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추억 따위를 사는 사람도 있나요? 그게 도대체 무슨 가치가 있다고?"
프란시스코 할아버지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흘렀다.
"당신은 젊은 나이에 꽤 성공한 것 같군요. 아무리 그렇다 해도 소중히 간직하고 싶은 추억이 전혀 없나요, 젊은이는?"
"제게 중요한 건 언제나 현재, 그리고 미래뿐입니다.
추억 따위를 어쩌구 할 아까운 시간이 있을 리 없죠. 그런 건 할 일 없는 사람들이나 연약한 여자들이 생각해내는 감정의 사치에 불과한 것이죠."
"누구에게나 지나간 날이라는 건 있게 마련이오. 그렇지 않고서는 오늘의 당신이 있을 리가 없을 테니까."
"그건 그래요.그 러나 지나간 날은 말 그대로 이미 지나간 날이에요. 조금도 연연해 할 필요가 없는.... 내리의 성공을 향해 나아가야 할 우리들에게 중요한 건 현재와 미래뿐이죠."
"좋아요, 젊은이. 그러나 생각해 봅시다. 과거가 없이 현재나 미래가 있을 수 있겠소? 그 미래는 곧 현재가 되고, 그 현재도 계속 지나가서 이미 과거가 되고 있지 않겠소. 그게 바로 세월이라는 것이지.... 그 중에서 젊은이가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든지 그건 자유요, 그런데 젊은이, 당신은 왜 이 가게엘 온 거죠? 이곳은 젊은이가 이미 지나가 버렸기 때문에 아무 쓸모가 없어졌다고 생각하는 과거의 추억을 파른 가게라는 걸 알면서 말이요."
프란시스코 할아버진는 여전히 입가에 따뜻한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젊은이를 바라보았다.
줄리앙은 잠시 대답을 잃었다.
그렇다. 내가 왜 이까짓 고물같은 가게의 문을 밀고 들어왔지? 라는 생각에 잠겨 머뭇거리고 있는데, 프란시스 할아버지가 선반 위쪽에서 작은 병 하나를 내려 줄리앙의 앞으로 내밀었다.
..
..
"줄리앙 레뷔라고 했지? 자넨 지금 망설이고 있지만, 실은 자네의 머리 속은 추억을 만나보고 싶은 심정으로 가득차 있다는 걸 알지. 자, 이 스트로우를 꽂아 천천히 불어봐요."
----
짧은 단편이 몇개 묶여져 있다. 외국서적인줄 알고 골랐는데 아니었다. 동화처럼 재미있고 잔잔한 감동이 책을 읽는내내 가득했다.
프란시스코 는 원래 신부였고 오래전 그를 사랑한 여인때문에 신부직을 그만두어야 했으며 그 여인과 함께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살림을 꾸렸으나 얼마 지나지않아 여인은 병을 얻어 죽고 만다. 그는 그녀와의
애틋하던 추억을 떠올리며 , 아름다운 빛깔을 만들어 병속에 보관하기 시작한다. 그녀가 그리울 때 그는 밤마다 추억의 병을 불어 그녀를 만나고 밤이 새도록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는 사이 그에게는 추억을 되살리는 신비의 힘이 생겨나게 되고 추억의 병을 파는 가게를 열게 된다.
성공한 이들이거나 많은 것을 잃은 이들이 그를 찾아오면 그는 그들에게 따뜻했던 지난날을 볼 수 있게 해 준다. 추억의 병을 파는 것이다. 그들 모두는 추억속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화해를 하고 따뜻한 마음을 얻으며 행복한 오늘과 밝은 미래를 설계하게 된다.
우리는 모두 과거로 부터 걸어왔다. 돌이키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일, 용서하지 못할 일, 비밀스럽게 혼자만 간직하며 지나온일... 수많은 일 속에 한 두가지씩의 어떤 응어리를 품고 살기도 할 것이다. 누군가 어떤 신령의 힘으로 이야기속의 가게처럼 그런 추억의 병을 파는 가게를 열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우고 싶은 과거를 맑은 물로 흐를 수 있게 한다면 얼마나 근사할까? 당장이라도 달려가 누군가와 화해를 하고 악수를 하고 아이같은 모습으로 오늘의 친구가 될 수 있을 터인데...
언젠가 초등학교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들이 해마다 떠오른다. "나이가 들수록 추억속에 사는 일이 많다".. 그런 것 같다. 아득하고 희미해졌지만 다소 아름다운 마음을 지녔던 순간들이 나에게도 있었으므로 . 순간을 살아가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이지만 과거로부터 자유로울수는 없다. 우리가 지나온 길이므로. 잊어버리면 그만이고 시간이 흐르면 다 잊혀지기도 할 것이지만 그 미약함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이루었다. 나의 진심과 나를 진정으로 보아주지 않았던 이들을 만나고 싶다. 나는 이런 사람이었노라고 이야기하고 싶고 때로 잘못된 판단을 했던 나를 사과하고 화해하고 참 좋은 친구가 되고 싶다.
오늘도 몇시간 후면 과거로 흘러가리라. 후회가 산처럼 밀려오던 시절이 있었다. 꿈 속이라도 추억의 병을 하나 얻고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나는 이렇게 달라졌으며 이런 사람이고 정말 좋은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책 만권을 읽으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섬/장 그르니에 (0) | 2012.01.20 |
---|---|
돼지꿈/오정희 우화소설 (0) | 2012.01.14 |
밤에 쓴 인생론/박목월 (0) | 2012.01.09 |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도종환 (0) | 2012.01.04 |
고전에서 발견한 삶의 지혜/이택용 (0) | 2011.12.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