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전문/염정임
거리에 나가 보면 모든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가기 위해 걸어도 될 거리를 자동차를 타고 가고, 계단을 두고도 에스컬레이터를 사용한다.
무엇을 위하여 그렇게 바쁘게 서두르는지......
나는 워낙 상황에 대한 판단이 느리고 운동 신경이 둔하다 보니 빠르게 움직이는 기계 종류는 모두 경계하는 대상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현대여성의 필수 조건이라고 하는 운전 면허를 몇 년 전에 따놓고도 아직 운전할 엄두를 못내고 있다. 내 손으로 자동차를 움직여서 줄지어 달리는 기계의 대열에 끼일 것을 생각하면 진땀이 절로 나기 때문이다.
또한 백화점에 설치되어 있는 에스컬레이터를 탈 때에도 언제나 조심스럽고 두려운 마음이다. 마음속으로 ‘하나, 둘, 셋’을 세면서 발 놓을 자리를 눈여겨보았다가 단숨에 발을 딛고 올라서면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그 톱니바퀴 같은 계단들 틈새로 발이 빠져들지 않은 행운을 무한히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다가 양손에 쇼핑백이라도 들고 하행 에스컬레이터를 탈 때에는 정말 난감하다. 잘못 발을 내딛다가는 당장 아래로 곤두박질쳐 버릴 것만 갈아 온몸의 신경이 발끝에만 가 있게 된다. 다이빙대 끝에 선 수영 선수의 심정이 이러할까? 아랫배에 힘을 단단히 주고 오른발 왼발을 차례대로 재빠르게 계단으로 내려디디고 나면 일단은 성공한 셈이라 마음을 놓는다. 중심을 못 잡아 몸이 잠깐 기우뚱해도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나를 곤란하게 하는 것은 요즈음 대부분의 빌딩 입구에 설치된 회전 유리문 앞에서이다. 옆에 보통 출입문을 두고도 왜 굳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회전문이 있어야 하는지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혹시, 드나드는 어린아이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라면 수긍이 가겠지만.....
어쩌다가 큰 건물에 들어갈 때, 나는 회전문 앞에서 항상 긴장을 느낀다. 마친 어릴 때 친구들과 줄넘기 놀이를 하면서 그 회전하는 반원 속에 뛰어들 때처럼. 어린 시절 그 정확한 투신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망설임과 결단을 반복했던가. 때로는 비장한 각오 끝에 두 눈을 꼭 감은 채 뛰어 들곤 하지 않았던가?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호흡을 잘 가다듬고 단숨에 들어서야 한다. 거건 상당한 민첩을 요구했다.
회전문 앞에서도 그건 마찬가지이다. 나의 몸을 용납하는 공간이 미처 내 앞에 오기 전에 미리 그 곳을 향하여 전진해야 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회전문에 일단 들어서면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문의 속도에 발걸음을 맞추게 되어 있다. 직립인간으로서 두 팔을 흔들며 유유히 걷는 자유를 잠시 동안이나마 유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마치 무성영화 시대의 찰리 채플린처럼, 또는 기모노를 입은 일본 여성처럼 발걸음을 짧게 놓아야 무사히 회전문을 빠져나올 수 있다. 따라서 군자다운 체면과 요조숙녀로서의 품위를 지키기에 회전문은 합당치가 않은 것이다.
가령 어느 빌딩 입구에서 수십년 만에 옛날 애인들이 우연히 마주쳤다고 하자. 그러나 회전문 안에서는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하고 반대방향으로 돌면서 헤어져야 한다. 극적인 해후가 이루어질 수도 있는 순간에, 유리문으로 쓸쓸한 일별만 나누면서....
그러나 회전문을 통과할 때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도망치는 범인과 뒤쫓는 형사가 돌고 도는 장면보다 더 실감나는 때는 없을 것이다. 그것이 코미디 영화이건 007 첩보물이건....
아무래도 회전문이 자리해야 할 곳은 고층 건물의 입구가 아니라 연극이나 쇼의 무대 위가 아닌가 싶다. 회전문이야말로 마술사의 소도구로 쓰임직하지 않은가! 들어갈 때에는 젊은 아가씨가 들어가서 나올때에는 허리 굽은 할머니가 되어 나온다든지, 호랑이가 들어가서 나올 때에는 고양이가 되어 있다든지 말이다.
때로는 나 같은 사람으로 인해 회전문 앞에 사람들이 밀리기도 하는데, 여러사람에게 서로 양보하고 나중에 들어가겠다고 사양하는 것은 미덕이 못된다. 마음의 준비가 된 사람부터 한사람이라도 먼저 회전문을 통과하는 게 현명한 일이다. 장유유서의 아름다운 질서를 잠깐 잊어야만 하는 것도 회전문 앞에서이다.
살아가면서 나에게 부딪쳐 오는 일들 앞에서도 회전문 앞에서처럼 망설이고 뒤로 미룰 때가 많다. ‘이번에는 꼭’ 하면서도 유리문이 몇 개나 빙빙 돌며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정작 들어서고 보면 벌써 몇 바퀴 돌고난 뒤가 된다. ‘아차’ 했을 때에는 항상 한 발이 늦어 있음을 발견한다.
모든 일이 너무 정신없이 빨리 돌아간다.
때로는 살아간다는 것이, 정지하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이 빙글빙글 도는 유리문 안에서처럼 현기증과 당혹감을 줄 때도 많다. 그러다가 언젠가는 회전문에 떼밀리듯이 이 세상에서 밀려나 버릴 때가 오지 않겠는가?
자동차를 타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그렇게 바쁘게 서두르지 않아도 그때는 어김없이 찾아오리라.
회전문 앞에 설 때, 나는 이 세상에서 내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에 대한 불확실성을 첨예하게 느끼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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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버나드 쇼의 묘비명처럼, 지은이의 회전문 속에서 아차 하다가 다시 한 바퀴를 돌고 또 타임을 맞추지 못하여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것, 나 또한 그러하진 않는지 살펴야 하겠다.
추석 밑이다. 따뜻한 인사 두 어 줄이라도 어쩌다 소원해진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보내야 하겠다. 먼저 묻는 인사가 없더라도 뒤늦게 후회하지 않도록 때가 되면 그래도 인사 몇 마디 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하겠다.
삭막하기 이를 데 없는 날들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꼭 한가위만 같기를 희망하던 옛 사람들의 말씀 따라 소박하고 정겨운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겠다.
좋은 일은 없어도 그렇게 나쁜 일은 없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일까. 좋은 것이 좋은 것, 이참에 마음 활짝 열고 여기 저기 인사를 전해야 하겠다. 우물쭈물 하다가 다 잃지 않으려면, 빨리 돌아가는 회전문 앞에서 어쩌지 못하고 시간만 보내지 않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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