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송 詩

[스크랩] 이병률 시인

다림영 2013. 6. 21.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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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률 시인
1967년 충북 제천 출생.
서울예전 문창과 졸업/파리 영화학교 ESEC 수료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좋은 사람들> <그날엔>당선.
시힘 동인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현재 MBC FM 이소라의 음악도시의 작가

 

------------------------------------------------게시된 시------------------------------------------

 

내 마음의 지도 / 이병률    
장도열차 / 이병률
누(累) / 이병률
밤 열두 시 / 이병률
이사 / 이병률
좋은 사람들 / 이병률
그날엔 / 이병률
고욤나무 / 이병률
거인고래 / 이병률
스미다 / 이병률
바람의 사생활 / 이병률
봉인된 지도 / 이병률
겹 / 이병률
절연 -이병률

 


 

 

 

내 마음의 지도 / 이병률     

 

       

1


자주 지도를 들여다 본다
모든 추억하는 길이 캄캄하고 묵직하다
많은 델 다녔으므로, 많은 걸 본 셈이다
지도를 펴놓고 얼굴을 씻고,
머리 속을 헹구워 낸다
아는 사람도, 마주칠 사람도 없지만
그 길에 화산재처럼 내려 쌓인다
토실토실한 산맥을 넘으며,
온 몸이 다 젖게 강을 첨벙이다
고요한 숲길에 천막을 친다
지도 위에 맨발을 올려보고 나서도
차마 지도를 접지 못해 마음에 베껴두고 잔다
여러 번 짐을 쌌으므로 여러 번 돌아오지 않은 셈이다
여러 번 등 돌렸으므로 많은 걸 버린 셈이다
그 죄로 손금 위에 얼굴을 묻고
여러 번 운 적이 있다

 

2


깊은 밤, 나는
그가 물을 틀어 놓고
우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울음소리는 물에 섞이지 않았지만
그가 떠내려보낸 울음은
돌이 되어 잘 살 거라 믿었다

 


 

장도열차 / 이병률

 


- 대륙에 사는 사람들은 긴 시간 동안 열차를 타야한다. 그래서 그들은 만나고 싶은 사람이나 친척들을 아주 잠깐 동안이나마 열차가 쉬어 가는 역에서 만난다. 그리고 그렇게 만나면서 사람들이 우는 모습을 나는 여러 번 목격했다.

 

 

이번 어느 가을날,
저는 열차를 타고
당신이 사는 델 지나친다고
편지를 띄웠습니다

 

5시 59분에 도착했다가
6시 14분에 발차합니다

 

하지만 플랫홈에 나오지 않았더군요
당신을 찾느라 차창 밖으로 목을 뺀 십오분 사이
겨울이 왔고
가을은 저물대로 저물어
지상의 바닥까지 어둑어둑했습니다

 

 

 

누(累) / 이병률

 

 

늦은 밤 쓰레기를 뒤지던 사람과 마주친 적 있다
그의 손은 비닐을 뒤적이다 멈추었지만
그의 몸 뒤편에 밝은 불빛이 비쳐들었으므로
아뿔싸 그이 허기에 들킨 건 나였다
살기가 그의 눈을 빛나게 했는지 모르겠으나
환히 웃으며 들킨 건 나라고 뒷걸음질쳤다
사랑을 하러 가는 눈과 마주쳤을 때도 그랬다
늦은 밤 빨랫감을 털고 있는 내 방 창문을 지나
막다른 골목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던 숫그림자는
구두 굽에 잔뜩 실은 욕정을 들키자
번득이는 눈으로 달겨들 채비를 하고 있었다
이럴 땐 눈이 눈에게 말을 걸면 안 되는 심사인데도
자꾸 아는 척해야 할 일이 있는 사람처럼
내 눈은 오래도록 그 눈들을 따라가고 있다
또 한 번 세상에 신세를 지고야 말았다 싶게
깊은 밤 쓰레기 자루를 뒤지던 눈과
사랑을 하러 가는 눈과 마주친 적 있다

 

 


밤 열두 시 / 이병률

 

 

1


밤 열두 시는
떡복이 1/2인분과 순대 1/2인분이다
그것도 다 식은 채로
한 접시에 나란히 나오는 것이다
순대는 고추장에 닿지 않으려고
한사코 한쪽을 지키고 있고
떡볶이는 순대 쪽으로 진물을 흘리고 있다

 

순대 먼저 먹을지
떡볶이 먼저 먹을지
밤 열두 시는 삶에 있어 절반이다

 

2


밤 열두 시는
밥 한 공기를 시켜
당신과 내가 나눠 먹는 일이다
그러다 밥 속에서 눈썹이 나오면 눈섭을 떠내어
몰래 식탁 밑으로 숨기는 일이다
당신의 숟가락이 지나간 자리엔
붉게 수술자국 생겨나고
사과나무 하나 뽑혀나간 것 같은 구덩이는
두 사람이 걸어온 밤길처럼 메꿀 길이 없다

 

반찬 묻은 족을 먹어야 할지
안 묻은 쪽을 먹어야 할지
밤 열두 시는 삶에 있어 절반이다

 

 


 이사 / 이병률

 


이삿짐을 싸다 말고
옥상에 올라가 담배를 피우다 보니
그냥 두고 갈 뻔한 고추 몇 대
미안한 마음에 손을 내미니
빨갛게 매달린 고추가
괜찮다는 듯 떨어진다
데려가 달라고 하지 않으면
모른 체 데려가 주지 않을 生
새벽 하늘을 올려다보니
눈을 찌르는 매운 물기

 

 

 

좋은 사람들 / 이병률

 


 우리가 살아가는 땅은 비좁다 해서 이루어지는 일이 적다 하지만 햇빛은 좁은 곳 위에서 가루가 될 줄 안다 궂은 날이 걷히면 은종이 위에다 빨래를 펴 널고 햇빛이 뒤척이는 마당에 나가 반듯하게 누워도 좋으리라 담장 밖으론 밤낮 없는 시선들이 오는지 가는지 모르게 바쁘고 개미들의 행렬에 내 몇 평의 땅에 골짜기가 생기도록 상상한다 남의 이사에 관심을 가진 건 폐허를 돌보는 일처럼 고마운 희망일까 사람의 집에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일이 목메이게 아름답다 적과 내가 엉기어 층계가 되고 창문을 마주 낼 수 없듯이 기운 찬 사람을 만나는 일이란 따뜻한 숲에 갇혀 황홀하게 밤을 지새는 일 (지금은 적잖이 열망을 끼얹거나 식히면서 살 줄도 알지만 예전의 나는 사람들 안에 갇혀 지내기를 희망했다) 먼 훗날, 기억한다 우리가 머문 곳은 사물이 박혀 지내던 자리가 아니라 한때 그들과 마주잡았던 손자국 같은 것이라고 내가 물이고 싶었던 때와 마찬가지로 노을이 향기로운 기척을 데려오고 있다 땅이 세상 위로 내려앉듯 녹말기 짙은 바람이 불 것이다
 

 

 

그날엔 / 이병률

 

 
 갖고 싶은 것 다 가지고 사는 사람 있는가 내 어머니의 연탄구멍 같은 교훈이 석유난로 위에서 김을 낸다 오랜만에 숭늉이 끓는다 어머니의 어머니는 딸을 두고 일찍 재가하셨고 세상에서 유명한 구멍 속으로 발을 들여놓으셨다 구멍만을 디디고 이 길까지 오신 어머니는 온통 세상이 혼자뿐인 것 같아 자식 스물을 꿈꾸셨지만 결국은 구멍에다 나를 빠뜨리셨다 한 길 가는 생명이 바람이 내어준 길을 따라 코를 열고 바빠할 때 난 듣는다 또 숭늉 끓이는 소리와 탄식은 탄식을 낳는다는 소리를


 어머니는 살아 계시지만 그 말을 어머니의 살아 계시는 유언이라 믿는다 세상의 문이 고쳐져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기까지 갖고 싶은 것 다 갖고 살지 못한다 나는 영영 태어나지 않을 부자가 되어 무섭게 떠돈다 땅이 사람 가슴 안에서 얼마나 여러 번 쪼개어지는가를 본다 어머니가 내 자식을 연인처럼 사랑하다 들킨 듯 웃으시는 걸 본다 그날엔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고욤나무 / 이병률

 

 

폭포 내려오는 길에 거대한 나무 하나 넘어져 있다

 

 오르는 길에는 보지 못했는데 내려오는 길에 본다

 

 아마도 어젯밤 일이었을 것이다 하도 오랜만에 비 내려 그 비를 반가워하다 발을 접질렀을 것이다

 

 밑동이 한 바퀴 휜 것을 보니 어느 쪽으로 넘어질 것인가를 고민했던 상체의 흔적이 역력하다 사람 오르내리는 길 모른 체하고 개울 쪽으로 누워 스스로 집이며 몸이며 經인 사랑을 염하고 있다

 

 밑둥치에서 놀던 벌레들은 얼마나 놀랬을꼬 얼마를 놀라 얼마를 기어 달아났을꼬 넘어지는 큰 나무를 몇 개 가지로 받아내던 이웃 나무는 가지를 잃고 얼매나 흔들렸을꼬

 

 어루만져주고 싶어 명치가 어디께인지를 더듬다 뽑혀나간 손톱을 본다 사력을 다해 허공이라도 잡으려 뻗었다가 빠졌을 손톱 소리 쟁쟁하다

 

 폭포 내려오는 길에 넘어진 큰 나무가 개울물에 배를 띄우고 있다

 

 

 

거인고래 / 이병률

 

 

거인고래는 크지 않습니다

왼 눈은 감정 있는 것을 보고

오른 눈은 죽어 있는 것을 보기를 좋아합니다

상처가 생기면 상처 된 자리를 스스로 떼어내 번지지 않게 하며

백 오십년을 살 뿐 오래 살지 않습니다

그 일생의 한번 나의 천막에 들른다 하였습니다

 

밤은 어둡고 꽃들은 서로를 모른 체 하는 사이

나는 그의 눈을 받아먹고 고양이 되고 얼음이 되고 눈발이 되려

질척이며 그가 오는 소리를 향하여 몸 돌리려 하였습니다

헌데 거인고래는 살아오지 않는 존재라 하였습니다

기다리는 일은 구실이며 병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니 설레는 일 없도록 다 내려놓아야겠는데

팔뚝에 불을 질러 연기를 피우는 천막 밖의 저 큰 나무

큰 나무 아래 몸에서 몸위로 까무러치는 수천의 달(月)들

 

혹 내가 터를 옮길 적마다 서 있던 저 나무 한그루가 거인고래는 아니었는지요

 

그것으로 다녀간 것으로 치자는 셈은 아닌지요

거인고래가 다녀가고 나와 내 생각의 풍경들은 마지막을 바라보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애지 (2005년 가을호)

 

 

 

스미다 / 이병률

 


새벽이 되어 지도를 들추다가
울진이라는 지명에 울컥하여 차를 몬다
울진에 도착하니 밥냄새와 나란히 해가 뜨고
나무가 울창하여 울진이 됐다는 어부의 말에
참 이름도 잘 지었구나 싶어 또 울컥
해변 식당에서 아침밥 시켜 먹으며
찌개냄비에서 생선뼈를 건져내다 또다시
왈칵 눈물이 치솟는 것은 무슨 설움 때문일까
탕이 매워서 그래요? 식당 주인이 묻지만
눈가에 휴지를 대고 후룩후룩 국물을 떠먹다
대답 대신 소주 한 병을 시킨 건 다 설움이 매워서다
바닷가 여관에서 몇 시간을 자고
얼굴에 내려앉는 붉은 기운에 창을 여니
해 지는 여관 뒤편 누군가 끌어다놓은 배 위에 올라앉아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는 한 사내
해바라기 숲을 등지고 서럽게 얼굴을 가리고 있는 한 사내
내 설움은 저만도 못해서
내 눈알은 저만한 솜씨도 못 되어서 늘 찔끔하고 마는데
그가 올라앉은 뱃전을 적시던 물기가
내가 올라와 있는 이층 방까지 스며들고 있다
한 몇 달쯤 흠뻑 앉아 있지 않고
자전거를 끌고 돌아가는 사내의 집채만한 그림자가
찬물처럼 내 가슴에 스미고 있다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문학동네

 

 

 

바람의 사생활 / 이병률

 

 

가을은 차고 물도 차다
둥글고 가혹한 방 여기저기를 떠돌던 내 그림자가
어기적어기적 나뭇잎을 뜯어먹고 한숨을 내쉬었던 순간

 

그 순간 사내라는 말도 생겼을까
저 먼 옛날 오래전 오늘

 

사내라는 말이 솟구친 자리에 서럽고 끝이 무딘
고드름은 매달렸을까

 

슬픔으로 빚은 품이며 바람 같다 활 같다
그러지않고는 이리 숨이 찰 수 있나
먼 기차소리라고 하기도 그렇고
비의 냄새라고 하기엔 더 그렇고
계집이란 말은 안팎이 잡히는데
그 무엇이 대신해줄 것 같지않은
사내라는 말은 서럽고도 차가워
도망가려 버둥거리는 정처를 붙드는 순간
내 손에 뜨거운 피가 밸 것 같다

 

처음엔 햇빛이 생겼으나 눈빛이 생겼을 것이고
가슴이 생겼으나 심정이 생겨났을 것이다
한 사내가 두 사내가 되고
열사내를 스물, 백, 천의 사내로 번지게 하고 불살랐던
바람의 습관들

 

되돌아보면 그 바람을 받아먹고
내 나무에 가지에 피를 돌게 하여
무심히 당신 앞을 수천년을 흘렀던 것이다
그 바람이 아직 아직 찬란히 끝나지 않은 것이다

 

 

 

봉인된 지도 / 이병률

 


지구와 달의 거리가 지금보다 훨씬 가까워
달이 커보였던 때
일년은 팔백일이었고 하루는 열한 시간이었을 때
덫을 놓아 잡은 짐승을 질질 끌고 가는 당신,
당신이 낸 길을 없애려 눈은 내려 덮이고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얼어붙은 날이 있었다
다시 얼음 녹으면서 세상은 잠시 슬퍼지고
그 익명의 밤은 다시 강처럼 얼고
언 밤 저편 사람들이 걱정스러운 듯 강가에 모여 불을 피우자
밤 이편의 사람들도 강 건너를 걱정하느라 불을 피웠다
그 어두운 밤 서로를 생각하고 생각하느라
당신은 그만 손가락을 잘랐다  


지구와 달의 자리가 가까워 달이 커보였던 때
일년은 오백일이었고 하루는 열여섯 시간이었을 때
당신은 나를 데리러 왔다
신(神)과의 약속 발설할 것 같지 않던 당신은
지금 그 시절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백스물 아흔 여든두 살 쭈글쭈글한 얼굴로 돌아가자 말했다
허나 내가 지켜야할 약속은
검고 고요한 저 소실점을 향해 가는 일

 

달과 지구의 자리가 멀어져 달이 작아 보일 때까지
일년은 삼백육십오일이고 하루는 스물네 시간일 때까지

 

 

 

/ 이병률


 

나에겐 쉰 넘은 형이 하나 있다
그가 사촌인지 육촌인지 혹은 그 이상인지 모른다

 

태백 어디쯤에서, 봉화 어디쯤에서 돌아갈 차비가 없다며
돈을 부치라고 하면 나에게 돌아오지도 않을 형에게
삼만 원도 부치고 오만 원도 부친다

 

돌아와서도 나에게 전화 한통 하지 않는 형에게
또 아주 먼 곳에서 돈이 떨어졌다며
자신을 데리러 와달라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이다, 나는

 

나는 그가 관계인지 높이인지 혹은 그 이상인지 잘 모른다

 

단지 그가 더 멀리 먼 곳으로 갔으면 하고 바랄 뿐
그래서 오만 원을 부치라 하면 부치고
십만 원을 부치라 하면 부치고
그의 갈라진 말소리에 대답하고 싶은 것이다

 

그가 어느 먼 바닷가에서 행려병자 되어 있다고
누군가 연락해왔을 땐 그의 낡은 지갑 속에
내 전화번호 적힌 오래된 종이가 있더라는 것
종이 뒤에는 내게서 받은 돈과 날짜들이
깨알같이 적혀 있더라는 것

 

어수룩하게 그를 데리러 가는 나는 도착하지도 않아
그에게 종아리이거나 두툼한 옷이거나
그도 아니면 겹이라도 됐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할 뿐
어디 더 더 먼 곳에서 자신을 데리러 와달라고 했으면 하고
자꾸 바라고 또 바랄 뿐

 

시집 <바람이 사생활> 2006년 창비

 

 


절연 / 이병률
  
 
어딘가를 향하는 내 눈을 믿지 마오
흘기는 눈이더라도 마음 아파 마오
나는 앞을 보지 못하므로 뒤를 볼 수도 없으니
당신도 전생엔 그러하였으므로
내 눈은 폭포만 보나니


믿고 의지하는 것이 소리이긴 하나
손끝으로 글자를 알기는 하나
점이어서 비참하다는 것
묶지 않은 채로 꿰맨 것이 마음이려니
잘못 얼어 밉게 녹는 것이 마음이리니
 

눈 감아도 보이고 눈을 감지 않아도 보이는 것은
한 번 보았기 때문
심장에 담았기 때문
눈에 서리가 내려도 시리지 않으며
송곳으로 찔러도 보이지 않는 것은
볼 걸 다 보아 눈을 어디다 묻었다는 것


지독히 전생을 사랑한 이들이
다음 생에 앞을 못 본다 믿으니
그렇게라도 영혼을 씻어야 다음 생은 괜찮아진다 믿나니
 

많이 오해함으로써 아름다우니


딱하다 안타깝다 마오
한 식경쯤이라도 눈을 뜨고 봐야 삶은 그저 진할 뿐
그저 나는 나대로 살 터 당신은 당신대로 잘 살기를
내 눈이 허락하는 반경 내에서 연緣은 단지 그뿐

 

- '현장 비평가가 뽑은 2007 올해의 좋은 시'  중에서-  

 

 

출처 : 시와 글벗
글쓴이 : yanggo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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