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12월 11일 一事一言
내 기억이 시작하는 지점에는 몇개의 사물이 있다. 반짝반짝 윤이 나는 나무 마루, 햇볕을 기묘한 형태로 일그러뜨리던 간유리문, 무거운 추가 달린 괘종시계, 어린이용 담요가 그것이다. 담요의 색도 형태도 떠오르지 않은 채 오로지 크기와 느낌만 기억나는데, 아주 어렸을 때는 그 담요 한 장으로 동생과 나를 다 덮을 수 있었다. 좀 더 자라서는 내 몸 하나만 들어갔고, 나중에는 담요 밖으로 얼굴도 발도 나올 만큼 자랐기 때문에 어디론가 치워졌다.
그렇게 작은 몸들을 통과해 지금의 이 신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생각하면, 터무니없을 만큼 당연하면서도 신기하다.
그다음 기억에 등장하는 담요는 훨씬 더 사이즈가 크다. 펼쳐놓으면 방의 절반 정도를 차지한다. 초스러울 만큼 진한 자주색 바탕에, 소시지 색과 비슷한 분홍색 장미곷이 큼직큼직하게 그려져 있다. 이 담요에는 방을 무대처럼 만드는 마법이 숨어 있다. 동생과 함께 낑낑거리며 장롱에서 담요를 빼내 방에 펼쳐놓기만 하면, 지평선이 포함된 넓은 들판을 가진 것처럼 신이 났다.
우리는 그 위에서 구르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낮잠을 자거나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만화'스누피'를 처음 봤을 때 물론 내가 가장 좋아하는 꼬마는 루시였지만, 2위는 라이너스였다. 라이너스는 항상 담요를 가지고 다니는데 나는 그 마음을 너무 잘 아니까, 조숙한 꼬마는 평생 그리워하게 될 사물과 그 사물이 데려가 주는 특별한 세계에 대해 알아차린 것이다. 라이너스는 어떻게 알았을까? 우리는 평생 무언가를 그리워 할 것이며, 종국에는 그리워할 마음 자체를 그리워 하게 될 것임을.-김성중.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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