그것만 들여다보고 있다고 될 일도 아닌 듯싶어 흩어진 못난이 진주들을 한번 꿰어보기로 마음먹었다. 아주 짧게 시작해 보기로 ...

 

문학회에 들었을 때 선생님께서 숙제를 내주면 군 말 없이 어찌되든 만들어 내었다. 유치하든 부족하든 숙제를 했고 끙끙 몇 며칠 앓곤 했다. 그렇게 한 달 한 달 이어지다보면 그 길에 조금씩 나아지던 글쓰기였던 것으로 안다. 이제 문학회는 멀리 달아났으니 스스로 숙제를 내어야 할 것 같다. 무엇이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 글쓰기 속에서 하루하루 각별한 나의 시간이 태어나는 듯싶기도 해서 즐겁기도 하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나도 모르는 강에 다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 본다.

그저 책읽기로, 좋은 글 접하기로, 마음 닦기에 그치지 말고 구슬을 꿰어보기로 한다. 부족하든 유치하든 모자라든... 지속적으로 무엇이든 ...

부족하기 짝이 없는 나의 글이다. 늦었지만 하루하루 아주 조금씩 살을 붙였다가 떼어내며 가끔은 웃고 또 어느 때는 쳐다도 보지않고 덮어두고 고뇌하는 시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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