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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노을

다림영 2013. 6. 20.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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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 일이다. 산이 깊고 맑은 개울물이 흐르는 아늑한 동네가 있었다. 그곳에는 얼굴이 조그맣고 까만 소녀 영이와 인디언처럼 날렵하고 말수가 적은 철이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두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 일이 생겼다. 학교가 생긴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서울에서 눈이 크고 피부가 하얀 여자아이가 전학을 온 것이다.

 

들로 산으로 뛰어노는 것이 고작인 아이들에겐 정말 대단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예쁜 친구가 전학을 온 이후로 남자아이들은 저마다 멋진 신사처럼 보이려고 애를 썼다. 머리에 물을 묻혀 가지런히 하거나 윗옷을 바로잡아 바지에 넣는 등 아주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영이는 남자아이들이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해 가 되기도 했다. 그것은 영이가 좋아하는 철이 때문이었고 철이에게 만큼은 영이도 정말 예쁘게 보이고 싶었다. 남자아이들도 새로운 여자 친구에게 잘 보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여름 날 이었다. 전학 온 아이는 빨간 꽃이 달랑 매달려 있는 샌들을 신고 나타났다. 그렇게 예쁜 신발은 엄마를 따라나서던 장터에서도 본 기억이 없었다. 그날따라 샌들은 영이의 머릿속에서 지워지질 않으며 어른거렸다.

쉬는 시간이 되었다. 아이들은 새 친구를 빙 둘러싸고 그 아이의 모든 것에 집중하며 서로 먼저 친한 친구가 되기 위해 각별한 노력을 하고 있는 듯 보였다.

 

영이의 마음은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샌들 때문에 수업시간 내내 흔들렸던 것이다. 실행에 옮기기로 작정했다. 영이는 아이들이 몰려있는 뒤로 조용히 문을 밀고 나갔다.

 

반짝이는 샌들은 마치 영이에게 어서 오라 손짓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영이는 할미꽃처럼 등을 구부리고 가만히 발을 밀어 넣어 살금살금 운동장으로 나갔다. 넓은 운동장에서는 몇 번이나 신발을 내려다보다가 엎어질 뻔 했다. 꽃밭으로 굴밤나무 그늘로 팔랑거리며 뛰어다니며 좋아라했다. 깃털처럼 가볍고 꽃보다 더 예쁜 신이라니 더없는 동화 속 공주님의 신발인 것이었다.

 

쉬는 시간을 마치는 종소리가 크게 울렸다. 아차 하며 영이는 교실로 달려갔다. 문득 들어서는 복도에는 아이들이 우르르 나와 있었고 영이는 움찔 놀라 뒤로 물러섰다. 전학 온 아이는 냉큼 영이 앞으로 오더니 샌들을 낚아채며 높은 소리로 무어라 해댔고 친구들도 저마다 한마디씩 쏘아붙이는 것이다. 영이는 불현 듯 개미처럼 몸이 아주 작아지는 것 만 같았다. 세상이 갑자기 어두워지고 캄캄했다. 미안하다는 소리만 간신히 웅얼거릴 수 있었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너무도 부끄럽고 창피해서 고개를 들 수 없었지만 철이가 얼굴을 돌리며 교실로 들어가는 모습만 얼핏 눈에 들어왔다.

 

수업시간이 이어지는 동안 영이는 종일 물 한 모금 얻어먹지 못한 강아지처럼 축 쳐져 있었다. 선생님의 말씀은 벌처럼 웅웅거리며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유난히 길게 느껴졌던 수업시간이 끝이 났다. 종례를 마치고 간신히 가방을 챙겨 교문을 나서며 두리번 거려보았지만 철이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철이는 친구들에게 영이와 같이 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영이는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만 올려다보다가 집으로 가는 산길로 힘없이 향했고 돌멩이들을 마구 걷어차며 걸었다. 그러다가 그만 큰 돌부리에 발가락이 채이고 말았다. 눈물이 찔금 나올 정도로 아파 길바닥에 주저앉아버리고 신발을 벗어보니 엄지발가락에 피가 맺혀있었다. 갑자기 어떤 서러움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고 급기야는 소리 내어 엉엉 울고 말았다.

 

영이의 남루한 신발은 언니 오빠에게 물려받은 것이다. 한 번도 새 신발을 신어본 적이 없었고 신발을 사달라고 엄마에게 조른 적도 없었다. 한참을 울다가 영이는 불만스런 얼굴로 운동화를 냅다 멀리 던져버렸다. 그 아이가 전학 오기 전까지 신발에 대해서 어떤 마음도 없었다. 어쩌다 영이는 창피한 일을 겪게 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터덜터덜 산길을 혼자 걷는 내내 고개를 푹 숙이고 교실로 들어가던 철이 모습만 떠올랐다. 어느덧 냇가에 다다르게 되었다. 언제나 가위 바위 보를 하기도 하고 물놀이도 하며 건너던 철이와 영이였다. 한 번도 영이 혼자 그렇게 집으로 간 적은 없었다.

두 아이는 학교에서 제일 먼 곳에 살았고 일학년 때부터 매일 같이 다녔던 것이다.

 

혼자 가는 길은 왜 그리 멀게만 느껴지던지 징검다리가 거의 끝날 때쯤이었다. 조금은 헐겁던 신발이 그만 벗겨져 물살에 떠밀려가고 있었다. 영이는 신발을 잡으려 하지 않았다. 종이배처럼 가볍게 떠내려가는 신발을 정신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후다닥 갈대밭 사이로 사람이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리 나는 곳을 쳐다보았다. 갈대를 헤치고 달려 나온 철이가 물에 뛰어 들어 운동화를 건진 것이다.

 

물살을 거슬러 성큼 성큼 올라오는 철이를 영이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온통 물에 젖은 철이의 모습은 은빛 가루를 뿌려놓은 듯 반짝이고 있었다. 서운하여 맺혔던 마음도 안개처럼 어디론가로 스르르 사라져버렸다. 철이는 이마의 물기를 한 번 슬쩍 훔치며 영이에게 다가왔다. 한마디 말도 없이 신발의 물기를 탁탁 털어 건넸다. 영이는 눈물이 글썽하여 자기도 모르게 반짝이는 철이 이마에 입을 맞추고 말았다.

 

너무 놀란 철이는 뒤로 물러서다 그만 물속으로 풍덩 빠져버렸고 어쩔 줄 몰랐지만 영이는 까르르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철이는 벌떡 일어나 영이에게 마구 물장구를 쳤고 영이도 함께 물장구를 치며 학교에서 있었던 일은 까맣게 잊고 말았다. 저녁노을이 온 하늘을 그림처럼 물을 들이고 있을때까지 두 아이의 웃음소리는 냇물을 타고 이산에서 저산으로 손을 잡고 건너다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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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6학년 때였습니다. 부잣집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애는 매일 구두를 신고 다녔습니다. 아마도 구두를 신은 아이가 그때 전 학년<세 반>을 털어 두 명 정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중의 한 친구가 우리 반이 되었고 저는 날마다 그 신발을 한 번 신어보고 싶었습니다. 친구와 그다지 친하지 못했고 성격도 좋은 편은 아니어서 한 번도 한번 신어보면 안될까하는 말을 꺼내보지 못했습니다.

 

제게는 자그마치 남동생만 넷이 있었고 밥도 간신히 먹고 살던 시절이었고 저는 살림밑천 큰 딸 이였습니다. 예쁜 신발은 꿈을 꿀 수도 없었고 색깔 선택은 두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맏이인 관계로 새것이라도 신을 수 있는 특권은 있었으므로 엄마가 사 주시는 대로 검은색이나 짙은 청색 운동화만 신어야 했습니다. 동생들이 물려 신어야 했으므로...

 

매일 눈으로만 훔쳐보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친구의 구두가 너무 신고 싶어서 노는 시간에 그 아이가 나가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말도 하지 않고 한 번 신고 나갔던 것입니다. 그러다 신발 주인에게 들켰는데 얼마나 창피를 당했는지 지금도 생각하면 어깨가 서늘하고 으르렁 대던 친구의 큰 눈이 잊혀 지지 않습니다. 좁고 긴 마루로 된 복도.... 아이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기억에는 없습니다. 너무나 창피해서 세상이 캄캄하던 그 기억과 끈이 달려 더욱 빛나던 친구의 구두가 내 마음 어느 모퉁이에 남아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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