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박철
막힌 하수도 뜷은 노임 4만원을 들고
영진설비 다녀오라는 아내의 심부름으로
두 번이나 길을 나섰다
자전거를 타고 삼거리를 지나는데 굵은 비가 내려
럭키슈퍼 앞에 섰다가 후두둑 비를 피하다가
그대로 앉아 병맥주를 마셨다
멀리 쑥국 쑥국 쑥국새처럼 비는 그치지 않고
나는 벌컥벌컥 술을 마셨다
다시 한번 자전거를 타고 영진설비에 가다가
화원 앞을 지나다가 문 밖 동그마니 홀로 섰는
자스민 한 그루를 샀다
내 마음에 심은 향기 나는 나무 한 그루
마침내 영진설비 아저씨가 찾아오고
거친 몇 마디가 아내 앞에 쏟아지고
아내는 돌아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냥 나는 웃었고 아내의 손을 잡고 섰는
아이의 고운 눈썹을 보았다
어느 한쪽,
아직 뚫지 못한 그 무엇이 있기에
오늘도 숲속 깊은 곳에서 쑥국새는 울고 비는 내리고
홀로 향기 잃은 나무 한 그루 문 밖에 섰나
아내는 설거지를 하고 아이는 숙제를 하고
내겐 아직 멀고 먼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는 단순하게 영진설비에 돈 갖다 주는 일만으로 읽히지는 않는다. "아직 뚫지 못한 그 무엇이 있기에" 라는 진술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이 시의 화두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일 터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갈등 속에서 살고 있고, 어쩌면 이것이 시, 더 크게는 예술의 존립 근거요 또 그것이 사람들로부터 끊임없이 사랑받는 원인일 터이다.
바다와 나비
김기림
아무도 그에게 수심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
흰 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무우 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거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바다가 얼마나 넓고 깊은 줄도 모르고 내려갔다가는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오는 흰 나비.... 이것이 씌어진 시대(일제강점기)를 생각한다면 이 흰 나비가 지식인의 비유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으나, 어쩌면 인생 자체가 바로 이 흰 나비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짙푸른 바다, 하얀 나비, 새파란 초승달의 대비가 유화를 보는 듯 선명하다.
선운사에서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선운사에서 피었다 지는 동백꽃을 보면서 지나간 사랑을 생각하는 시다. 사랑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으나 그것이 끝나기는 꽃이 지는 것만큼이나 빨랐다. 그것을 잊는 것도 그렇게 빨랐으면.... 그러나 어쩌랴, 잊는 데는 아주 한참이 걸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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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편치않아 시집을 골랐다.
모든 시를 소리내어 읽지는 못했다. 단 몇편 이렇게 소리내어 읽고 다시 읽고 또 읽어보았다. 눈처럼 푹푹 빠지는 길을 걷듯 詩들은 건조하기 이를데 없는 마음으로 성큼 성큼 걸어 들어왔다.
그 어느때로 내가 돌아갔다.시인의 마음이 곧 나의 마음이었다.
한때 나는 어떠한 열망을 품고 시 짓기공부도 했었다. 그때엔 파란하늘이 차창에 비춰도 조그만 빗방울 소리에도 나만의 어떠한 낱말들로 한 줄의 글귀들로 행복했었다.
어느날인가부터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이 흩어졌고 저마다 생활로 돌아갔다. 나 또한 그랬다. 각별한 길은 사라졌다. 서서히 오염되기 시작했다. 각별했던 감성들도, 특별했던 글귀들도 만날 수 없게 되었다. 문득 길을 잃었다. 아득해버린 모든 것들, 안개속에 사라져버린 것들... 나는 찾을 수 있을줄 알았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 다만 맑고 곧고 편안한 내가 되어가는 길을 선택했다.
막역한 이들이 슬쩍 웃고 들어서도 내 이름 석자를 건너건너 알게되어 찾아온 이들도 반갑지만 모두가 낯설기만 하다.사실 그들이 낯선 것은 아니다.다만 내 직업이 낯선것이다. 불편한 내 직업이 늘 낯설었던 것이다. 어느새 오늘의 그런 시간들이 어제처럼 지나가고 있다. 내일은 낯선시간이 아닐 것이다. 멋진 모델이 되고 싶어하는 나의 막내와 순하기만 한 둘째와 내가 품던 길을 나서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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