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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즉명, 불평이 있어야 운다

다림영 2013. 4. 29.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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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삼긴 사람 시름도 하도할샤

닐러 못다 닐러 불러나 푸돗던가

진실로 풀릴 것이면 나도 불러 보리라

 

상촌象村신흠 申欽(1566~1628)의 시조이다. 시는 왜 쓰는가? 말로는 풀리지 않을 시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시름도 노래 앞에서는 눈 녹듯 사라진다.

 

무릇 물건은 화평함을 얻지 못하면 운다. 초목은 소리가 없으나 바람이 흔들면 운다. 물은 소리가 없지만 바람이 움직이면 운다. 솟구치는 것은 부딪치기 때문이요, 달리는 것은 막는 까닭이며, 끓는 것은 불로 덥히기 때문이다. 금석은 소리가 없으나 이를 치면 소리가 난다.

 

사람의 말 또한 그러하다. 어쩔 수 없는 것은 있은 뒤에야 말하게 되니, 노래에 생각이 담기고 울음에는 품은 뜻이 있다. 무릇 입에서 나와 소리가 되는 것은 모두 불평함이 있기 때문이다.

 

한유가<송맹동야서 送孟東野序>에서 한 말이다. 사물이 우는 것은 부득이한 데서 말미암은 불평이 있기 때문이다. 불평은 마음이 평정을 잃은 상태, 달리 말해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상실한 상태다. 한유는 <형담창화시서荊譚唱和詩序 >에서 이렇게 말한다.

 

화평한 소리는 담박하고, 근심이 담긴 소리는 아름답다. 떠들썩 즐거운 말은 공교하기 어렵고, 곤궁한 말은 쉬이 좋다. 이런 까닥에 문장을 짓는 것은 늘 길 위의 나그네나 초야에 묻혀 사는 인사에게 있었다. 왕공이나 귀한 신분의 사람에 이르러서는 기운이 가득 차고 득의 한지라, 타고난 성품이 원래 이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여기에 힘쓸 겨를이 없다.

 

 

문학은 득의가 아닌 실의에서 나온다. 아무 아쉬울 것 없는 왕공 귀인들은 문학에 목숨 거는 일은 거의 없다. 그들에게 문학은 치장이나 나머지 일에 지나지 않는다. 낙척한 떠돌이와 불우한 재야의 문인에게 문학은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수단이다. 이인로가 말했다.

 

 

천지는 만물이 다 좋게만 하는 법이 없다. 뿔 있는 놈은 이빨이 없고, 날개가 있으면 다리가 두 개뿐이다. 이름난 꽃은 열매가 없고, 채색 구름은 쉬 흩어진다. 사람에 이르러서도 그러하다. 기특한 재주와 화려한 기예가 뛰어나면 공명이 떠나가서 함께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치가 그러하다.

 

 

문장도 훌륭하고 공명도 함께 누리는 이치는 없다. 뿔을 가지려면 이빨을 포기하든지, 꽃이 아름답거든 열매의 내실을 기대할 수 없다. 날개를 단 채로 다리도 네 개이기를 바라거나, 채색 구름의 영롱한 자채가 길이 변치 않기를 바랄 수는 없다.

 

라이오넬 트릴링Lionel Trilling현대의 문화인은 정치적으로는 부와 쾌락을 원하면서 예술적.실존적으로는 내핍과 괴로움을 원하는 모순적 상태에 있다.”고 말한다. 쾌락을 거부하고 프로이트식으로 말해 반 쾌락에서 만족을 찾는 본능적 충동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충동은 시대를 떠나 늘 존재해왔다. 모든 것이 갖춰진 넉넉한 환경에서 문학은 설 자리를 잃는다. 욕망이 좌절되고 꿈이 상처 입을 때 비로소 사람의 마음속에 이른바 정서란 것이 생겨난다. 그것이 슬픔과 분노, 격정과 눈물이 되어 터져 나온 것이 바로 시이다.

 

한시미학산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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