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만권을 읽으면..

맛있는 문장들/성석제/창비

다림영 2011. 3. 2.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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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중에서

무용지물 박물관/김중혁

 

나는 망설이다가 얘기를 꺼냈다.

"나, 네 방송 매일 들어."

"어, 그래? 요즘도 듣고 있었어?"

"음,재미있어."

"재미있다니 다행이다. 요즘 회사일이 너무 바빠서 자원봉사를 그만둘까 하는 생각도 있었는데, 그럼 안되겠네."

"당연히 안되지. 너같이 뛰어난 디자이너를 잃어버리면 안되지."

"내가 디자이너라고?"

"물론. 넌 최고의 디자이너야."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시각 장애인을 위한 인터넷 라디오 디자인'을 그만둔 이유는 열등감 때문이었던 것 같다. 메이비의 방송을 듣고 난 다음부터, 나는 디자인을 한다는 게 조금씩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의 라디오방송이 도대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내안의 무엇인가가 조금  바뀐것만은 분명하다.

 

오래전부터 나는 디자인이란 통조림이라고 생각해왔다. 통조림을 따는 순간부터 내용물은 썩기 시작한다. 디자인이 완성되어 제품이 출시되는 순간, 디자인은 이미 낡을 것이 된다. 하지만 메이비가 만들어낸 디자인은 절대 썩지 않았다. 디자인이란 정말 무엇인가, 하고 생각해본다. 물론 답은 없다.

 

나는 그런 고민을 하는 사람치고는 레스몰 디자인 사무실을 잘 운영해나가고 있다. 디자인이란 무엇일까라는 고민은 집에가서 하고 회사에서는 돈을 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가끔 씩은 회사에서 고민을 하고 집에가서 돈을 벌 수도 있을텐데 그것만은 뒤바뀌질 않는다.

<...>

 

사무실 한쪽 벽면에는 레스몰 디자인을 시작할 때부터 걸어놓은 '예술은 집에가서 하고 회사에서는 디자인을 하자'라는 사훈이 있다. 얼마 전 그 아래에다 이런 말도 적어놓았다. '우리에게는 예술이 없다. 우리는 단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빌리인들의 성명서에서 빌려온 말이다.

 

새로운 디자이너가 오면 메이비의 방송을 들려준다. 그러나 눈을 감고 사람을 그려보라고 한다. 대부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상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본다. 눈을 감고 실제로 메이비가 설명해주는 잠수함을 그리는지, 벌거벗은 여자친구나 입술이 섹시한 남자친구 생각을 하는지는 알수 없지만 '메이비 방송듣기'는 레스몰 디자인의 통과의례 같은 것이 됐다.

 

무엇을 생각하든 무엇을 그리든 , 눈을 감고 있는 것은 디자이너에게 좋은 훈련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가끔 눈을 감고 어둠 속에다 잠수함을 그려본다. 메이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잘 그려지질 않지만 그래도 이젠 어느정도 비슷하게는 그릴 수 있다.

 

잠수함이 완성되면 나는 캄캄한 어둠속으로 잠수함을 발진시킨다. 눈을 뜨고 있을 때는 시야가 굉장히 좁지만 눈을 감으면 공간은 끝없이 넓어진다 잠수함은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잠수함에다 노란색을 칠하고 싶지만 그것만은 잘되질 않는다. 언젠가는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펭귄뉴스>, 문학과 지성사 2006

 

 

여기에는 여러 메시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디자인이 완성되어 출시되는 순간 디자인은 이미 낡은 것이 된다 . 예술은 집에가서 하고 회사에서는 디자인을 하자. 우리에게는 예술이 없다. 우리는 단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이것만 해도 메씨지는 충분합니다만 중요한 게 하나 더 있군요. '<디자이너로서 무엇을 생각하든 무엇을 그리든> 눈을 뜨고 무엇인가 유용한 것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동안 우리의 시야는 좁아지지만 눈을 감으면 공산은 끝없이 넓어진다는 것.... 그 넓은 공간이 당장은 무용하게 느껴질지라도 이런 것이 실은 큰 쓸모, 유용함을 배양하는 시공간입니다. 이런 게 예술이죠. 존재만으로도 훌륭하지만요.

 

 

저는 저수지 가득한 잘 익은 술과 같은 아름다운 빛깔의 문장이 많은 사람의 가슴과 머리로 흘러갈 수 있도록 수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일을 잠시 맡았습니다.

문장에는 아름답고 슬프고 즐겁고 힘찬, 인생 희로애략애오욕의 모든 특성이 담겨 있습니다. 이 문장이 냇물과 도랑을 따라 흘러갈 때, 그 소리에 귀를 기울여주십시오. 냇가를 따라 달리셔도 좋고 도랑에 발을 담그셔도 좋습니다. 문장으로 푸르러진 마음의 풀밭에 누워서 푸른 하늘을 바라보시든가요.

 

저수지의 물로 세수를 하고 둑 위에 서서 얼굴에 묻은 물을 바람에 말리던 때를 떠올립니다. 수문 반대편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무에 바람이 집을 짓던 것처럼 모든 문장은 자연스럽게 제자리에 깃들이는 법이니 이 자연스러움에 흔연히 함께 해 주시기를- 문학집배원 성석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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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찾은 맛있는 문장들을 모아놓았다. 조그만책이지만 각별한 작가들의 맛있는 문장과 특별한 이야기들과 그것에 대한 지은이의 생각을 볼 수 있어 괜찮았다.  내가 읽어야 할 책들과 만나야 할 이들을 메모해 둔다.

나도 예술가도 그무엇도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지만 가끔 눈을 감아 보아야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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