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만권을 읽으면..

괜찮아, 살아있으니까/박완서.이해인.이현주.윤구병.정호승외/마음의 숲

다림영 2011. 2. 28. 18:47
728x90
반응형

 

 

 

 

 

본문 중에서

 

축복받은 낙천 유전자/유인경

 

얼마 전 소매치기를 당했다 마침 목돈이 필요해서 은행에서 돈을 찾아 가방에 넣어 두었는데 길거리에서 좌판 구경을 하는 사이에 누군가 내가 어개에 멘 핸드백에서 손지갑을 훔쳐 갔다. 붐비는 거리에서 핸드백을 제대로 닫지 않은 내가 한심하고,알토란 같은 돈을 허망하게 잃어버려 속이 쓰리긴 했지만 곧 생각을 바꾸었다

 

'그래도 돈만 잃어버려 다행이지, 만약 으슥한 곳에서 강도를 만났다면 얼마나 놀랐을까. 그리고 아마도 그 돈은 어떤 사람이 수술비나 학비에 쓰려고 가져갔을 테니 어느 단체에 기부한 셈 치자.'

생각을 바꾸자마자 몇 분 전까지 멍청하고 재수 없던 내가 우리 사회의 불우한 이웃에게 도움을 준 괜찮은 인간으로 변해 있었다.

 

내 딸은 나의 이런 '대책없는 낙천주의'를 지병이라며 한숨을 쉬기도 한다 언제, 어떤 사황에서도 내게 유리하고 긍정적인 면만을 보고 "그래도 다행이다"라고 중얼거리기 때문이다.

식당에서 맛없는 음식을 먹게 되었을 때도 형편없는 맛에 불평하기보다 '맛없다는 걸 확인했으니 다시는 이곳에 안 오면 되지 뭐'라고 생각하고, 정말 불쾌한 사람과 대면해야 할 때도 '저런 인간이 내 남편이 아닌 게 다행이다'라고 마음을 다스리고, 이것저것 일이 많으면 '내가 능력이 있다고 인정받으니까 일도 많읻 ㅡㄹ어오는 거야'라고 생각하는 일종의 공주병 증세까지 보인다

 

작년 여름에는 딸과 둘이 스페인 여행을 갔는데 기차를 잘못 타서 왕복 다섯 시간을 허비했다. 딱딱한 기차에서 계속 앉아 있어야 하는 불편함, 그리고 안내판을 잘 보지 않은 딸의 부주의함 등이 신경질 나긴 했지만 다시 생각 모드를 바꾸었다 '덕분에 스페인 시골 풍경도 보고, 딸이랑 질리도록 오랜 시간 동안 수다를 떨 수 있어서 다행이야'라고.

 

 

이런 낙천성은 타고난 면도 있지만 숱한 연습과 훈련을 통해 더욱 증상<?>이 심각해지고 있다 사실 난 아직도 매사 불평불만이 많고, 걱정투성이에다 열등감덩어리다. 수시로 불안하고 항상 내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고 주변 환경이 만족스럽지 못하다.

 

하지만 그런 것에 유난히 집착하고, 걱정하고, 열등감에 사로잡히면 내게 돌아오는 것은 몸과 마음의 질병뿐이란 걸 세월을 통해 알았다.

내가 무척 존경하고 사랑하는 , 그리고 지나치게 의지했던 친정엄마가 치매에 걸려 10년간 고생하시다 돌아가셨다 총명하시던 엄마가 당신 자신조차 못 알아보고,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 기저귀를 차는 모습을 보는 것은 절대 행복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난 엄마가 정신은 멀쩡한데 몸만 불편해 수시로 고통을 호소하고 짜증 부리는 중풍환자가 아닌 것이 다행스러웠다 . 다시 아기가 된 엄마를 돌보는 것은 매순간 가슴 철렁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치매 걸린 엄마는 내 손을 잡고 어디든지 가셨고 세상을 원망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엄마를 모신 덕분에 그 무섭던 오빠들이 이 막냇동생에게 매우 고분고분한 태도로 바뀌어 처음으로 상황이 역전되었다.

엄마는 가장 불행한 순간까지도 내게 많은 선물을 주었던 것이다.

무심해서 부인 생일도 안 챙기고, 50이 넘었는데도 새벽까지 당구를 치는 남편도 그나마 심야에 당구를 칠 체력도 있고, 함께 시간을 보낼 친구들이 있다는 증거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내게 닥친 힘들고 어려운 상황만 이렇게 대처하는 것이 아니다.

내게 없는 것조차 '없어서 다행이야'라고 세뇌시킨다.

얼마전 한 지인의 경기도 근처 우아한 별장에 초대받아 저녁식사를 대접받았다. 주인의 재력은 물론 안목이 돋보이는 별장 인테리어며 고급스러운 식기류를 보면서 부럽기보다 '이 별장을 언제 치우고 어떻게 관리하며 이 비싼 그릇이 개지면 어떻게 하나'라고 생각하며 내 생활의 소박함에 감사했다.

 

보석반지, 명품시계 등도 마찬가지다. 수시로 뭘 잃어버리는 내게 그건 보석이 아니라 뇌쇠포를 죽이는 애물단지다

물론 충분히 노력해서 개선할 수 있는 일조차도 "괜찮아, 괜찮아"란 주문을 외면서 넘어가 버리기 때문에 무언가를 성취하거나 객관적인 성공에 대한 열정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끝없이 확고한 목표를 세워 자신을 채찍질하고 불이익을 당하면 당당하게 내 권리를 주장해야 인생에 발전이 있고 꿈도 이뤄지는데 "그나마 다행이다"만 중얼거리는 것은 비굴하고 지나치게 소극적인 태도일 수도 있다.

 

그러나 행복이 반드시 뭔가를 많이갖고, 이름을 떨치고, 높은 자리에 올라야 가능한 건 아니다 나이가 들고 보니 내가 못가진 것에 연연하고 투덜거리며 늙어가는 것보다는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하며 스스로 '난 축복받은 사람이야'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한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염색을 해야 하는 흰머리도 귀찮기보다는 염색할 머리카락이라도 풍성하다는 것에 감사하고, 주민등록번호를 쓸 때마다 내가 깜짝 놀랄 만큼 나이가 들었지만 그만큼 추억이 많다는 것에 감사하고, 빈약한 월급이지만 세금이 적으니 고맙고, 운전면허가 없지만 덕분에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책을 읽거나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어 유용한 시간을 보내 즐겁다.

 

이렇게 모든 마이너스 조건들을 플러스 상황으로 만드는 낙천적인 성격 덕분에 난 노후 걱정도 하지 않는다. 다 혼자만 늙는 것도 아니고, 아직 정리 못한 22년 전 신혼여행 사진부터 시간 나면 해 보고 싶은 요리까지 해야 할 일도 많이 남아 있고 수다 떨 친구도 많으니 말이다.

나의 축복받은 낙천 유전자에 새삼 감사할 뿐이다.

 

 

---

 

 긍정적인 마음가짐이 그날 하루를 환하게 만든다. 어떠한 나쁜일이 생기면 화를 내고 남을 탓하고 하다보면 그것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없이 화가 날 상황들을 만들어 간다 . 한번 일의 매듭을 짓고 밝은 방향으로 과감히 몸과 마음을 돌려 걸으면 그 다음 일들은 실타래 풀리듯 풀려나가기 마련일 것이다.

 

오늘도 상황은 별반 좋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살아있고 내일이 있고 들려주신다는 예약손님이 있고 일을 끝내고 돌아가면 따뜻하게 반겨 맞이해 줄 아이들이 있다 . 더 이상 무엇을 원할 것인가  .  그저 이만하기를 감사할 뿐이다.

 

언젠가 거지아버지와 그 아들이  부잣집의 불이 난 것을 구경하면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집이 없어 얼마나 다행이야 했더란 이야기가 떠오른다. 돈이 많아 부동산에 여기저기 투자해서 돈줄이 막혀버린 가까운 이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 모든 상황이 최악이어서 신용불량자가 되기도 하고 , 이자를 갚지 못해 빛더미로 남았다는 말도 듣는다.  어쩌면 나도 돈이 있었으면 부동산에 투자를 해서 건설붐 악화로 모든것이 꽁꽁묶여 누구처럼 이상한 사람이 되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 

 

언젠가 류시화님의 책에서인가 그런이야기가 있었다  . 인도소년이 그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였던가 아니면 너무 빨리 달려서였을까 그가 소년에게 마구 화를 내었더니 소년왈 '그래서 당신이 죽었습니까?'..

맞다 그는 죽지 않았고 어찌되었든 그 장소에 갈 수 있었다 .

<괜찮아, 살아 있으니까> ...나는 살아있다 . 어찌되었든 봄의 환한 기운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고 생기발랄한  젊은이들을 바라볼 수 있고 온기있는 집이 있다 . 모든 것은 그것으로 충분히 묻힐 수 있고 웃을수 있는것이리라.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