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바람소리
여름의 지열地熱을 식히기 위해 그랬음인지 가을비답지 않게 구질구질 내렸다. 날이 들자 숲에서는 연일 마른 바람소리. 귀에 들리기보다 옆구리께로 스쳐가는 허허로운 바람소리. 그토록 청청하던 나무들이 요며칠 사이에 수척해졌다. 나무들은 내려다볼 것이다. 허공에 팔던 시선으로 엷어진 제 그림자를.
들녘에서는 누우런 이삭들이 고개를 숙이고 과원果園의 가지들은 열매의 무게로 인하여 휘어져 있다. 허공을 나는 새의 그림자들이 분주히 오고 간다. 어쩔 수 없이 또 가을. 열매를 거두는 시절이 다가서고 있다.
가을은 중추명절 한가위를 고비로 갑자기 여문다. 물가고와는 인연이 멀었던 우리 조상들은 이날 “더도 덜도 말고 항상 오늘같이만....”이라고 조촐한 소망을 빌었다.
조그마한 것을 가지고도 감사히 여기고 넉넉한 줄 알던 선인先人 들의 그 마음은 가을날 창호에 번지는 햇살처럼 그지없이 아늑하고 향기로운 맑은 복이었다. 자기 분수를 알아 땀 흘려 일하던 가슴만이 누릴 수 있는, 거두는 기쁨이었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에겐 물량의 풍요와는 달리 늘 모자라기만 하다. 놀부처럼 긁어들여도 차지 않고 마시고 마셔도 갈증을 못면하고 있다. 부리지 않고 거두려는 탐욕이 아니라면 그만큼 마음이 엷어진 탓이리라.
우리 다래헌의 추석은 동화책으로 지낸다. 출가 사문出家 沙門 에게는 명절이 따로 없기 때문이다. 마른 바람소리가 들려오면 불쑥 책가게를 찾아간다. 예쁜 장정과 잉크 내음이 싱싱한 동화책을 한아름 안고 돌아올 때는 날개라도 돋칠 듯 마냥 부풀어오른다.
세상에서 치면 대목장 같은 것을 보아온 셈이다. 머리맡에 쌓아두고 잡히는 대로 뒹굴면서 읽는다. 꿈이 담긴 동화책은 누워서 읽어야지 앉아서 읽으면 환상의 날개가 접히고 만다.
이렇게 한동안 읽고 나면 메마른 나의 가지에도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것 같다. 흐려진 눈망울이 맑아지고 갈라진 목소리가 트이는 것 같다. 그리고 남을 서운하게 하지 않고 착하디착한 일만 하고 싶다. 이웃의 슬픔을 함께 나누고 싶다.
명절날 차를 타지 못해 타박타박 걸어가는 사람들 곁에서 길동무가 되어주고 싶고, 혼자서 엎드려 쓸쓸히 성묘하는 사람 곁에 함께 꿇어앉아주고 싶다.
가을은 누구나 자기 그림자를 내려다보며 자신의 무게를 헤아리는 계절, 낙엽이 지는 날 저무는 귀로에서 한번쯤은 오던 길을 되돌아보며 착해지고 싶은, 더도 덜도 말고 오늘같이만이라도 빌고 싶은 그러한 계절이다.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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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쯤 주변의 모든 것들을 아름답고 평화롭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될까? 추석이 다가오니 마음이 분분하다.
나의 가게에는 노인손님들이 자주 볼 수 있다. 그들을 보며 참 많은 것을 느끼곤 한다. 나이가 하얗게 들면 마음은 바다처럼 넓고 깊은 아량이 있을 듯 한데 젊은 사람보다 더한 아집과 오만 이런 것들이 만만치 않은 것이다. 삶이 워낙 강팍해 지다보니 그럴 수도 있겠으나 나이가 들면 막연하게 삶을 초월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은 아닌가 했는데 그것은 나이와 상관없는 사람의 문제인 듯하다.
내겐 좋은 친구 한 사람이 있다. 그녀는 넉넉한 삶을 영위하고 있으나 삶의 목표는 재산을 정리하고 아이들 홀로 설 때가 되면 선교활동을 하는 것이다. 지금도 그때를 위해 매일성경책을 가까이 하며 공부를 하고 있다. 좋은 삶을 꿈꾸는 그녀를 삼년인가 사년 만에 보았다. 사뭇 얼굴이 좋아져 얘길 전하니 아마도 예전 같은 마음이 아니어서 일 것이라고 했다. 성경책을 가까이하고 봉사활동에 마음을 담고 욕심을 부리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녀의 선한 얼굴이 나를 돌아보게 한다. 가진 것 없어도 큰 욕심을 멀리하며 조용히 내 길을 걷다보면 나도 그녀처럼 선한 모습으로 늙어갈 수 있을 것이다.
추석이 내일모레다. 형제들 사는 모양이 심상치 않다. 나이가 들수록 이상하게 변하고 있다. 나 또한 좋은 것 하나도 없지만 따뜻한 마음 환한 얼굴로 그들을 맞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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