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중에서
‘나는 어느 봄날 오후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나는 떠나려고 일어섰고, 그는 나를 내 낡은 화물차까지 배웅했다. 내가 차에 오르려는데, 그는 고개를 돌려서 천천히 주변의 시골 풍경을 훑어보고 있었다. 그가 손수 지은 그의 집이 서있는 그 언덕에서 보면, 아주 멀리까지 경치를 볼 수 있었다.
구릉지로 된 그곳 풍경은 이제 새해의 신선함으로 푸른빛을 띠고 있었고, 붉은 버드나무들은 막 꽃 피우기를 끝내고 있었으며, 층층나무는 꽃을 피우기 시작하고 있었다.
조용히, 그의 습관화된 어조와 태도로, 그는 겸허하게, 또 자연스럽게 “정말 아름다워요”라고 말했다. 살롱의 비교적인 담론의 세계로부터 너무나 먼 세계에서, 내가 본 것은 그의 심미적 감수성이 ’일상적‘지각에서 우러나왔고, 그 일상적 지각을 반영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터놓고, 솔직하게, 아무런 꾸밈없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진실한 울림을 가진 것은 그가 그 자신과 그의 가족이 속한 삶터에서 토박이로서 말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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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나는 좀더 나아가, 이런 종류의 행동들-끊임없는 나눔과 베풂-이야말로 그들이 그들의 삶터에서 삶을 유지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본질적 요소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거기 살고 있는 대부분의 가족들은 일종의 생존유지 수준의 자급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서로 돕지 않고는, 공식경제 바깥에서의 나눔과 베품 없이는 살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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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조물들이라고 하는 것은, 내 가족, 친구, 이웃과 같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가축과 야생생물, 그리고 흙속에서 자라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이엇다. 이 모든 것들을 통해서 나는 나 자신을 넘어, 커다란 기쁨과 평화- 외경에 찬 감사의 평화-를 맛보곤 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불완전하 절름발이 존재이다. 이러한 경험의 성격은 내가 얼마나 순수한 일념과 너그러움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될 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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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건드리지 않는다면, 시골 공간은 언제나 아름답고, 언제나 찬탄할 만하다. 땅을 깊이 사랑하고, 땅에 뿌리박은 사람들이 시골에서 살고 있는 동안에도, 그 공간은 여전히 찬란한 빛을 내며 빛난다. 그러나, 사랑의 감정이 사라질 때,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황폐함이 지배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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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내가 깨달은 것은 소규모 자급농을 통해서 우리는 ‘땅의 기운(genius loci)’에 눈뜨게 된다는 사실이다. 모든 인간의 삶터에는 그 땅을 보호하는 영적 기운이 있다. 우리가 한 장소의 독특한 힘과 아름다움을 체험하기 위해서 티베트나 혹은 다른 이른바 이국적인 지방으로 여행할 필요는 없다. 시인들은 진리를 말해왔다.- 한 장소 를 안다는 것은 그 땅의 영기에 사로잡혀,거기에서 두려움과 공경심, 겸손과 감사의 마음으로 산다는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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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들의 농장이 드러내는 우아한 아름다움은 바로 그들 자신의 삶, 힘든 일과 가족과 마을교회에 바쳐진 삶의 기막힌 아름다움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의 내면적인 성실성은 늘 그들의 얼굴을 통해서 빛나게 드러나 있었다. 그들의 눈길은 우정어린 너그러움으로 사람들을 감사고 있었고, 그들의 얼굴은 따뜻한 온기로 빛났고, 그들의 입은 내가 그들을 만날 때마다 자동적으로,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흔히 보는 저 슬픔에 잠긴, 쓰디쓴 형상의 입으로 굳어져 있지 않은 노인들을 본다는 것은 매우 유쾌한 일이었다. 내 이웃인 이 노인들의 삶의 어려움은 오히려 그들의 얼굴을 깊은 쾌활함으로 빛나는 것이 되게 만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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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이 조그마한 마을의 삶에 너무도 깊숙이, 그리고 기쁨으로 젖어 있었기 때문에 한 장소에 뿌리박고 사는 사람들의 덧없고 소박한, 끊임없는 일로 채워졌으되 찬양할 만한 삶에 관해 웅변적으로, 솔직하게 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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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플라톤이 말한 것과 같다.“아름다운 시는 인간적이지도 않고, 인간이 만든 작품도 아니다. 시는 신성한 것이며, 신이 만든 작품이다...시인들은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신들의 해석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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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순전히 자신의 감각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의 장소 안에 서서, 흙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기를 시도할 수 있다. 우리는 시인들의 비젼을 공유하면서, 매일매일 자신의 직관을 예리하게 만들 수 있다. 자기탐닉의 습관을 극복하여, 우리는 좀더 소박하고 우아한 삶의 기쁨과 우정을 알 수 있는 가능성을 열 수 있다.
그러나 , 감각적 경험이 시간과 장소와 사람에 따라 다르듯이, 흙과 시의 성격도 다르나. 여기에 각자가 해결해야 할 과제가 생긴다. 즉, 우리 자신의 감각에 되돌아오기 위해서 서로서로 도우면서, 상대방에게 귀를 기울이며, 각자의 흙을 발견하고, 각자의 감수성에 반향()하는 시적 이미지의 힘을 발견하고 그것을 즐겨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여행에 나선다는 것은 하나의 새로운 시작-진정한 애국심의 가능성, 타자 및 나라에 대한 충성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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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자신을 위하여 지상에 보물을 쌓아놓지 마라. 거기서는 좀과 녹이 보물을 갉아먹고, 도둑들이 침입하여 훔쳐 가느니라. 그러니 너희 자신을 위하여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라.(마태복음 6:19-20)
백합꽃이 어떻게 자라는지 생각해보라. 그것들은 수고도 하지 않고, 실을 잣지도 않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모든 영광을 누린 솔로몬조차도 이 꽃 하나보다 못한 차림으로 지냈느니라. 오늘 여기 있다가 내일이면 아궁이의 불 속으로 던져질 들풀도 하느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늘 하물며 너희를 얼마나 잘 입히겠느냐. 오, 믿음이 적은 자들아!(누가복음 12: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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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구식의 아름다운 요리용 스토브를 가지고 음식을 해먹었고, 여기에도 장작이 필요했다. 그래서 통나무를 베어 쪼개어야 했다. 나는 일인용 톱과 가로켜기 2인용 톱, 두 개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2인용 톱을 가지고 톱질을 해볼 것을 제안했다. 그들은 반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매일 점심을 먹은 다음 우리는 두세 개의 통나무를 톱으로 썰었다. 그들의 자신들이 이용당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그들이 하는 일이 꼭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닫고 있었다. 나중에 그들은 자신의 노동의 열매를 곧바로 즐기면서, 달아오른 난롯불 앞에 앉아있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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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시골에 살고 있는 동안 나는 그들이 “뭐 재미있는 거 없어? 심심해 죽겠어” 따위의 불평을 하는 것을 한번도 들은 기억이 없다.
존홀트는 믿었다. 아이들의 권리에 관한 그의 제안은,
어떠한 나라이든 명민하고, 정직하고, 친절하며, 인간적인 곳이면 잘 실현될 수 있을 것인데, 그런 나라에서 대체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할 필요도, 그럴 욕구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제일 최고’가 되는 데 마음을 쓰는 일도 없고, 심한 빈곤과 소외감, 실패에 대한 끊임없는 두려움 속에서 살지도 않으며, 서로서로 착취하거나 잡아먹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권리는 내가 자란 읍과 같은 곳에서, 그리고 자신들의 상속받은 지혜에 따라 행동할 만큼 충분한 통찰력과 용기를 가진 어떤 종류의 구식의 부모 밑에서만 행사될 수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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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의 일자리를 떠날 때, 나는 내가 좋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모든 근대적 기관들-교육, 건강, 고용, 문화적 기관-을 거부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제 나는 내 부모님의 농민적 ‘편협성’이 보다 용기 있고, 보다 대담한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때 그들을 둘러싼 세계에서 중산계급의 ‘아동기’라는 관행을 의심하는 어떤 목소리도 없엇다. 나는 배우는 것이 느린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내 부모님이 그들 자신의 지혜로써 자신들의 삶을 좋은 삶으로 만들고, 그들의 아이들에게 매일매일의 덕행의 본보기를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의 아이들을 ‘아동기’라는 수렁으로 빨아들이는 시대적 흐름에 조용히, 그리고 용감하게 저항할 수 있었다는 것을 마침내 깨닫게 되었다.
역자 후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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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 자신의 인생행로의 어떤 지점에서도 단지 스쳐 지나가는 관광객이 아니라 이 지상에서 진정으로 ‘좋은 삶’을 실행할 수 있는 가능성의 근거를 찾아서 끊임없이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순례자로 남으려고 노력한다. 오늘날 자본과 국가의 압도적인 논리에 갇혀 있는 근대적 세계는 개인으로 하여금 참된 의미에서의 ‘좋은삶’, 다시 말하여 ‘덕행의 습관적인 실천’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하는 체제이다. 지금 우리는 개인주의 문화 속에서 누구나 ‘자기몰두’에 빠져 있을 뿐만 아니라, 거의 예외 없이 ‘경제인간’으로 전락하여, 기껏해야 소비자 혹은 관광객으로서의 삶이라는 극히 천박한 행복을 추구하는 데 여념이 없다.
호이나키는 우리 시대가 참으로 ‘기묘한’시대라고 말한다. 엄청난 생산력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빈곤과 전쟁에서 헤어날 방법을 찾지 못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진보’의 프로젝트들에 의해서 안락과 편의성이 증대하면 할수록 인간은 제도와 기술과 전문가의 노예가 되고 마는 역설적인 상황이 나날이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을 진실로 인간답게 하는 근본적인 조건, 다시 말하여 자유로운 의지에서 나온 자기희생의 정신과 타자에의 능동적인 환대와 같은 오랜 세월 인류사회를 지탱해온 전통적인 덕행은 극히 낯선 것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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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귀농에 대한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되었다.
마음 다치는 일이 허다해서 사람들이 많지 않은 곳으로 떠나고 싶은 것이다. 그저 일찍 일어나 열심히 땀 흘리며 일해 입을 풀칠을 하게 되면 안 될 것 없지 하는 생각이 부쩍 드는 것이다. 그러나 책임져야 할 앞날이 창창한 아이들이 셋이나 있으니 내 몸과 마음이 내 것이 아니니 그때는 언제가 될지 아득하기만 하고 때가 너무 늦게 온다면 소용없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소박한 삶에 대한 꿈은 한쪽에 묶어두고 세파에 휘둘리며 오늘도 견디어낸다.
어느 날 나의 이런 생각을 듣던 어린 시절부터 젊을 때까지 부모의 농사 일손을 돕던 친구가 코웃음을 치며 농사를 우습게 생각하면 안 될 것이라며 어림도 없는 일이라는 얘길 전한다. 누가 쉽게 생각한다 했는가 다만 도시의 사람들 속에서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는데 말이다.
지은이는 대학교수였다. 불현 듯 다 접고 귀향하여 흙과의 삶으로 인생을 바꾸었고 소박하고 지극히 자연적인 삶을 일구는 깨달음을 얻으며 귀한 행복을 얻었다. 용기가 없으면 절대 이룰 수 없는 아름다운 삶이 귀농이다. 꾸준한 계획으로 공부하며 노력을 기울여야 얻을 수 있는 것임을 안다. 막연한 동경만으로 흙과의 동침은 어림 반 푼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불편하고 무수한 땀을 흘려야 하는 삶을 해 낼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자꾸만 드는 것은 어인일인지 모르겠다. 그저 어디서 밭 한 뙈기 얻어 나물 캐며 호미질하며 오랜 옛날처럼 어느 산속 깊은 곳에서 욕심 없이 그날그날 그렇게 살아가고 싶기만 하다.
친구 말처럼 그 속에서 살다보면 지쳐 도시로 돌아가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그러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가끔 이렇게 흙을 밟으며 불편한 삶에서 행복을 얻는 이들의 삶을 엿보며 나도 충분히 해 낼 수 있을리란 생각에 젖는다.
그러나 아직 나는 아이들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청년실업자가 너무 많은 이 시대, 아이들은 과연 홀로서기를 잘 할 수 있을지 정말 염려스럽기만 하다. 이러한 때 나는 내 생각만으로 일을 감행한다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그저 막연한 꿈으로 가슴에 간직하며 오늘도 어떤 깨달음으로 환한 내가 되기 위해 마음공부에 매진을 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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