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만권을 읽으면..

(19세기 조선 지식인의) 생각창고 .홍길주/정민 외 옮김

다림영 2012. 9. 7.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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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주洪吉周(1786~1841)

본관은 풍산豊山 , 자는 헌중憲仲 , 호는 항해沆瀣 이다. 19세기 전반에 활동한 문인으로, 형 연천 홍석주洪奭周 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현수갑고>峴首甲藁,<표롱을첨>.. 乙籤 ,<항해병함>沆瀣丙函 , <숙수념>孰遂念 , <서림일위>書林日緯 등의 저작을 마겼다. 의미의 연쇄적 확산과 연역적 사유를 보여주는 수여방필’ 4부작의 비망록을 비롯한 그의 저자들은 독특하고도 개성적인 시각으로 19세기 지식인의 사유 특성과 문화사의 전망을 열어 보여준다.

 

 

일반적인 병통

다른 사람의 관직과 재물, 그릇이나 의복은 온통 부러워하면서 자기가 지닌 것은 늘상 부족하다고 여기는 것은 보통 사람들의 일반적인 병통이다. 행실이나 문장에 이르러서는 어찌 유독 남이 지닌 것은 우습게보면서 자기가 없는 것은 뽐낸단 말인가? 진실로 이 두 가지 일을 맞바꿀 수만 있다면 어지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하겠는가?

 

천지만물이 책 아닌 것이 없다

나는 배움이 넓지 못한데다 나이 들며 점점 게을러져서 평소에 책을 마주하지 않기도 한다. 하지만 아침저녁으로 눈과 귀로 접하는 해와 달, 바람과 구름, 새와 짐승의 변화하는 모습에서 방 안에 늘어놓은 책상이나 손님과 하인들이 주고받는 자질구레한 말들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책 아닌 것이 없었다. 가슴속에는 언제나 <시경><서경>,<논어>와 같은 책 몇 부가 뒤섞여 맴돌고 있다. 그러나 오히려 읽는 데 게을러 날마다 시들어 줄어만 간다. 젊은 후진들이 나를 핑계대고 읽는 데 소홀해서는 안 될 것이다.

 

 

부싯돌과 같은 궁달

한번은 부싯돌을 쳐서 불을 얻고는 농담삼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했다.“사람의 궁하고 달함, 얻고 잃음이 이 부싯돌과 같다. 부싯돌을 치는 데 능숙한 자는 한번만 치고도 불을 얻는다<세속에서는 일방화철’- 方火鐵 이라 일컫는다.>부싯돌을 잘 치지 못하는 자는 하루 종일 해도 불을 얻지 못한다. 보통 사람은 서너 번 치면 얻고, 혹 대여섯 번이나 십여번 치면 얻는다. 부싯돌과 종이가 다 좋으면 불을 얻기가 쉽고, 좋지 않은 것을 만나면 결과를 얻는 것이 더디다.”

 

사람의 운명이 길하고 형세가 이로운 것은 마치 솜씨 능한 사람이 좋은 도구를 만난 것과 같아, 한두 번만 하고도 이름을 이룬다. 운명과 시세가 고만고만한 자는 여러 번 나븐 일을 겪은 뒤에야 겨우 그 성취를 얻는다. 그 곤궁함이 심하고 기구한 자는 마침내 성취함이 없다. 보통 사람에 대해 논한다면, 서너 번 또는 대여섯 번, 혹은 십여 번을 치고도 불을 얻지 못하는 것은 부싯돌을 잘 치지 못해서가 아니다. 몇 번을 쳐서 얻기에 이른 자도 잘 쳐서가 아니라 모두 어쩌다가 그렇게 된 것일 뿐이다. 운명이 고만고만한 자들이 여러 번 일이 안풀리다가 우연히 이루게 되는 것 또한 이와 같다.

 

<좌전>에 말하기를 비유컨대 농부가 씨 부리고 김매면 기근이 들기도 하지만 반드시 풍년이 들 때도 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발붙일 땅 외에는 모두 쓸모없는 땅이라 해도 쓸모없다 해서 이를 없앨 수는 없. 당고唐皐 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때와 맞지 않을수록 더더욱 운명에 충실해야 하니, 나 같은 사람은 어떠한가.” 무릇 몸을 닦고 도를 구하며 일을 처리하고 명예를 구하는 것은 이와 같지 않음이 없다. 몇 번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 해서 곧바로 게으른 마음을 일으키는 자는 모두 조급한 사람이다. ..

 

 

이루지 못해도 도움이 되는일

노자는 말했다. “서른 개의 바퀴살이 한 개의 바퀴통을 공유한다. 그 가운데가 비었으므로 수레가 쓸모있게 된다.” 사람이 일을 도모하여 이루지 못하거나 벼슬을 구하다가 여의치 않은 것은 , 오랜 뒤에 돌이켜 생각해보면 종종 도움이 되는 부분이 적지 않다. 어떤 일은 비록 이루지 못해도 이로 인해 다른 일에 보탬이 생기고, 어떤 시험은 결과가 좋지 않아도 학예가 더욱 진보하고 이름이 더욱 드러나게 된다. 요컨대 모두 헛되이 심력을 수고롭게 한 것만은 아니다.

 

 

처음을 삼가야 한다

처음에 무겁게 보이면 평범하게 행동해도 사람들은 무겁게 본다. 처음에 모욕을 당하면 살펴줄 만한 일도 사람들은 모욕한다. 처음에 사랑을 받으면 잘못된 일을 해도 살마들은 사랑하고 처음에 미움을 받으면 예쁜 짓을 해도 사람들은 미워한다. 그럴진대 사람이 그 처음을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뜻대로 되는 이치는 없다

세속에서는 손 가는 대로 돈을 꺼냈는데 써야 할 숫자와 꼭 맞게 되면 재물운이 좋지 않다고 말한다. 이것이 비록 꼭 그런 것은 아닐 것이나, 큰 요점은 사람이 크고 작은 일에 뜻대로 되는 이치는 없다는 것이다. 작은 일이 자주 뜻대로 되면 큰일에 반드시 어그러지는 곳이 있게 마련이다. 무릇 자질구레한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해도 절대로 걱정을 해서는 안 된다...

 

 

나한테만 좋은 이치란 없다

하늘은 억조창생을 균등하게 덮어 가려주니, 반드시 내게만 후하게 해줄 리가 없다. 다른 사람에게 모두 궁함과 통함이 있다면 어찌 유독 나만 항상 형통하기를 바라겠는가? 다른 사람은 모두 굽힘도 있고 펴짐도 있는데 어찌 유독 나만 언제나 펴지기를 바란단 말인가? 이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한 가지 사소한 논의에서도 반드시 남을 이기려 들고, 한가지 자질구레한 일에서도 반드시 남에게 기림을 얻으려 한다. 가령 이기거나 칭찬을 들어도 실로 터럭만큼의 보탬이 없는데도 여기에서 펴면, 반드시 진짜 큰 이해가 걸려 있는 곳에서 굽히게 된다. 어찌 작은 일에서 지고 작은 곳에서 칭찬을 얻지 못하면서 큰 데서 폄을 구하는 것만 같겠는가?

 

 

이기려는 마음이 지나치게 과도하고 다투려는 기운이 너무 높은 자에게는, 남들이 모두 그 거칢을 두려워하고 그 번잡스러움을 괴롭게 여겨 그와 더불어 굳이 따지려 들지 아니하고 짐짓 굴복하는 것처럼 한다. 그러면 저사람은 기뻐서 스스로 남을 이겼다고 뽐낸다. 하지만 명예와 이익이 갈리는 지점에 이르면 또 누가 그를 두려워하며 그를 괴로워하며 그에게 굽히겠는가? 이런 까닭에 이 같은 사람은 마침 내 죽을 때까지 한 가지 일도 성취하지 못한다.

 

 

 

화와 복의 계산법

선을 행하고도 세상이 알지 못해 명예가 드러나지 않고, 남에게 은혜를 베풀었지만 정작 그 사람은 모르거나 알더라도 능히 보답할 수 없게 되면, 반드시 나중에라도 복을 받게 마련이다. 악을 행했는데도 세상이 알지 못해 추한 소문이 밖에 들리지 않고 , 남에게 원망 살 일을 했는데도 그 사람이 모르거나 혹 알더라도 보복할 수 없게 되면, 반드시 기이한 재앙을 만나게 된다. 착한일을 하고도 복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이미 그 이로움을 누린 자이거나 혹은 이름이 실지보다 부풀려진 자이다.

 

나쁜 짓을 하고도 재앙이 없는 사람은 이미 그 벌을 받은 자이거나 비방이 실지보다 지나친 자라 하겠다. 가령 백 금의 값이 나가는 밭을 팔면서 이제 2백금을 받게 되면, 나는 마땅히 다른 재물 중에 백 금의 값어치가 나갈 만한 것을 내어 붙여 주어야 한다. 천 금의 값어치가 있는 것을 다만 5백 금만 받게 되면, 상대방은 또한 마당히 다른 재물 가운데 5백 금의 값이 나갈 만한 것으로 내게 붙여 주어야 한다.

 

이런 까닭에 백 근의 무게에 해당하는 선을 행하고서 2백근에 해당하는 명예를 누린 자는 하늘이 반드시 그에게 할당된 복에서 백 근어치를 깎는다. 악한 일의 무게가 10근의 욕을 얻은 자는 하늘이 반드시 그 운명 중에서 10근에 해당하는 것을 보상해준다. 이 같은 이치는 너무도 정확해서 속일 수가 없다. 옛사람이 일찍이 이를 말했지만, 이처럼 상세한 경우는 없었다.

 

 

사귐의 도가 오래갈 수 없는 까닭

한번은 장맛비가 열흘 넘게 내렸다.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친밀함은 부자 만한 것이 없는데도 옛사람 중에 너무 자주 보다보니 새롭지가 않다’( 數見不鮮 )고 일컬은 자가 있었다<사기>(육가전) 에 나오는데 , 내가 수여난필’(3-153)에서 이미 그 윤리에 어긋남을 논한적이 있다>민물 을 윤택하게 하는 것은 비만 한 것이 없다. 하지만 사흘이 지나고 보면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한다. 사람이 서로 사귀는 것이 어찌 부자 보다 친밀함이 있겠으며, 그 혜택을 베푸는 것이 어찌 비보다 나은 것이 있겠는가? 그럴진대 시도 때도 없이 서로 찾아가 정의를 두터이 하려 하겠는가? 이것이 사귐의 도가 오래갈 수 없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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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부터 방영해 주는 공주의 남자라는 드라마에 푹 빠져 보고 있다. 사도세자 때의 이야기이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왕위에 오르려는 수양대군이 나온다 정치인들이란 예나 지금이나 정正한 사람이 아닌 것 같다.

 

옛 선비의 말씀을 읽다보면 몸과 마음이 차분해져서  참 좋다.

우리가 익혀야 할 도덕은 익히 7살이면 대부분 체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가 들어도 가장 기본적인 삶의 도를 행하지 않으며 욕심에 눈이 어두워지는 것은 어떤 연유일까?

배울만큼 배우고 아니 남들보다 더 배우고 가진 것이 많고 높은 자리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헐뜯고 자신을 내세우며 앞서거니 뒷서거니 우스운 몰골로 국민 앞에 서는 그들은 누구인지....

세상은 언제나 혼란속이다. 나 자신이나 잘 다스려야 할 것이다. 남을 입에 올리지 말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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