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안역을 지나며
원동은
잠시 나는 물끄러미 차창 밖을 내다복 되었다
전철은 멎었고 거리는 황혼에 젖어들고 있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바쁘게 오갔으며 인파 사이로
마지막 남은 빛줄기가 핏물처럼 스며들었다
제기럴, 하고 나는 나직이 신음했다
이상스런 고통이 엄습해 창자가 뒤틀렸다
상전벽해라니, 이번에는 공연히 허둥거렸다
옛날을 회상한다는 것은 쓰라린 일이었다
다시 전철은 움직였고 그를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잠시 후 나는 쑥대풀 우거졌던 철로변의 탄(炭)더미와
쓰러진 망초꽃, 미나리꽝 따위를 떠올리느라 끙끙댔다
저리 오르는 언덕빼기에 이민 간 친구의 양계장과
맨드라미 꽃술 같던 레그혼들도 재빨리 떠올랐다
소금발이 돋치던 석양무렵의 주안 염전에
삐걱이던 수차()도 컴컴한 소금창고도 생각해냈다
문득 시집간 애인의 안부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허나, 이제와서 무슨 소용이 있으랴
잠시 나는 개처럼 쏘다닌 젊은 날의 방황을 저주하였다
시이야기-
역은‘떠나 옴’과 ‘떠나 감’의 지정학적 좌표다. 가고 옴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떠남의 동질성은 불변이다. 떠남은 공간의 이동, 관계의 유탈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내가 움직이지 않았는데 상대가 변하는 것 또한 떠남의 양태가 된다. 이런 떠남의 형식 가운데 시간만큼 야멸찬 것은 없다. 시간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고 이윽고 모든 것을 무화시킨다. 근근이 우리의 기억이 흘러가 버린 것 해버린 것을 환원 혹은 복원시켜보려고 시간의 통로 속에서 안간힘을 쓰지만 부질없는 겨우가 훨씬 더 많다.
역이 이런 안쓰러운 회억과 그 부질없음을 확인하는 공간으로 대체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주안역은 인천광역시의 도심 여 중 하나이지만 시인의 회상과 과거반추의 상관성으로 볼라치면 강원도 바닷가건 충청도 산골에 있건 별반 차이가 없다. 전통적 농경사회의 몰락과 근대 산업사회 성립의 접합점에 철도가 있으며 철도가 새로운 문명의 도입과 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음은 누구나 아는 바다. 새로운 문명은 기존의 문명을 재빠르게 지우며 스스로 몸집을 불려 다가오는 새 문명의 먹잇감이 되게 마련이다.
변해 버린 주안역 주변을 내다보면서 ‘쑥대풀 우거졌던 철도변의 탄(炭)더미와 쓰러진 망초꽃, 미나리꽝 따위’를 추억하고 있는 시인에게는 거리에 늘어선 고층빌딩과 무수한 차량들, 네온사인 등이 상전벽해처럼 여겨지지만 기실 겨인선 철로가 놓이기 전 이곳에 살았던 이들에게는 탄 더미 쌓은 주안역 자체가 천지개벽의 풍광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문명의 전개를 위시한 모든 변화는 지극히 개인사적 안목과 관찰을 여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된다. 이내 시인이 역 뒤편 언덕빼기에 있었던 ‘이민 간 친구의 양계장’과 그 양계장에서 ‘맨드라미 꽃술’같은 벼슬을 흔들며 구구대던 레그혼들을 떠올리고 ‘소금발이 돋치던 석양 무렵’ 주안 전에서 ‘삐걱이던 수차(水車)’와 ‘컴컴한 소금창고’를 생각해 내는 까닥ㄹ도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시집간 옛 애인의 안부를 궁금해 하며서 ‘개처럼 쏘다닌 젊은 날의 방황’을 저주하기에 이른다.
적절히 그 연륜에 어울리는 엄살(?)까지 섞으며 ‘발견-추억-성찰’이라는 정통적 점층법으로 시의 격을 끌어올리고 있는 시인의 솜씨를 더듬으며 주안여 플랫폼을 서성이고 있는 때에도 전동차들은 쉼없이 들고나면서 사람들을 빨아들이고 쏟아냈다. 깊은 밤인 양 여겨지는 겨울의 저녁 무렵이었다.
옆구리에 노란 봉투 하나를 낀 시인이 하마나 예의 그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인파속을 헤쳐 나올 것 같아 내 눈길도 절로 군중 속을 더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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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내게도 시간의 여유가 생길지 모르겠다. 그러하면 제일 처음 기차를 타고 어느 지역을 가 보는 것도 아닌 시가 있던 역에 내리고 싶다. 내려 고독한 어떤 시를 떠올리면서 나도 시인처럼 적막하고 고요한 바람과 정적에 묻혀서 뜨거운 커피한잔을 들고 조그만 역 앞 낡은벤취에 앉던가 어느 나무 그늘아래 ,혹은 역사 안에서 들고 나는 사람들을 유심히 지켜보다가 눈에 들어오는 어느 이의 사연을 혼자 만들며 몇 줄 써 내려가고 싶은 것이다.
‘사평 역에서’ ..곽재구의 시를 좋아한다. 나는 그 사평역이란 곳이 있는 줄 알았다. 사평 역은 상상의 역이라 한다. 겨울만 되면 찾아 듣고 읽으며 고독을 즐겼는데... 그 시에서 영감을 얻어 임철우라는 소설가가 사평 역 이라는 소설을 썼다고 한다. 다음엔 소설책을 꼭 빌려 읽어야 하겠다. 이 책에선 그러니 사평 역에 대한 시는 없다. 역마다 씌여진 시인들의 시에 젖다가 오래전 이 주안역엔 내린 적은 없으나 지나던 시절이 있어 시를 읽어보니 마음에 걸어들어와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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