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만권을 읽으면..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전혜린/<주>민서출판

다림영 2011. 2. 17.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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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 책을 집어들었다. 고등학교때부터 걸핏하면 <그리고..>를 들고 다녔다. 그땐 그랬다. 그분의 책을 들고 있지 않으면 뒤떨어지는 소녀처럼 생각하는 것이 어쩌면 트랜드였는지도 모르겠다.

돈이 없는 우리는 삼중당문고판을 선호했고 그때 그책의 가격은 이백오십원에서 삼백원정도 했을 것이다. 버스값이 이십원일때이니... 그리고 끝까지 다 읽었는지는 모르겠다. 항상 읽다 만 것 같았다. 폼만 재고 다닐때였으므로, 그냥 그 책 한권 지니고 왔다갔다 했던 것 같다. 독서에의 갈망도 어떤 영혼의 청소작업에도 마음을 기울이지 않아 성숙한 인간이 되지 못했다.

 

지금생각하니 누군가 옆에서 때마다 독서와 공부에 대한 지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더라면 어떠한 변화가 있었을터인데 하지만 모든 것은 자기 할나름이기도 하니, 이제와서 그때의 이야기를 해본들 무엇할까 싶기도 하고, 이 늦은나이에 책을 들고 심취하게 된 것 그 하나만으로도 나는 나를 넘어서고,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깊은 길목에서 서성이니 감사하다.

 

책을 다 덮어도 심오한 그분을 알 수 있을까. 매번 가을이면 혹은 깊은 겨울이면 봄이면 그렇게 각별한 계절이어서 그러한 날씨여서 들게되는 책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이다. 언젠가 또 철저한 고독에 지쳐갈때 나는 이 책을 들고 전철을 타고 버스에 오르며 고독을 즐기며 인생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아주 오래전 독일프랑크푸르트에 다녀온 적이 있다. 꿈속인듯 아득한시절이었다. 낙엽수북한 가을이었다. 옛 어느문학가가 아침저녁으로 거닐며 시를 지었다던 그 오래된 다리를 거닐면서도 나는 밝기만 했고 인생을 몰랐다. 모든 것이 지나갔다. 지금도 지나가고 있다. 모짜르트의 음악에 귀를 기울인다. 헛된 시간을 보낸 오늘을 후회하며 마음에 오고갔던 본문을 적어본다.

 

본문중에서

 

혼자 있지 않기 위해서

원래 여성은 지속성을 지향하고 있다. 글나 현대 독일의 기술화된 세계는 완전한 지속성을 상실하고 있고 순간에 의해서 결정되고 우연에 지배되고 있다.

이러한 고도로 기술화된 사회는 인간의 마음에 반발을 심어준다. 현대 독일인은 순간적인 것을, 찰나를 사랑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과가 따르지 않고 책임질 필요가 없으니까. 밝고 그림자 없는 것을 그들은 원한다. 순간은 모든 것에 새로운 공간을 주고 생기를 부어준다. 그것에 의해서 인간의 마음 속에는 거짓된 주체성의 느낌이 생겨나게 되고 그 인상은 다음 체험이 올 때까지만 지속된다.

 

어느 독일 잡지에 난 일이 있었다. 기자가 어느 틴 에이저 소녀에게 생의 목적을 물었다.

춤을 추러 일어서면서 소녀는 '혼자 있지 않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

다음 무엇이 제일 무서운가를 물었더니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대답이었다.

즉 순간에 몸을 내맡기고 고독을 페스트보다 무서워하고 있으면서 두려워하고 도피하는 것이 현재 독일 틴 에이저의 지배적인 심리 상태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야말로 여성에게 가장 위태로운 상태일 것이다.

 

여자의 본질이란 지속적인 관계내에서만 개화할 수 있고, 짧게 단절되는 정열에 몸을 맡기고 끝에는 냉담한 회의주의 속에 도피하는 태도는 여자의 본질을 일그러지게 하거나 꺾을 수가 있을 것인 까닭이다.

 

도덕적으로 보아 독일 여성은 위기에 놓여 있는 것 같다. 구시대의 쇠사슬을 끊었다. 그러나 새로운 조리는 그들에게는 주어져 있지 않다.

결국 독일 여성이 겪고 있는 위기는 사회 기구의 변화에 따르는 필연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한 과도기적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그들만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우리시대는 모두가 마음의 중심이 영혼의 안주와 감정의 안정을 잃고 있다. 끝없는 기술의 발달로 인간은 단지 기능을 작용하는 기계로 퇴화되어 가고 있다. 기술의 부단한 분해 작용이 우리들 모두를 해체시키고 텅빈 공동<空洞>을 우리의 내부에 만들고 있다.

영혼이나 감정은 요구되지 않느다. 맑은 두뇌와 활짝 깬 의식과 직업상의 정확성이 인간으로부터 요구되고 있는 전부다.

 

발달은 계속하는 기술 세계는 노동력으로서의 여자를 남자와 같은 위치에 갖다 놓았다. 그 결과가 여성의 직장 진출이고 모성으로서의 의무의 거부 내지 인공적인 완화로 나타나게 되었고 남녀간의 변질을 가져왔다.

 

한편으로는 양성간의 정열이 거의 마비된 듯 무력 상태에 들어가 있고 전장에서의 우애만이 삭막한 생존 경쟁의 터전에 남겨져 있다. 그런가 하면 또 한편엔 순간적인 향락과 사이비 정열의 추궁을 통해 자신의 고독과 출구 없는 감정의 탈출구를 찾아보려는 시도도 보인다.

 

남자와 남편은 다르다

결혼전에 비에 후가 달라지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있다면 끝없이 아내의 저주를 감수한 소크라테스 정도가 아닐는지?

이 달라진다는 것-자아의 동일성을 침식당하는 것이 두려운 나머지 결혼을 포기한 사람들도 많다. 키에르케고르나 그릴파르처가 약혼을 파기한 이유가 다만 '자아에 대한 계속적인 방해'가 싫었고, '자기 내부에 있는 고독에의 요구'를 채우기 위해서라고 일기 속에 고백하고 있는 것이 그 좋은 예다.

 

나도 물론 달라졌다. 외적으로 볼 때 일견 큰 변동이 안 일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첫째로 나는 '시집살이'를 해본 일이 없다.그리고 남편을 받드는 아내도 아니다.이것은 나의 환경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르고 또 내 천성에서 오는 결함인지도 모른다. "남편에 의한 남편을 위한 남편의 생활을 내가 영위하고 있다'고 말할 양심은 나에게는 없다. 남편 곁에서, 남편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고 하는 편이 나의 결혼 생활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문구인 것 같다. 여러가지로 남편에게 손이 안 가며 오히려 도움받고 있 있는 나는 늘 미안하다는 의식 밑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그런 의미로는 나에게 한번도 불평을 토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무엇이든지 정신적 노동을 하는 것을 <가사 대신에>장려하며 도와 준 것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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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하고 달라지지 않는 사람이 정말 몇이나 될까? 사랑은 고작해야 3개월이라는 얘기가 있다. 연애할 때에는 하루도 보지못하면 눈에 가시가 돋는듯 하였을테지만 함께 살다보면 하루라도 서로 떨어져 있었으면 하는 부부가 어쩌면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사랑이 아니라 알수없는 정으로 가족으로 살아가는 것이 부부일터, 엊그제인가 텔레비젼의 한 강연에서 이런말씀을 어느분께서 하셨다. 주제가 무엇이었는지는 잊고 그말씀이 생각날때마다 나는 혼자 웃는다. 흔히들 알고 있는 이야기였는데 한가지가 더 추가가 되었다.

 

오십에 들어서면 남편은 침대에서 죽은척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마땅치 않으면 부인에게 그런단다. "가족끼리 식구끼리 그러는 거 아니야"...얼마나 웃었는지.. 친구들 만나면 이 얘길 아는지 전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을때까지 옆에서 그저 그런듯이 나무처럼 서 있고 또는 물처럼 함께 흐르기나 한다면 참으로  다행인 삶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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